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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글방 / 말씀과 빛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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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6-04 ㅣ No.147336

 

 

(공동번역성서) 2021. 6. 4. [연중제9주간 금요일] 도란도란글방

 

말씀과 빛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 1.1-5)

1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2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4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아멘

 

오늘 본문에서 진정한 발광체이시며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을 빛이 오셨다라고 표현하는 거에요 그 빛에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께서 오셔서 창세기 첫째날에서 그 빛이 낮과 어두움을 갈라냈었던 것처럼 오늘 본문 요한복음 1장에 빛도 어두움에 비춰지죠 그러니까 여러분 창세기를 갖고 요한복음을 어떻게 풀것인가 요것을 추론해 내야지, 이 요한복음을 갖고 창세기에 그 이야기가 어떤 것인가 일루 가면 안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창세기를 비롯한 구약은 신약의 구속사를 힌트하는 거라 말이죠 그러니 요한복음에 내용을 갖고 창세기를 끌고 들어와서 요한복음에 그 빛이 예수였으니까 이 빛도 예수일 것이다 이렇게 추론해 버리면 안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추론이 되면 봐라 예수도 창조된거 아니냐 일루 가게 된다 말이에요

 

창세기에 그 빛은 하느님에 계획과 뜻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제 밤이 물러가고 낮이 찾아오게 되는 그러한 역사가 시작된다라는 것을 선포하는걸로 이해하면 된다는 말이죠 오늘 본문에도 그렇게 빛이 들어와서 어두움에 비추게 되죠 인간이 누구이며 하느님은 누구시며 역사는 무엇이며 우주는 무엇이며 사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지에 대해서 명확한 조명을 해줘요 죄인들은 그것이 깜깜하다 말이죠

여러분이 예수 믿기 전에 여러분이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왜 사는지 왜 선택 없이 이 땅에 이렇게 던져 졌는지 그리고 우주가 뭔지 그리고 역사가 뭔지 인생이 뭔지 모르셨잖아요 그게 어두움이래니깐요

 

거기에 빛이 비추어 그걸 알게 됐어요. 여러분, 인생에 목적이 뭐에요 아시잖아요 인제 전혀 모르고 있는걸 안다. 그거에요 빛이 오셔서 이제 우리에게 왜 우리가 살아야 되는지 이 역사가 뭔지 그 실체를 조명해 주신 거에요 그런데 어두움에 속한 죄인들은 빛을 비추는데 그 빛을 전혀 알아보지 못해요 왜냐하면 죄인들은 영적인 소경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요한 1,7-10) 7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 8 그는 빛이 아니라 다만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10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 보지 못하였다.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에게 빛은 증거에 대상이 아니에요 빛은 비추면 알 수 있는거지 보는 사람에게는 빛이 증거의 대상이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하느님께서 빛을 증거할 어떤 사람을 보냈단 말이에요 그게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이 지금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을 소경취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빛을 증거하기 위해 어떤 사람을 보낸 거에요

 

(마태15,14) 14 그대로 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먼 길잡이들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렁에 빠진다.'

 

(요한9,39-40) 39 예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예수와 함께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 몇이 이 말씀을 듣고 '그러면 우리들도 눈이 멀었단 말이오?' 하고 대들었다.

 

소경이였죠 이렇게 아담 이후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빛이신 하느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소경들이 된 거에요 그래서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그렇게 소경들에 눈을 뜨게 하는 그런 기적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을 구원해 내시는 것은 바로 이렇게 소경된자 영적 소경된 자들에 눈을 뜨게 하시는 사건이라는 걸 보여주시는 거에요

하느님은 그렇게 소경된 자들 중에서 한 무리를 택하시고 그들에 어두움을 몰아내시고 눈을 뜨게 하셔서 하느님을 인식하고 하느님을 알아 볼 수 있도록 만드시기 위해서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거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영적소경에서 이제는 보는 분들이 된 거에요

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소경되었던 자들에게 하느님을 설명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어요 빛에 본체이신 하느님의 뜻과 계획과 능력과 성품이 어떤 것인지를 육신들에게 육신을 입고 설명하러 오신 거에요 왜? 영이신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보여질 수가 없어요 설명되어질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육신을 갖고 있는 인간들에게는 육신을 입은 어떤 분이 오셔서 그 육신을 갖고 육신을 통해서 하느님을 설명하셔야 된다 말이죠 예수님이 바로 그 하느님을 설명하러 오신 거에요 하느님에 뜻과 인품과 계획과 성품과 그분에 능력과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육신 안에서 설명해 준거란 말이죠

 

(요한14,9-11) 9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니 무슨 말이냐? 10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지금 아버지를 설명하고 있다라는 거....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는 자로 만들기 위해.... 내가 이 땅에 왔다라는 것을 지금 예수님께서 이렇게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시는 거에요 그 결과 그 빛을 알아보게 된 자들을 우리가 성도(聖徒), 그리스도인 이렇게 부르는 거죠 거룩하게 구별된 자 그래서 성도란 말이죠

 

(2고린4,6) 6 '어둠에서 빛이 비쳐 오너라' 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신 하느님에 성품과 뜻과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에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다라고 표현하는 거에요 그러니 빛과 말씀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다른 모양에 단어인 거에요

말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을 설명하고 표현할 때 쓰는 거잖아요? 예수님은 육신을 입은 인간들에게 그들이 육신에 눈으로는 도저히 알아 볼 수 없는 영이신 하느님을 삶으로 인격으로 우리에 수준에 맞게 설명하고 가신 분이라 그랬어요 다른 말로 빛에 삶을 그대로 살아서 보여주시고 가신 거에요 그래서 그분이 말씀이다 라고 표현하는 거에요

 

