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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7주일. 2017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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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수 [sooyaka] 쪽지 캡슐

2017-02-17 ㅣ No.110161

 

연중 제7주일. 2017219

마태 5, 38-48.

 

오늘 복음은 하느님이 함께 계신 사실을 우리가 의식하면, 우리 앞에 어떤 전망이 펼쳐지는 지를 알리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을 비롯하여 인류가 지키는 법들이 열어주는 시야(視野)를 훨씬 능가하는 전망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린다는 말씀입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말은 기원전 18세기 인류 최초의 법전(法典)인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것은 고대 사회가 질서 유지하는 데에 필요하였던 법입니다. 잘못한 사람에게는 그 잘못에 비례하여 보복하라는 법입니다. 보복 당할 것이 두려워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못하게 하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보복이 두려워 유지되는 사회질서를 훨씬 능가하는 더 완전한 질서를 열어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그 말씀대로 하면, 이 세상에 남아 날 뺨이 있겠는가를 묻고 싶은 말씀입니다.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속옷 내주고 겉옷마저 내주면, 완전 알몸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세상은 나체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천 걸음을 강요하는 사람에게는 천 걸음만 가주면 되지, 그 이상을 가주겠다고 고집하면, 그야말로 뺨 맞을 일입니다. 그런데 왜 이천 걸음을 가주라는 말씀인지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새 법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법을 가르치는 율사도 아니고, 법을 집행하는 통치자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말씀한 예언자였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도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새로운 실천이 무엇인지를 알리는 예언자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어떤 사람과도 대립(對立)의 관계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이해타산을 하지 않고, 흔연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내어주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생존이고, 이웃과도 함께 베풀어진 생존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의 생존을 안전하게 지키는 처세법입니다. 내 생존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가까이 하고, ()가 되는 사람을 멀리하는 처세법입니다. 그것은 동물이 지닌 기본자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것과 전혀 다른 처세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원수도 사랑하는 처세법, 곧 하느님의 처세법입니다. 그것이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자녀 되어사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도 말씀합니다. 하느님은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말씀하면서 그 하느님이 하시는 바를 당신 스스로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초기 신앙공동체는 그분을 하느님의 생명을 산,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악을 악으로 극복하지 않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이 악을 악으로 갚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은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그들은 해석하였습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동태복수법은 인류가 만든 모든 법률의 기본 정신입니다. 오늘 현대 사회에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복수하게 하지 않고, 국가공권력이 대신하여 벌을 줍니다. 동태복수법의 정신은 사람들의 마음 안에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 정신에 익숙한 우리는 가해자에게 그 악행에 비례하여 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잘 하는 사회를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십니다. 상선벌악(賞善罰惡)이라는 교리는 인간의 잣대로 하느님에 대해 상상하여 나온 이론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것은 흔히 말하는 인도주의(人道主義)적 박애주의(博愛主義)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시야(視野)에서 잃지 않았던 것은 하느님이었습니다. 악은 하느님 안에 없습니다. 악을 악으로 퇴치하며, 질서를 보장하겠다는 생각은 하느님을 외면하고, 인간의 질서 안에 있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하느님의 자녀는 가질 수 없는 생각입니다.

 

정의를 부르짖으며, 남을 성토하고 비난하는 것은 그리스도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일종의 복수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생존이기에 우리가 추구하는 질서도 당연히 베푸심으로 채색된 것이라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비, 사랑, 용서 등을 기본 질서로 한 인류가 되어야 한다는 그분의 생각입니다. 불의(不義)하게 주어진 십자가 앞에서도, 비난하고 시위하며 성토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며 그것을 감수한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세례는 한 순간에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는 마술이 아닙니다. 자유를 지닌 인간입니다. 하느님의 자유를 배워 살겠다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부모의 호적에 이름이 올랐기에 그 부모의 자녀가 되어 사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난 생명은 인간으로 사는 법을 부모로부터 배우면서 그 부모의 자녀가 됩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운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을 배워 그분의 자유를 실천하면서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신앙은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의 자유 안에 살아있게 하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하겠다고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우리의 자유가 되게 살겠다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살아 숨 쉬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우리가 배워 사는 것입니다.

 

자비와 사랑과 용서는 나약하고 무력한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부모가 나약해서 자녀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와 경쟁 관계 안에 있지도 않고, 자녀 앞에 나약해서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베풀고 도움이 되면서 행복합니다. 부모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자녀 앞에서 하느님에게 기원이 있는 삶을 삽니다. 부모는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고 베풀면서 행복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이고, 그것이 오늘의 복음이 우리 앞에 펼쳐 보이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전망입니다.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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