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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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으로 공부하는 가톨릭 교리/요셉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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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08-14 ㅣ No.113896

 

 성경으로 공부하는 가톨릭 교리

II. 삼위일체

5.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

 g.예수님의 세례

죽음과 부활의 신비

예수님의 세례를 시작으로

공생활이 시작됩니다.

세례는 죽음과 부활을 뜻합니다.

즉, ‘내가 받을 세례가 따로 있다.’

라고 하신 것처럼

 요르단강의 세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예형입니다.

예수님은 물속에 당신

자신을 담가 죽임으로써

하늘에서 성령님이

내려오시게 합니다.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시면서도 당신 자신을

 낮추시는 아들을 보시고

아버지는 당신의 전부인

성령님을 아드님께 주십니다.

이로써 아들은 부활하게 됩니다.

죽음과 부활, 줌과 받음을

통하여 세 분이신 하느님은

한 분이 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성령님을

주시려고 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 자신을

죽일 때에만

우리 안에 공간이 생겨

성령님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죽지 않으려 하면

성령님을 받지 못해

결국 참으로 죽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나를 죽이고

성령님을 받으면

우리는 그 성령님을 통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룹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룸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시작하는

주님의 기도는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룰 때

바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세례란 곧 자신의 죽음이고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결심입니다.

그리스도는 세례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골고타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세례를 받는 동시에

새로운 사명이 주어집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고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으면

 세례가 무효인 것처럼

우리도 세례를 받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세례가 무효가 됩니다.

 세례는 내가 받은 소명을

끝까지 이루어나가기 위한

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h.사십 일간의 단식기도와

사탄의 유혹을 받으심

- 삼구(三仇)와 복음삼덕

삼구란 인간이 싸워나가야 할

세 가지 원수를 뜻합니다.

첫 째는 마귀입니다.

 마귀가 처음에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것은, ‘교만 ’

때문이었습니다.

 교만은 자신의 자아가

하느님과 같이 되는

죄를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나는 나다’라는 이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온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시고 그래서 유일하게

자신을 가르쳐 ‘나’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교만은 그 하느님 대신

나의 자아가 나의 하느님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르신께서는

이미 나이가 많으시고

아드님들은 당신의 길을

따라 걷지 않고 있으니,

이제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우리에게 세워주십시오.”

(사무 8,5)

나의 자아가 나의 왕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닌 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주님의 뜻을

어기게 된 것입니다.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

 (사무 8,7)

마귀도 예수님께

똑 같은 유혹을 합니다.

마귀가 하는 모든 유혹에는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또한 자신은 섬기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합니다.

사실 예수님도

하느님이시지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탄아,

나에게서 멀어져라.

성경에 오직 너의 주님을

찬미하고 그분만을

섬기라고 써 있다.”

(루카 4,8)

이것이 순명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하느님이 되신 것이지

스스로 하느님이 되려고 해서

되신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스스로 하느님이

되려고 해서 사탄이 된 것이고

그리스도는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소서.”하시며

종이 되시려고 하셔서

하느님이 되신 것입니다.

모든 죄는 이 교만에서 오고

모든 영성은 자신을

낮추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이 복음삼덕에서는

 ‘순명’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삼구의 두 번째는

“육체”입니다.

 인간의 원죄는

이 육체를 통해 전달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음으로써

성욕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죄를 짓고 자신들의 몸을

가린 것은 이제부터는 ‘성(性)’이

죄의 도구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향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십자가의 모습인데,

이제 사랑이 변질되어

자신을 만족시키는

이기적인 것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부부는 육체적인 관계를

함으로써 또 죄를 짓게 되고

그 죄는 자녀에게 전달됩니다.

다윗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정녕 저는 죄 중에 태어났고

 허물 중에 제 어머니가 저

를 배었습니다.”

(시편 51,7)

마귀도 예수님의

육체를 유혹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루카 4,3)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영혼은 영과 육의

중간에서 양쪽에서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비틀거리며 살아갑니다.

“나는 육적인 존재,

죄의 종으로 팔린 몸입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로마 7,14-25)

인간은 어차피 내 자신의

육체와 싸워야합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영적인

도움 없이는

 이길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로마 8,9. 13)

예수님은 니코데모에게

세례에 대해 설명해주시면서,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

 (요한 3,6)

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가 부모로부터

육체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영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안에

성령님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당신의 육체를

이기시는 방법으로 40일간의

단식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행위는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즉, 우리도 육체와

싸워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육체를 죽이면 영이 채워집니다.

예수님은 그 영으로

 마귀를 물리친 것이고,

이렇게 자신의 육체를

극기하는 것을

복음삼덕에서는 ‘정결’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께서

성욕은 식욕과 비례한다고

말씀하셨듯이 육체적인

욕망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게으른 사람이

정결할 수 없고 좋은 향기만

 좋아하는 사람이

정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육체의

욕망과 싸워나감으로써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삼구의 세 번째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돈으로 표현됩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는

 하느님께서 아벨의 제물만을

기꺼이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봉헌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감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카인의 제물엔

감사가 없었단 뜻입니다.

감사가 없었다는 것은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는다면

과부의 헌금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감사히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탄도 이 세상이

자신의 것임을 말합니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루카 4, 5-6)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추구한 것 단 하나는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짐’이었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는 것이 ‘가난’입니다.

가난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세 번째 무기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만을 바라고

그래서

하느님을 차지합니다.

성자께서는

가난한 마리아의 마음에,

또 가난한 마구간에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선택입니다.

하느님은 당신만을

 바라는 이에게 가십니다.

 원하지 않는 이에게

당신을 사랑해달라고

강요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가난이란 이 세상 것은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들, 돈, 명예,

인기 등은 모두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고

기록되어 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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