여기서 말씀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는 로고스 죠 당시에 초대교회는 헬라철학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었어요 헬라철학에 대표적인 사상이 이원론이죠 이원론이라는 것은 현상과 원형을 분리하는 사상입니다 이 땅에 나타나는 현상과 물질들은 이데아라는 실체에 투영일 뿐이라는 거에요 그 이데아라는 실체는 순수하고 순결한 영적 세계인데 그러나 이 물질적인 세계는 악한 거다 그렇게 생각을 한 거에요 그들은 인간 자체도 그러한 이원론으로 해석을 했어요

영원이라는 이데아에 것이 육신이라는 물질안에 갖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헬라철학은 인간에 육신을 빨리 벗어버려야 할 더러운 것으로 취급을 했고 인간이 참 행복을 위해서 전력을 다해서 추구해야 될 것은 어서 이 육신을 벗고 이 영혼에 자유를 얻어내는 것 그것이 인간들이 추구해야 할 최고에 복이라고 여겼단 말이죠

그래서 예수를 안 믿었던 그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처럼 막 죽을때도 행복하게 기쁘게 죽은 거에요 착각이였지만 그들이 이러한 이원론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그러한 이데아와 지상에 현상을 총 망라한... 우주에 질서를 만들고 창조하고 운행하는 힘과 또 그 힘에 의지 뜻 계획 이런걸 로고스라 불렀단 말이에요 뜻 계획 설명하는 것 창조한 것 그것이 바로 헬라철학 안에 들어있었던 로고스라는 단어가 담고 있던 내용들이였죠

당시 헬라 철학에 젖어 있던 사람들은요 그 로고스에 씨가 인간에 영혼안에 들어있다라고 믿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인간에 영혼은 이 로고스를 감지할 수 있다라고 여겼어요 그래서 이 인간에 영혼 안에 들어있는 이 로고스에 씨가 이 우주에 편만해 있는 그 로고스를 감지해서 그리고 이해해서 그 이치를 터득해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라고 생각을 했죠

 

그러니까 당시 헬라철학에 영향을 받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 로고스라는 단어 속에서 그 로고스가 계시에 수단이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내 안에 있는 로고스에 씨가 이 로고스를 알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로고스 그러면.. 아 그건 계시에 수단이다 라고 생각을 했어요

왜냐면은 영적인 그 좋은 것이 물질적인 인간속에 이해되어질 수가 없는데 그 로고스와 로고스에 씨를 통해서 그게 알려질 수 있다라고 믿었기 때문에 로고스 그러면 계시에 수단으로 알았단 말이에요 헬라철학에 빠져 있었던 사람들이.

당시 헬라 철학은 그 로고스가 계시한 것으로 지식을 얻게 된다 그랬죠 그런데 헬라 철학 안에서는 그 지식이 바로 인간에 영혼을 구원한다라고 믿었단 말이에요 헬라철학은 그 지식이 바로 인간에 영혼을 구원한다고 믿었죠

그러니까 헬라철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로고스 하면 그 로고스가 바로 계시의 수단이고 그리고 구원의 수단이고 방법이라고 그렇게 척 알아 먹었단 말입니다 왜 요한이 그 로고스라는 단어를 갖다가 그렇게 끌어다 썼는지 아시겠죠?

 

자 그래서 요한이 하느님을 계시하고 또 하느님에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에 수단이요 구원에 수단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를 로고스 말씀 이라는 단어로 표현을 한 거에요 그러니 요한은 당시 헬라 사상에 푹 젖어 있던 독자들에게 너희들이 평소 계시에 수단이요 구원에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그 로고스가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야 이렇게 시작하고 들어가는 거에요

그러나 요한이 단순히 헬라 철학만을 염두에 두고 로고스라는 단어를 선택한건 아니에요 이 로고스라는 단어는요 구약에서 유대 신학에서 하느님에 말씀과 하느님에 지혜사상을 나타낼 때도 쓰였던 단어에요 창세기 1장에서 하느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죠

그러니 창조에 수단이에요 말씀은 로고스는, 그리고 하느님에 말씀은 하느님을 계시하는 수단이라고 그들이 생각했어요 왜 율법 그 말씀이라는게 하느님에 성품과 하느님 되심을 우리에게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주신 거니까요 그들에 개념속에 들어있는 이 로고스라는 것은 바로 계시에 수단이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하느님에 말씀을 잘 지키면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구약에 나타난 그 로고스에 개념도 역시 창조에 수단이요 계시에 수단이요 구원에 수단이죠 그 말씀 로고스를 잘 지키면 구원해줄께라고 말씀하셨고 유대인들이 그렇게 믿고 있었으니까 그죠?

요한복음은 헬라에 플라톤 철학이나 스토아 사상에 젖은 이들이 읽어도 이해하기가 쉬웠구요 또 구약에 말씀에 능통한 골수 유대교인들이 읽어도 이해가 쉬운 책이였어요 헬라사상과 유대사상이 아주 놀랍게 융화되어있는 책이 바로 요한복음이란 말이에요 그렇게 요한복음은 구약과 유대교에 신학적 배경에서 형성된 복음이 헬라적 개념으로 완벽하게 번역되고 토착화된 가장 좋은 모델인 거에요 그래서 요한은 그에 다른 서신서 에서도 예수님을 말씀이다 라고 소개하는 것으로 바로 시작하지요

 

(1요한1,1-2) 1 우리는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2 그 생명이 나타났을 때에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말씀에 관해 간과해서는 안될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이 있는데요 성경은 분명 하느님은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그래요 그런데 지혜서에 보면 천지는 누가 창조했다 그래요 지혜가 창조했다 그러잖아요 또 잠언에 보면 그죠

 

(잠언8,12. 22-31) 12 나 지혜는 예지와 한 집에서 살고 있으니, 지식을 얻어 뜻을 세우려면 나에게 오라. 22 야훼께서 만물을 지으시려던 한 처음에 모든 것에 앞서 나를 지으셨다. 23 땅이 생기기 전, 그 옛날에 나는 이미 모습을 갖추었다. 24 깊은 바다가 생기기 전에, 샘에서 물이 솟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25 멧부리가 아직 박히지 않고 언덕이 생겨 나기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26 평평한 땅과 땅의 흙을 만드시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27 그가 하늘을 펼치시고 깊은 바다 둘레에 테를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다. 28 구름을 높이 달아 매시고 땅 속에서 샘을 세차게 솟구치시며 29 물이 바닷가를 넘지 못하게 경계를 그으시고 땅의 터전을 잡으실 때, 30 나는 붙어 다니며 조수 노릇을 했다. 언제나 그의 앞에서 뛰놀며 날마다 그를 기쁘시게 해 드렸다. 31 나는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이 즐거워 그가 만드신 땅 위에서 뛰놀았다.

