2024년 5월 3일 (금)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MBC / 8인의 사형수와 푸른 눈의 투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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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선 [inuit-_] 쪽지 캡슐

2012-04-16 ㅣ No.1534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

 


고상하고 아름답다 진리 편에 서는 일

진리 위해 억압받고 명예 이익 잃어도


비겁한 자 물러서나 용감한 자 굳세게


낙심한 자 돌아오는 그 날까지 서리라.

 


순교자의 빛을 따라 주의 뒤를 좇아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앞만 향해 가리라.

새 시대는 새 의무를 우리에게 주나니

진리 따라 사는 자는 전진하리 언제나.

 


악이 비록 성하여도 진리 더욱 강하다.

진리 따라 살아갈 때 어려움도 당하리.


우리 가는 그 앞길에 어둔 장막 덮쳐도


하느님이 함께 계셔 항상 지켜 주시리.


 

어느민족누구게나 / J. R. Lowell 작사, T. J. Williams 작곡

(시노트 신부님께서 가장 좋아 하시는 성가라고 합니다)
 




 

 

 

 

한겨례 21 [시노트] 미국인 신부, 인혁당을 기록하다
<1975년 4월9일> 발간한 제임스 시노트 신부…

강제추방 뒤의 ‘인혁당 사건 조작’ 기록 드디어 빛 봐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077000/2004/10/021077000200410060529019.html

 

 

박정희 정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 중의 하나가 바로 인혁당 사건이다.

지난 1974년 5월 중앙정보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아 남한 정부를 전복시키려 한 혐의로

도예종·서도원·하재완·송상진·우홍선·김용원·이수병·여정남 등 8명을 구속했다.

이들은 1975년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 19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는 박정희 정권이 유신독재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처형된 8명은 국가전복 기도는커녕 ‘인혁당’이라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박 정권은 살인적인 고문으로 이들한테서 거짓 자백을 받아내 완벽한 공안사건을 만들어냈다.



간첩조작 폭로 뒤 한국서 쫓겨나



인혁당 사건의 조작 사실은 어떻게 알려졌을까.

조작 사실을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은 한 사람의 미국인 신부였다.

사건 당시 천주교 인천교구 총대리로 활동했던 제임스 시노트(76) 신부가 그 주인공이다.

시노트 신부는 최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 창립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출간될 예정인 <1975년 4월9일>에서 인혁당 사건의 전모를 자세히 밝혔다.

1975년 4월9일은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이 처형된 날이다.

시노트 신부는 같은 해 4월30일 한국에서 추방당해 미국으로 돌아간 뒤

자신이 인혁당 사건 발생 무렵 겪었던 일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 기록은 지난 2001년 함세웅 신부에 의해 ‘발굴’돼 최근 빛을 보게 됐다.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 사건 발표 한달 전인 1974년 4월 한 미국 대사관 직원한테서

“곧 대규모 간첩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박 정권이 긴급조치를 막 발표한 시점이었다.

“천주교 신자인 그 직원을 평소 알고 지내던 미 군무원의 집에서 만났는데,

그가 그런 충격적인 얘기를 한 겁니다.

당시 미 대사관 직원들은 한국의 정보요원들을 상대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그가 ‘조금만 지나면 알게 될 것’이라며 ‘얼마나 잘 꾸며내는지 지켜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날 술을 많이 마셨는데, 당시 미 대사관이 한국 정부의 못된 짓을 수수방관하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시노트 신부는 그 직원의 말이 거짓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한달 뒤 그 직원의 말은 사실로 입증됐다.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이른바 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는데,

어찌나 잘 꾸며대는지 나도 속을 뻔했어요.

그 신직수라는 사람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시노트 신부는 이를 계기로 국내 천주교 신부들이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저항에 나설 수 있도록 힘썼다.

그때는 천주교보다는 개신교 목사들이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김수환 추기경께 편지를 써서 불의에 저항하도록 촉구해달라고 말씀드렸죠.

박형규 목사 등 개신교 사람들은 감옥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에 저항했지만

당시 천주교는 비교적 조용했습니다. 지학순 주교 외에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분들이 별로 없었죠.”




시노트 신부의 외침은 함세웅 신부 등 젊은 사제들의 호응을 받았다.

시노트 신부와 뜻을 같이한 외국인 신부들은 함 신부 등 국내 젊은 사제들과 함께

기도회 등을 열며 인혁당 사건의 부당함을 알렸다.

당시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과 영국의 기자들도 이 사건에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우리말 실력이 뛰어난 시노트 신부는 이들의 통역으로 활동했다.




유신정권 지원한 미 정부 상대로 투쟁



하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은 1년 뒤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고 처형됐다.

“1975년 4월8일 대법원 선고를 직접 지켜봤는데,

사형 확정을 선고하는 민복기 대법관의 목소리가 개미 목소리처럼 작았습니다.

자기가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없었던 거죠.

법대에 앉아 있는 대법관들의 모습이 그렇게 애처로워 보일 수가 없었어요.”

사형은 대법원 선고 뒤 19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집행됐다.



“그날은 내 생애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죠.

박정희 정권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시노트 신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투사가 됐다.



1961년 인천 영종도 성당의 주임 신부로 처음 한국과 인연을 맺은 그는

이전까지는 목회활동에만 전념했던 평범한 신부였다.

그는 인혁당 사건 이후 각종 민주화 집회에 참석해

당시 외신에 보도된 박정희 정권의 비리와 폭정을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전했다.




그의 반독재 투쟁은 결국 박 정권의 비위를 거스르고 말았다.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이 처형된 지 20여일 만에 강제추방을 당했다.

 

“추방당하고 나서 미국의 교회와 학교, 기타 여러 모임에서 박 정권의 폭정을 고발했습니다.

미국 정부에도 여러 경로를 통해 박 정권에 대한 지원 중단을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반응은 냉랭했다.

“박 정권의 비리를 얘기해도 미국 정부 책임자들은 전혀 반응이 없었습니다.

박 정권이 강력한 반공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박 정권을 지원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결국은 미국 정부가 문제였던 겁니다.”



그 뒤 시노트 신부의 투쟁 대상은 미국으로 바뀌었다.

각종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다 10번이나 구속당했다.


“박정희 독재정권은 미국 정부의 무책임한 대외 정책의 산물입니다.

반공 정부라면 그것이 독재정권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지원했기 때문에

무수한 시민들이 피해를 입은 겁니다.

미국 정부는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 시민들의 권리를 짓밟고 있습니다. .”




시노트 신부는 2002년 민주화기념사업회의 초청으로 20여년 만에 입국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제2의 고향인 한국에 정착했다.

그와 사제단과의 인연은 가족간의 그것만큼이나 각별하다.

“사제단은 감히 정의를 말하기 어려웠던 혹독한 시절에 정의를 외친 분들입니다.

소수였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강했죠.

이분들이 없었다면 이 땅의 민주화는 그만큼 더뎠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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