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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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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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형 [largo7a] 쪽지 캡슐

2001-07-13 ㅣ No.4089

소중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1987년 봄날 오후 서울에 사시는  막내 이모 님으로부터 국제전화를 받았다.

어머님이 심장 마비로 돌아가셨다는 비보였다.

그 슬픈 소식을 듣는 순간 나는 울지 않았다.  아니 눈물이 나지 않았다.

단지 엄마의 죽음을 알려주는 이모 님의 음성이  어딘가 꿈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같았다.

그러나 이모 님의 전화는 엄마의 죽음을 알리는 슬픈 소식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대한항공 편으로 뉴욕의 케네디 공항을 이륙하여 서울로 향하였다.

케네디 공항에서 김포공항에 이르는  15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내내 나의 마음이나 머리는 그냥 정지된 상태로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오래도록 우리 곁에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엄마가, 이렇게 갑자기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을

줄이야.......

병원 영안실에 도착하였을 때는 어머님의 입관절차는 모두 끝나 있었다.

불효자는 어머님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도 보지 못하고, 엄마가 영면하신 나무 관만 부둥켜

안았다. 이상하게도 엄마를 잃었다는 슬픔이나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엄마의 장례식이 진행되고, 장지에서 하관식이 치르지는 동안 내내 봄바람이 정말 세차게

불어 댔다. 그렇게 엄마는 바람이 세찬 어느 봄날 흙으로 돌아가셨다. 아니 엄마가 애타게도

기다리셨던 예수 님 계신 하늘나라로 가셨다.

나는 울지 않았다. 아니 울려고 해도 울 눈물이 없었다.

장례식과 삼우제를 치른 후, 나는 회사가 있는 뉴욕으로 되돌아갔다.

사계(四季)가 구분돼 있는 서울과 뉴욕의 기후는 거의 비슷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해의 봄 날, 뉴욕의 "롱 아릴랜드"를 관통하는 고속도로 "벨트 파크 웨이"에는 장례행렬의 차량이 줄을 이었다. 엄마의 장례식을 마친 내 눈에 보통 때 같으면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렸던 장례차량이 계속하여 날마다 내 눈에 밟혀왔다,

고속으로 달리는 자동차의 차창에 부딪쳐 고속도로 위에 죽어 있는 바다갈매기나 비둘기의 죽음마저도 나의 시선에 안겨왔다. 엄마와의 영원한 이별은 미국인들의 죽음과 하늘을 날던 새들의 죽음까지도 나에게 새로운 의미를 지니고 다가왔다.

이상하게도 엄마의 장례식이 끝난 후 한참 후에야 엄마의 죽음이 현실적으로 서서히 내 가슴에 다가서기 시작하였다.

홀로 고속도로를 운전하다가도 엄마 생각에 눈물짓기도 하고, 엄마를 닮은 딸아이의 사진을 볼 때, 엄마와 함께 한 수많은 날들이 담긴 누렇게 퇴색한 사진첩을 보며, 엄마가 내 가슴에 새겨 둔 작고 소중한 추억들을 그리워하며, 다시는 그 아름답고 귀한 순간을 되돌릴 수 없는 슬픔으로 홀로 밤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 이야기는 까마득한 옛 이야기지만,  생전의 엄마도 내 말을 반신반의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사랑채에서 나는 엄마의 품에 안겨 젖을 먹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머리수건을 쓰시고, 엄마의 품에 나를 안으시고 젖을 먹이셨던 엄마의 모습을 분명히 보았으나, 엄마는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하시며 미소지으셨다.

나는 지금도 어린 내가 본 엄마의 모습은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       

여름날, 정원 앞 단감나무 아래에서 갓 난 아기를 품에 안고 찍은 엄마와 나의 흑백 사진,

하얀 크로버 꽃잎이 만개(滿開)한 여름 강변 언덕 위의 흑백사진에는 꽃무늬 양산을 쓰신 예쁜 엄마 곁에서 양쪽 신발을 바꿔 신고 두 다리를 쭉 뻗은 우스운 어린 내 모습이 담겨 있다.