 

지혜가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다 그러죠 그리고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 했다 그런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구약은 하느님에 말씀과 지혜를 하나로 보는 거죠 말씀이 천지를 창조했다 그러고 지혜가 천지를 창조했다 그러니까 말씀과 지혜는 하나에요 그러니 말씀을 곧 지혜 다른말로 하느님에 뜻 하느님에 계획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거에요

그리고 유대신학은 말씀과 지혜를 실체화 시켜 가지고 인격화한 표현을 많이 썼어요 유대신학과 유대문학에서는 하느님에 말씀 다바르 로고스는 남성 명사이기 때문에 그 로고스 하느님에 말씀은 하느님에 아들이다 이렇게 표현했다구요

그리고 지혜 후쿠마 소피아라는 이 단어는 여성명사거든요 그래서 이 지혜를 하느님에 딸이라고 표현한다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조금아까 읽었던 그 잠언 8장에 보면 이 지혜가 하느님에 딸이 되어서 그 하느님에 그 보좌 앞에서 막 재롱을 떨고 있는 모습이 나오잖아요 그죠.

그리고 유대인들은 하느님에 말씀은 귀로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고 만질 수 있으며 그 자체가 능력을 갖고 있는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유대인들에 개념에는 그게 그렇게 들어가 있었단 말이에요 우리가 생각하면 지금 그거 어떻게 그렇게 생각했을까 잘 모르지만 유대인들은 그렇게 아예 말이라는 개념 자체를 그렇게 갖고 있었단 말이죠

 

(이사55,11)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 오지는 않는다.'

 

이 말을 무슨 사람처럼 어떤 인격체처럼 이렇게 표현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한은 말씀이라는 이 다소 추상적인 단어로 실체이신 예수님을 표현하는 거에요 이건 유대신학과 유대문학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였단 말이죠 그러니 요런 배경을 알면 왜 하느님을 말씀이라고 이야기할까 요것이 조금 이해하기가 쉽단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이라는 단어가 보여주는 것처럼 하느님은 자기를 계시하는 분이에요 빛을 드러내시는 분이에요 구약성경에 보면 간혹 자기를 감추시는 하느님 이런 표현이 있지만 그것은 하느님이 빛을 비추시는데 죄인들인 인간이 못 알아먹는다 라는 의미에서 자기를 감추신다는 것이지 하느님은 이 역사가 시작된 이후부터 계속해서 하느님 자신을 계시하셨단 말이에요 하느님은 돌부처나 다른 우상들과는 완전히 달라요 여러분

하느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도 당신에 지혜와 계획과 뜻을 모두 담아놓으셨고 수많은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하느님 자신을 설명하셨다는 거에요

 

(로마1,20) 20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무슨 핑계를 대겠습니까?

그러죠 하느님은 만물에 자기를 계시하신 다구요

 

(히브1,1-2) 1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 아들에게 만물을 물려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계속해서 예언자들로 말씀하셨다는 거에요 하느님을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류에 역사가 시작된 이후부터 계속해서 당신을 계시해오셨던 하느님께서 마지막으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완벽하게 하느님은 이런 분이야라고 계시를 해 주셨다라는 거에요 그렇게 하느님에 아들이 직접 오셔서 하느님을 계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에 뜻과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고 하느님을 알아 보지도 못한 자들은 이제 심판대 앞에서 변명할 거리가 없게 만들어 버리신 거에요

하느님의 아들이 직접 오셔서 하느님을 직접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는 거에요 그래서 이 성경을 받은 우리도 핑게치 못하는 거에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에 삶과 인격속에서 한처음부터 있었던 하느님에 지혜 즉 그분에 뜻과 계획이 모두 드러나는 것이구요 하느님에 성품이 모두 드러나는 거에요 빛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에 삶은 오직 하느님을 나타내는 것으로만 일관되어져 있어요 그분 자신에 마음과 말과 생각과 행동 이런 것은 전혀 없었구요 그분에 마음과 생각과 말과 행동이 전부 하느님을 나타내고 표현할 뿐이였어요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분은 사사로이 분노하거나 기뻐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일을 하실 때도 자기에 뜻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지 않으셨어요 그러니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드러낼것인가 그 삶만 살다 가신 거에요

 

(요한12,49-50) 49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어떻게 말하라고 친히 명령하시는 대로 말하였다. 50 나는 그 명령이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나 아버지께서 나에게 일러 주신 대로 말하는 것뿐이다.'

