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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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부활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2019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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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수 [sooyaka] 쪽지 캡슐

2019-04-26 ㅣ No.129316

 

부활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2019428.

요한 20, 19-31.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셨다는 것과 토마스 사도가 믿음을 고백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제자들은 어떤 집에 모여 있습니다때는 안식일 다음 날 저녁입니다.  안식일 다음 날이면, 오늘의 주일입니다. 제자들은 모여서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때, 그들에게 가르치고 행하신 일을 함께 회상(回想)하고,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날 하신 최후만찬을 기념하여 성찬을 거행하였습니다오늘 복음은 그 성찬 중에  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발현하셨을 때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여드레 후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또 나타나셨습니다.  그 시대 여드레 후는 일주일 후를 의미합니다.  두 번째의 발현도 주일의 성찬집회 때에 있었다는 말입니다토마스는 예수님에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그것은 초기신앙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하던 신앙고백입니다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보았다는 고백이며, 그분의 삶을 배워서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을 주셨고, 그 성령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입니다.  죄의 용서가 제자들의 임의에 맡겨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은, 긍정적으로 한번 말하고, 다시 한 번 부정적으로 말하여 강조하는 유대인들의 화법(話法)에서 온 것입니다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은 하느님이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창세기(2,7)에 보면 하느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진흙으로 사람의 모상을 만들어놓고, 그 코에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그랬더니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숨결을 받아 새롭게 사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절망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었지만,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해 다시 모였고, 그것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그들은 예수님이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보여 주신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그 용서와 사랑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예수님이 실천하셨고, 이제는 예수님의 숨결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사는 제자들이 실천하며 선포하는 것입니다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들은요한제1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자녀를 사랑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다른 자녀인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유럽중세(中世) 초기에 유럽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야만인(野蠻人)들을 대상(對象)으로 발생한 신앙언어가 있습니다그것은 소수 사람들의 이주(移住)가 아니었습니다옛날 로마제국의 경계(境界) 밖에 살면서 문명(文明)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던 민족들이 로마제국이 쇠퇴하자, 제국영토 안으로 몰려들어와 유럽대륙에 정착하였습니다옛날 중학교(中學校) 서양사(西洋史) 시간에 "야만인들의 이주"라고 우리가 배운 사실입니다그들은 유럽 각지에 이주하여 정착하며로마제국의 문명과 더불어 그리스도신앙도 받아들였습니다그들은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줄 모르고, 그들의 추장(酋長)이 명령하는 대로 살았습니다그런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면서, 교회는 먼저 각자가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진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했습니다각자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보상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 시기(時期)에 발생한 개인 고백이 있는 고해성사였습니다죄를 성찰하고 자기 죄를 고백하게 하고, 신부(神父)가 보속을 정해주어 자기 스스로 무지막지한 보속을 하지 못하게 하는 고해성사입니다그것이 오늘까지 교회 안에 실천되고 있는 고해성사의 발생유래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문맹(文盲)이고, 자기 잘못에 대한 책임감도 없던 시기에 도입된 관행(慣行)입니다. 오늘 현대인은 자기가 잘못 한 것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기본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고백을 동반하는 고해성사를 강요하면하느님이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은폐할 위험이 있습니다. 과거 한 시기에 필요해서 만들어진 고해성사 규정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복음보다 더 높이 평가하며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초기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해한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분입니다그 사실을 가르치다가 목숨까지 잃은 예수님이었습니다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숨결을 받아 사는 사람은 죄의 용서를 선포한다고 말하였습니다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은폐하면예수님의 숨결 따라 살지 않고, 유대교의 관행 따라 사는 것입니다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하느님의 자녀들을 또한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죄의 용서는 고해소에 앉은 신부에게 유보된 특권이 아닙니다. 용서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 안에 살아계신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복음 위에 군림하는 교회가 아니라, 복음을 배워 실천해야 하는 교회입니다.

 

오늘 복음에 토마스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기원 후 100년 경 이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교회는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그 시대 교회의 실태를 반영합니다예수님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당시의 신앙인들은 모두 예수님을 보지 않고, 믿는 이들입니다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을 주님으로 믿고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한 사람 잘 되기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그분은 용서하고 사랑하는 하느님을 가르치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숨결로 사는 공동체입니다교회에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오로지 섬기는 사람만 있습니다.  예수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살아 계셔서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입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  예수님의 말씀입니다이 말씀이 숨결로 살아 실천되는 교회공동체라야 합니다. 용서와 사랑은 인류 역사가 모르던 일이 아닙니다용서와 사랑은 인류와 더불어 살아왔습니다용서가 없고, 사랑이 없었던 인류역사는 없었습니다그 용서와 사랑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신 예수님입니다겨자씨와 같이 작은, 현재 우리가 하는 용서와 사랑이지만, 장차 하느님 안에 겨자나무와 같은 큰 결과를 기대하는 신앙인입니다.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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