그리고 엄마가  결혼 이후에도 약 6년 동안 여자중고등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치고 계실 때,

나는 엄마가 보고 싶어 유모에게 졸라 학교에 가면, 엄마 보다 앞서,  이젠 모두 할머니가 되어 있을 엄마의 제자들이 서로 돌아가며 나를 안아 주기도 하였다.

위의 얘기는 생각하면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의 이야기의 일부분이다.

 

우리에게도 슬프고, 고통스러운 시절이 있었다.

이 슬픈 얘기를 들려드리지 못함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우리 가정의 가장 어려운 시기의 어느 겨울 밤, 엄마와 나는 집을 향하여 밤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

엄마는 내 손을 꼭 쥐시며, "능문(能文-나의 아명(兒名)임)아! 엄마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너를 가장 사랑한단다. " 라고 말씀하시며,  엄마는 한참동안 나를 꼭 껴안아 주셨다.

그 이후 내가 고통스럽거나 슬픈 시기를 맞이하였을 때는, 언제나 내 영혼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그 겨울 날 귀가(歸嫁)길의   " 엄마의 긴 포옹과 사랑한다는 말씀"이 내 어려운 시기를 위로하고 극복하게 하는  용기와 힘이 되어 주었다.   

 

아버지와는 달리 엄마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동경의 최고 학부를 나온 세상의 눈으로 보면 선택된 여인이었다. 그러나 엄마의 인생은 고통스러우셨다. 사회적인 직업이나. 학벌 그리고 가문, 재산 등이 엄마의 진정한 행복을 보장해 줄 수는 없었다.

나의 엄마에게는 세상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때로는 갖기를 원하는 그러한 조건들이 풀잎 끝에 맺힌 이슬방울처럼 덧없는 것이기도 하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은 어떤 역경일지라도 견딜 수 있는 경험과 지혜가 있기 때문에 좀처럼 모든 것을 쉽사리 포기하지는 않는다.

온실에서 자랐고,  맑디 맑은 꿈을 지닌 엄마는 남을 도우시길 즐겨 하셨을 뿐, 정작 엄마에게 감당하실 수 없는 운명이 다가오자 방황하시기 시작하셨다.

 

엄마와 나는 비슷한 시기에 누구의 권유에 의해서도 아니고 하느님을 의지하게 되었다.

엄마는 오랜 세월을 하느님께 기도하며, 예수님 오실 날 만을 기다리시며 사셨다.

 

그리고 심장마비로 돌아 가시기전 얼마 전, 국제전화로  엄마가 내게 남기신 마지막 말씀이 있다. "얘야!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겠니? 하느님 믿고 살아야 한다, 응, 오직 하느님 의지하고 살아라 알았지!"

엄마의 그 말씀이 유언이 될 줄이야, 엄마나 나 두사람 중  누군들 알 수 없었다.

 

내가 되풀이하여 엄마의 얘기를 들려드리는 이유는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평가하면 엄마는 실패한 인생을 사셨다.

엄마의 학벌과 미모와 인품으로 보면 세인(世人)들은 분명히 외롭고 불행한 삶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가 자식에게 남긴 유산 즉, 내게 주신 사랑과 작고 소중한 추억들, 그리고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살라고, 나에게 당부하셨던 어머님!

그 말씀은 이승에서 아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먼 하늘가에 흰구름만 밀려와도 혹여 예수님 오시나 기다리셨던 어머님은 세상사람들 보다 행복한 삶을 사셨다고 확신한다.

그 가엾은 어머님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하늘나라로  받아주셨을 것이라고 믿는다.

엄마가 내게 유언은 하시지 않았지만, 나는 엄마가 남긴 아파트와 재산 대신 오직 어머님의 손 떼가 덕지덕지 묻었던 성경책과 엄마의 사진만을 내 가슴에 품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느님! 제가 지금 이 순간에도 엄마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듯이,훗날 저의 자식들도 제 아내와 저를 그리워하고,사랑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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