말도 예수님이 자의로 한마디로 안하셨다는 것입니다 전부 아버지를 나타내는 말만 하셨다는 거에요

 

(요한6,38-39) 38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예수님은 자기에 뜻을 한 번도 행하시지 않았다니깐요 그분은 자기를 비우시고 오직 하느님에 뜻에 따라 하느님만을 증거하기 위해 오신 말씀이시요 지혜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자신에 뜻을 완전히 비우신 거에요

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따랐던 사람이였어요 요한은 예수님과 먹고 마셨고 어떨 때는 그에 품에 안겨서 예수님에 숨소리 까지도 정확하게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육신을 가진 요한은 절대 영이신 하느님을 보거나 인지할 수 없는 사람이였잖아요 그런데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3년 남짓을 보내면서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본 거에요 실제로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은 말씀이시며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다라고 명확하게 기록을 해 놓은 거에요

그래서 사도 바오로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형상이다라고 기록을 한 거에요 그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을 그대로 설명하신 분이였다라고 기록을 한 거에요

 

(골로1,15-17) 15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16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

 

(2고린4,4) 4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악신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자들은 마귀에 미혹을 받아 그렇게 안빋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원수를 위해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용서(容恕)에 하느님을 보는 거에요 용서에 하느님 그게 하느님에 본질이거든요 그 용서에 하느님은 우리가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잖아요

그런데 그 용서에 하느님이 육신으로 이 땅에 내려오셔셔 육신인 우리에게 보여진 거에요 그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육신으로 설명되어졌다 래는 거에요 하느님이,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인 거에요 그리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면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신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또 자비(慈悲)에 하느님을 보는 거에요

원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어주시는 주님을 보면서 그 희생에 하느님을 보는 거에요 자기를 자해하면서까지 원수를 사랑해 주시는 그 사랑에 하느님을 보게 되는 거에요 그리고 그 저주받은 죽음에 대해서 하느님이 그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에 삶 전체 언행이 전부 하느님을 설명하는 거였단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느님에 말씀인 것입니다 문제는 성경이 우리 성도들에게도 똑같이 말씀으로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거에요 그게 우리에게도 요구된다 말입니다

 

(요한17,18)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이 사람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이사람들이 누구에요? 우리들이래니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그 목적을 우리가 그대로 갖고 세상으로 파견되는 거라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도 빛과 말씀으로써 삶을 세상에 나가서 살아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2고린3,3) 3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시켜 써 보내신 소개장입니다. 이 소개장은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령으로 쓴 것이며 석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겨진 것입니다.

그러고 성경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 향기라고도 이야기하잖아요. 성경은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처럼 빛에 비추임을 받은 우리 성도들도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명확히 기술(記述)하고 있어요 그 말은 예수님께서 자신에 뜻과 목적을 전부 부정하시고 하느님 아버지에 뜻과 목적과 계획을 위해서만 사셨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에 삶도 그렇게 되어야 된다라는 거에요

지금까지 나에 목적과 나에 계획과 나에 뜻과 나에 꿈을 위해서 달려왔던 그 죄인들에 삶에서 돌이켜서 내 꿈 내 뜻 내 계획을 다 접어 버리고 내 삶 속에서 하느님에 뜻이 구현되도록 살아야 된다라는 거에요

 

러니 여러분이 성당에 와서 여러분에 소원을 토해내면 안된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분이 나에 아버지이고 우린 연약한 육신을 아직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기도 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은 그 자리로 가는건 아니에요 내 소원을 이루는게 그리스도교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처럼 자기를 완전히 비워내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행동 이거 부인하고 그리고 하느님이 시키시는 말 하느님에 성품을 내 삶 속에서 들어내는게 그리스도인에 삶이라는 거에요 자기 하고 싶은 말 다하는거 아니라니깐요 내가 이 말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성품 하느님에 성품이 들어날 것인가 이거 생각하고 이야기해야 되는게 우리 그리스도인인 거에요 자기가 하고 싶은 행동 무조건 다 하는게 아니라 이 행동을 함으로 해서 이 하느님에 성품이 내 삶 속에서 구현되어질 것인가 이거 생각하고 살아야 되는게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거를 전혀 하지 않고 그냥 자기에 뜻과 자기에 힘과 자기에 목적만을 위해서 여전히 살아간다면 그건 성도가 아니라는 거에요

여러분 이렇게 우리는 나에 영광이 아닌 하느님에 영광을 위해 존재해야 되는 자들이라구요 예수님이 하느님에 영광만을 위해서 살았던 것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셨다 라는게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느님이 육신으로 설명되어진거라 날이죠. 그러면 여러분에 삶 속에서도 그 말씀이신 하느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야 되는 거에요

여러분도 작은 예수로 하느님에 말씀으로 그렇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그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을 보여주는 거에요 우리도 똑같이 예수님처럼 우리에 삶 속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거래니깐요 그러니 우리는 정말 대단한 신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이걸 확인하지 않고 여전히 나에 위상 나에 자랑 왜 나를 알아주지 않아 이런 힘에 원리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절대 이런 삶을 꿈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비와 온유함과 오래 참으심과 자비와 원수를 사랑하시는 그 크신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심으로 하느님을 증거하셨던 것 처럼 우리도 세상에 그렇게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마세요

 

(에페5,8-9) 8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9 빛은 모든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 맺습니다.

 

여러분은 빛으로 살아내셔야 되는 거에요 왜 하느님이 여러분을 방법과 수단으로 쓰시기로 하셨거든요

 

(1요한2,7-10) 7 내가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로운 계명이 아니고 여러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옛 계명입니다. 그 옛 계명은 여러분이 줄곧 들어 온 그 말씀입니다. 8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사실은 새 계명입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이미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계명이 참되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났고 또 그대들의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9 자가가 빛 속에서 산다고 말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도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자입니다. 10 자기의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며 그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너희들이 말씀에 삶 빛에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너희들은 아직 어두움이다 그러는 거에요 그런 시도조차 하고 있지 않다면 너희는 어두움이다 그러는 거에요 그런데 지옥을 안 믿으니까? 겁을 안먹어요 사람들이요 그래도 나는 구원받을 거야 착각하고 있다니깐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빛을 발하며 살고 하느님을 삶으로 소개하는 삶을 살게 되면 세상에 반응은 두가지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어두움인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통회 자복하는 반응이에요 우리가 빛으로 하느님에 말씀으로 살아내게 되면 세상이 두가지 반응을 한다 말이에요 하나는 통회 자복하고, 내가 어두움이구나 이걸 알아먹고 하느님께로 돌아온다니깐요

 

(이사6,5) 5 내가 부르짖었다.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

 

예 말씀이 이사야에게 딱 던져지자 빛을 보자 이사야가 나는 망하게 됐다 나는 죄인이구나 이렇게 깨달았단 말입니다 베드로가 빛이 딱 비취자 어떻게 됐어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그랬다니깐요 그러나 자기가 죄인임을 자각하자 마자 하느님께 완전히 항복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됐단 말입니다

이렇게 그 어두움에서 떠나서 빛에 삶으로 돌아오게 되는 반응이 있는가 하면 자신들에게 비치는 빛과 말씀을 향해서 돌을 들고 공격해 오는 그런 반응도 있어요

 

(요한1,5) 5 그 빛이 어둠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은 빛이 말씀이 다가가면 이길라고 덤벼들고 소유할라고 덤벼들고 소각할려고 덤벼든다라는 말이에요 그러나 결국은 못이기더라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말씀이시며 빛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에 삶이 그렇게 고단했던 것입니다 세상이 빛과 말씀이 딱 다가가자 마자 돌을 들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말입니다

그래서 말씀이신 여러분이 이 땅을 말씀으로 빛으로 살아내게 되면 세상은 반드시 여러분을 돌을 들고 공격하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을 소각(소멸)시켜 버릴려고 한다니깐요 그래서 여러분이 진짜 빛으로 말씀으로 살아내면 힘들어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시적으로는 그렇게 우리가 당하는 모습으로 비춰질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절대 우리가 지는게 아니라는 거에요 요한복음은 그걸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어요 요한묵시록에서도 내내 그걸 보잖아요

예수님은 세상에 힘을 추구하는 세상에 종교에게 뭇매를 맞고 돌아가신 거에요 분명 예수님은 그렇게 지는 모습으로 갔었대니깐요 세상은 빛이시며 말씀이신 그분을 향해서 돌을 들고 달려들어서 그 빛을 짓이겨 버렸단 말이죠 그런데 하느님은 그 물리적 세상 속에서의 패배가 바로 하느님에 용서와 자비와 인내와 온유와 사랑을 나타내는 말씀에 삶이며 그게 바로 승리에 삶이다라고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거에요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에 십자가는 이 세상에 관점으로 볼땐 지는 모습이잖아요 그런데 그 안으로 파고 들어가보면 그 안에 뭐가 있어요 용서가 있고 사랑이 있고 온유가 있고 자비가 있지 않습니까 그 십자가 안에, 그게 바로 말씀인 삶이고 그게 바로 승리다라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이야기해주시는 거에요 그리고 너희들에게도 바로 그러한 삶이 요구되고 있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이 말씀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거에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10장 말미에서 하박국을 인용해갖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그래놓고 11장에서 믿음에 조상들을 쭉 나열하는데 그 첫번째 인물로 아벨을 딱 올려 놓은 거에요 아벨이 누굽니까 세상에 종교를 상징하는 힘을 추구하는 나를 위해서 어떤 신을 방법과 수단으로 사용할려고 하는 그 세상에 종교로 부터 몰매를 맞고 맞아 죽은 하느님에 사람 그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인에 상징인 카인이 제사를 드렸죠 종교심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 카인에 종교심은 세상에 종교를 상징하는 거에요 아벨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예표하고 있는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종교 유대교가 정치적인 메시아 경제적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그건 자기에 힘을 추구하는 종교였단 말이죠 그 유대교가 예수라는 진리를 빛을 밟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딱 두가지 종교밖에 없어요 하나는 범신론이고 하나는 그리스도교에요 왜 제가 모든 종교를 범신론 안에다가 갖다 끌어 놓느냐 하면 ...범심론이 뭐에요 모든것이 신이라는 거에요 그 안에 인간도 들어가 있습니다 인간의 가능성과 피조물에 가능성을 전제로 한게 범신론인 거에요 내가 수도를 쌓고 내가 수련을 하면 나도 하느님이 될 수 있고 신이 될 수 있고 강한 자가 될 수 있다가 범신론이란 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나는 자력으로는 도저히 안되서 하느님이 나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나는 존재할 수도 없어요 라는 완전한 타력종교요 범신론은 완전한 자력종교란 말이죠 이 자력종교가 이 타력종교인 그리스도교를 돌로 깔아 뭉개는게 이 세상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타력종교(그리스도교)를 믿고 있는 자들은 항상 그 자력종교인 범신론에게 맞아 죽게 되어 있단 말이에요 아벨처럼 그런데 그게 바로 용서이시며 사랑이시며 인내이시며 자비이신 하느님을 살아내는 말씀에 삶이고 그게 바로 승리에 삶이며 하늘에서는 바로 그게 왕의 삶이다라는 것을 성경이 보여주는 거에요

여러분 뭘 그리스도교로 알고 계시는 거에요? 그리스도교 그러면서도 전부 무슨 범신론적인 그런 개념들을 갇고 있다니깐요 하느님은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되요 아니라니깐요 우리가 하느님에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래니깐요 나를 위해서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가 그 삶을 그대로와서 보여주신 거에요 나의 뜻과 내힘 내가 하고 싶은 말 내가 하고 싶은 행동 하나도 안하고 하느님에 뜻만 행하다 가는 거에요 그 삶을 우리가 이 땅에서 보여줘야 되는게 말씀인 삶이에요

여러분도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을 살아 내야 되는 거에요 작은 예수로, 그러니 힘든 거에요 이렇게 안돼서,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엉뚱한걸로 울지 마시라는 거에요 그걸로 우는 거에요 왜 나에게선 이게 안되는 거에요 왜 저 사람은 어떤 강사가 기도해주면 거품물고 막 펑펑 쓰러지는데 나는 왜 안쓰러지지 그런거 걱정하지 마세요 안쓰러지면 어때요 그게 정상이에요

왜 내 삶은 말씀에 삶 빛에 삶이 안되는가 그걸로 통곡하시며 그걸로 우시며 그걸로 간구하시며 기도하시란 말이에요 빛이신 예수께서 왜 그렇게 약한 모습으로 오셨는지 아십니까

 

(이사53,2-4) 2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3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4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예수님은요 너무 너무 못생겼고 너무 너무 약했고 너무 너무 보잘 것 없었어요 사람이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았다니깐요 그거는 얼굴을 봤더니 어휴 제수 없어 어떻게 저렇게 생겼냐 그랬다는 거에요 예수님이,

왜 하필 그런 모습으로 보내셨을까요 욘사마 같은 모습으로 왔으면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왜 이렇게 얼굴을 보면 어 어떻게 저렇게 개 밥그릇같이 생겼을까 이렇게, 근데 예수님을 그런 모습으로 보내셨어요

 

(이사53,5-8) 5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 6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 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7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8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어디 있었느냐? 그렇다, 그는 인간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거기다가 매맞고 죽는 그런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셨단 말이에요 그러나 이걸 보면은 이건 정말 약한 모습이죠 그러나 그리스도에 그 약한 모습은 힘에 논리로 운영되는 세상 사람들이 규정해 놓고 정의해 놓은 약함이지 하느님 나라에서는 바로 그 모습이 왕에 삶이라는 거에요

이 약함이라는걸 누가 정의해 놓은 것입니까 못배우고 못생기고 허약하고 키작고 이걸 뭘 기준으로 누가 이건 약한 거다라고 정의해 놓은 거에요? 힘에 원리를 추구하는 죄인들이 그렇게 정의해 놓은거 아닙니까? 하느님이 언제 그게 약한 거라고 그랬어요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 놓고 그래 이건 약한 거야 그러니까 저기는 가지 말자 그러고 그 자기들이 만들어 놓고 자기들이 그것 때문에 가슴아파하고 그것 때문에 자기에 모든 소중한 것들을 다 소진해 버리는 거에요

하느님은 절대 그걸 약함이라고 하지 않았다니깐요 그게 말씀에 삶이다 그러셨어요 하느님은 자기 자신을 자해하시면서 까지 원수를 살려내시는 사랑에 하느님, 용서에 하느님이세요. 그 모습이 세상에서는 약함으로 들어나는 거에요 왜 세상은 하느님과 정 반대의 길을 가는 자들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느님에 강함을 이 세상은 약함으로 표현한다 말입니다 못가게 할라구요 글로, 그러나 여러분은 이 세상이 정의해 놓고 규정해 놓은 것으로부터 돌아서서 반대로 생각하셔야 되요 지는게 이기는 거다 많이 들었잖아요 그러나 세상은 지면은 그냥 지는 거에요 그건 그런데 성경은 안 그래요 지는게 이기는 거라 그래요 그래서 신앙생활이 힘든거에요

여러분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형편없이 못생기고 약한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시는 거에요 하느님은 우리에게도 그러한 하느님에 성품과 뜻과 계획을 삶으로 살라고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여러분에 삶 속에 행복하고 기쁜 일 보다는 어려운 일들이 더 많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도 너희들이 정말 하느님에 성품과 뜻과 계획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낼 수 있느냐 이거 확인하라는 거에요 우리한테, 그래서 여러분들 자꾸 약한 자의 모습으로 세상이 규정해 놓은 그 약한 자의 모습으로 하느님이 이렇게 밀어 내 보시는 거에요

 

(1고린1,26-31) 26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또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습니까? 27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28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29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 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31 그러므로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이 말은 하느님은 가난하고 약하고 미련한 자만 들어서 쓰신다는 말이 아니에요 여러분은 이왕이면 일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버세요 그리고 공부할거면 이왕이면 열심히 해서 일등 하시라니깐요

이 말은 하느님에 택한 백성들은 약해 보이고 저주고 천해 보이고 멸시 받는 것처럼 보이는 이 물리적인 세상 속에서 약함이 바로 하느님 나라에 강함이라는 하느님 나라에 삶에 원리로 살아야 한다라는 것을 설명해 주는 말이란 말이에요 여러분 보고 일부러 가난해 지고 천한 곳으로 내려가라는거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그 약한 자에 삶 속에서 어떻게 승리를 만들어 내는지 그걸 한번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빛으로 하느님에 말씀으로 살다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쫓아서, 빛에 삶 말씀에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그 하느님에 말씀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잘 알아야 되겠죠 그게 뭐에요 성경인 거에요.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설명하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죠 그리고는 살아내시고는 가셨어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봐야 되요 그분은 가셨는데, 그분의 삶이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성경을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공부해야 그 예수의 삶을 배울 수 있고 그래야 그 삶을 살 수 있는 거에요

말씀을 읽지 않고 말씀을 공부하지 않고 말씀을 탐구하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사람들은 절대 그 삶이 안나옵니다. 되지 않아요 더 열심히 해야죠 그래서 하느님이 이 역사 속에 우리를 던져 놓으신 거에요 딴거 하라고 그러시는거 아니에요

 

그래서 성경은 영생을 하느님과 그분이 보내신 하느님에 아들을 아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거에요 예수님을 아는 것이 하느님을 아는 거고 하느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과 연결이 되는 거에요 하느님을 안다라는 것은 그분과 인제 관계가 회복되어졌다 라는 것이니까

왜냐면은 그분이 인간이 죄를 졌을때 완전히 관계를 차단시켜 버렸거든요 그래서 빛이 와도 못알아 보는 지경이 됬는데 인제 그 빛이 왔는데 아 이게 빛이네라고 알게 됐단 말입니다 그 사람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자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걸 영생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영원히 사는게 영생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건 지옥에서도 영원히 산대니깐요 거기서 한 500년 있다 풀어줄지 아세요 영원히 살아요.

영생은 하느님과 관계있는 삶을 사는 것 그게 영생인 거에요 그래서 하느님을 아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살고 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빛을 보고 말씀을 깨닫게 된 사람들이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이에요

 

(요한1,4) 4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 그래요 저는 제 안에 생명이 있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 안에 생명이 있다 그러지 않고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 그래요 그 말은 예수님이 내려오셔서 내 안에 내주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있어도 산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예수를 맞아들인(迎接) 자 만이 생명있는자 산자 영생을 소유한 자 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 없이 사는 모든 인생은 전부 헛개비 인생인 거에요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에 뜻과 상관없이 사는 모든 삶이 다 죽은 자에 삶인 거에요 왜 생명은 그 예수 안에만 있으니까 그 예수에 삶과 예수에 뜻과 예수에 계획 안에서 행하는 것만 산 삶이에요 딴 삶은 전부 죽은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없이 떵떵 거리면서 사는 사람들 하나도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거 전부 죽은 삶인 거에요 하느님 앞에서 전혀 카운트 되지 않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진심으로 영생에 관심을 두고 계시고 정말 영생을 원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편지로 예수 그리스도에 향기로서의 삶을 추구하셔야 되는 거에요 그 예수 그리스도에 삶만이 진짜 생명에 삶이니까

그 예수님이 부를 축적하셨습니까 명예를 탐하셨나요 예수님이 뭘 하다 가셨습니까?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고 자기 손해를 보면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다 가신 거에요 그게 성도에게 요구되는 삶인 것입니다

그 삶만이 살아 있는 삶이고 그 삶만이 하느님 앞에서 카운트 되는 거에요 그 이외에 삶은 심판대 앞에서 불로 확 태워 버렸을때 홀랑 타버리는 것이죠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났을때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그 집이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하느님 앞에 가갖고 여러분에 삶을 착 내놨어요 그래 어디 봘까 그래갖고 하느님이 확 불로 태워 버렸더니 홀랑 다 날라가고 요만큼 한 0.1프로 그것만 남으면 어떻게 하실 거에요?

 

오늘 여러분이 무엇을 하시면서 살았는지 한번 보세요 쭉 아침부터 뭘 하고 사셨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서 하느님이 훅 불었을 때 안날라가고 이게 산자에 삶이야라고 하느님이 인정해 주실 시간이 몇분이나 되는지 한번 계산해보세요

우리는 매일 매일 그거 회개하고 점검하고 살아야 하는 자들인 거에요 우리가 바로 그 생명에 삶을 살아야 하는 자들이에요 왜 죄인들은 절대 그 삶을 살아내지 못하니깐요 생명이 있는 것들은 반드시 그 생명이 갖고 있는 특징을 현상으로 나타내게 되어 있다니깐요

비행기가 날아가는 건요 사람들이 새가 나르는 것을보고 흉내를 낸 것입니다 어떤 물체가 날기 위해선 양력이라는 것과 추력이라는 게 필요해요 양력은 밑에 공기하고 위에 공기하고 이게 힘과 속도가 달라서 밑에 공기가 힘이 있고 빠르고 위에 공기가 약하고 느리게 되면 이게 밑에 공기가 힘을 받게 되서 뜨게 되는 거에요 그게 양력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비행기에 날개가 위에가 이렇게 곡선으로 되어 있죠 그래서 이게 달리면서 공기와 부딛히게 되면 아래는 평평하기 때문에 공기가 직선으로 확 들어간다구요 힘이 생긴다 말이죠 위에 곡선인 것은 공기가 휘어져 들어오기 때문에 약해진다 말이에요 그래서 뜨는 거에요 그런데 뜨기만 하면 뭐헤요

그런데 그게 뜰라면 추진력이라는게 필요하다구요 추력 빨리 달려야 된다 말이에요 그래야 이 공기가 힘을 받게 된다 말이죠 그래서 비행기는 프로펠러로 추력을 만들고 날개의 모양으로 양력을 만드는 거에요 그래서 나르는 것입니다

새보세요 새는 생명이 있어요 그 양력과 추력이 그 생명에 특징으로 이미 내포가 되어 있대니깐요 그래서 새는 프로펠러 만들고 날개 곡선으로 만들고 그렇게 일부러 안해도 날개 퍼덕이면서 추진력을 추력을 만들고 그 날개에 모양으로 양력을 만들게 되어 있어요 그게 생명이 가진 거에요 생명이 없는 것은 모방해서 만드는 건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내야 된다니깐요

여러분 안에 생명이 진짜 있다면 그 예수 그리스도에 삶 그것이 현상으로 나타나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물고기 다니는거 보세요 첨단에 과학을 동원한 잠수함 갖다 놔봐야 어떤 잠수함이 그렇게 물고기가 요렇게 갖다가 좌로 갔다고 우로 갔다가 뺑뺑 돌았다 이게 되는지 안된다니깐요 그러나 물고기는 날지를 못하죠 새는 물속에 못들어가요 그 생명은 특징이 있고 그 특징은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단 말이죠 그런데 생명을 가진 자들이 도대체 이게 뭔 삶입니까 이게 생명이 있다고 하는데 그리스도안에 들어있는 그 생명이 있다고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대표되는 그 삶이 안나오잖아요 그게 안나올때 우리가 좀 긴장하자는 거에요 그 생명의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어요 말씀안에 다 설명해 드린다 그랬잖아요

 

(요한20,30-31)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기적들도 수없이 행하셨다. 31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이 기록된 목적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 생명을 얻은자는 난다 말입니다 생명을 얻은 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이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게 되는 거에요 이 말씀에 삶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구절이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는 거에요 그 말은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하느님이 존재했고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향한 하느님에 계획과 뜻이 말씀은 곧 지혜니까 뜻과 계획도 이미 있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에 말씀이 있었다는건 하느님에 뜻과 계획이 이미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프리데스티네이션을 굳이 끌고 들어오지 않아도 하느님은 그렇게 계획하시고 어떤 목적을 향해 경륜해 가시는 분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에요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그 하느님에 뜻과 계획이 변할 수 없어요 왜 우리에게 이러한 삶이 요구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냥 순종할 뿐이죠 태초에 말씀이 계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순종하는 거에요 이렇게 가 그러면 가는 것입니다 왜 꼭 이렇게 살아야 되요 이건 안된다는 거에요

욥이 갑자기 환란을 만나서 고통을 당했을 때 자신에 전과를 돌이켜 보면서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긴거야 하여튼 그 전과를 전부 동원해서 해답을 찾을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욥은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 안에서 다른 말로 자기 뜻 안에서는 도저히 그 답을 알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는 큰 회의 와 혼돈 속에 빠져 버렸어요

그러나 욥에게 하느님에 빛이 쫙 비치자 욥이 깨달았죠 아 나 이전에 정말 하느님에 큰 그리고 영원한 뜻이 있었구나 이걸 깨달았어요 욥은 그 인간으로서는 결코 그 창조주의 뜻을 다 알수 없구나 그냥 순종하는 것이구나 이걸 알았단 말입니다.

 

성도인 여러분을 향한 태초에 정해진 하느님의 계획이 어떤 것인지 잘 배워서 그렇게 사는 것이 시간 낭비하지 않고 보람있게 삶을 사는 거에요.

강아지가 절대 피아노 만든 이에 그 피아노를 향한 의미와 뜻을 모르듯이 성도를 향한 하느님에 계획과 뜻을 여러분 나름대로 세상에 철학과 사상과 유행으로 추측해서 살아간다면 강아지가 피아노를 보고 저건 망치야 그러는 것하고 똑같은 거에요 그러니 성도에게 요구되는 삶이 원지 모르고 하느님에 뜻과 계획이 뭔지를 모르고 여전히 기복에 빠지고 신비에 빠지고 그래갖고 자기에 욕심을 채우는데만 급급해서 그렇게 살아간다면 강아지가 피아노보고 저건 망치야 그런거랑 똑같은 거라니깐요

그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니깐요 그런데 왜 이렇게 말씀을 소홀히 여기시는 거에요 정 모르시겠거든 이것만이라도 기억하세요 하느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향하신 하느님에 뜻을 아주 간단하게 두가지로 요약해 주시고 올라가셨어요 하느님을 사랑하고 니 이웃을 니 몸처럼 사랑해라 그게 여러분을 향한 하느님에 뜻과 목적인 거에요 하느님에 말씀 하느님에 뜻 즉 그리스도 위에 세우지 않은 그 모래위에 세운 집들은 마지막 심판에 날에 몽땅 불태워져 없어질 거에요

주님을 보세요 주님이 이땅에서 사람들이 왕으로 세워주겠다고 했을때 거들떠 보지도 않았어요 아울러서 사람들이 그분을 배반하고 돌아셨을때도 절대 흔들리지 않았어요 그냥 내 삶속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거 에만 목적을 두시고 올곳게 그길만 가셨다니까요

세상의 관점으로 여러분의 뜻에 따라 잘 됐다고 자랑할 필요 없고 안됐다고 낙망할 필요 없어요 부끄러워 할 필요 없다니깐요 우리 인간에 뜻과 하느님에 뜻은 많이 달라요 하느님이 태초에 말씀이신 하느님이 그 계획과 뜻 속에서 여러분을 끌고 가고 계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상황속에서 감사하면서 그냥 가면 되는거에요 주눅들지 마세요 그 사람들보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보다 자괴감 가지고 주눅들어 하는 사람이 더 나쁜 거에요 그 사람도 역시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인 거에요 그런 걸로 주눅들지 말고 나는 왜 이렇게 하느님을 알지 못할까 내 삶 속에서는 왜 이 빛이요 말씀에 삶이 나오지 않을까 그걸로 부끄러워 하세요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설명하러 오신 하느님에 말씀이에요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에 지혜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에 말씀이신 예수님은 태초부터 존재하셨어요 그래서 이 모든 우주 만물은 그 말씀이신 하느님에 뜻 안에서 그 계획대로 움직여야 되요 그래야 가장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거에요

여러분이 어떻게 해야 가장 행복한지 인제 아시겠죠 말씀대로 살아가는 거에요 그 하느님에 뜻은 모든 피조물들이 하느님의 이름앞에 항복하고 하느님에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 거에요 그래서 요한묵시록에서 전부 그 피조물이 계속 찬양만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함으로 모든 피조물들이 그 하느님에 뜻이 아닌 자기들에 유익과 자기들에 영광을 위해서 살게 되었어요

하느님은 하느님에 말씀이며 하느님에 지혜이며 빛에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하느님에 택한 자들에게 당신 자신과 당신에 뜻을 계시하셨어요 그렇게 해서 빛을 본자들이 있는데 그렇게 빛을 보게된 자들은 말씀을 통하여 계속해서 믿음으로 하느님을 보고 만지고 느끼고 알 수 있게 되었고 자신에 뜻에 따라 살던 삶에서 돌이켜서 그 하느님에 뜻에 맞는 삶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눈을 뜬 하느님에 성도들은 기록된 하느님에 말씀을 공부하고 탐구하며 묵상하면서 계속해서 하느님에 뜻을 발견해가고 그들에 삶을 하느님에 뜻에 맞는 삶으로 바꾸어 갈 수 있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일을 하시러 이 땅에 오신 거에요 아시겠죠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읽고 다 이해가 돼셨는지 확인하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큰 목소리로 우리 함께 읽어 보죠

1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2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4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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