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KBS 인물현대사 / 어머니의 힘, 이소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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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선 [inuit-] 쪽지 캡슐

2011-12-05 ㅣ No.1524

 

 

 

 

 

 

 
 
 
 
 
 

 

 
 
" 난 항상 이런 생각을 했거든.
70년대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노동자들이 정말 투쟁하고 애쓰고 고생 많이 하면서
자기 인권과 권리를 찾으려고 많은 희생도 하고 고통도 많이 받았지.
빨리 노동자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그런 정치나 현실이 너무 기다려지는데 참 안되고 있구나.
그래서 텔레비전이나 신문보고 마음이 안타까워서
참 말로 할 수 없이 가슴아플 때도 많았어요.

 
정말 단결만 하면 노동부장관 보다 노동자가 더 힘이 있는데.
그 힘은 뭔가 하면 단결하는 거.
천만 노동자가 단결이 되면 안될 것이 뭐가 있겠나.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눈물 훔치고 살다보면 언젠가 그런 날이 오지 않겠나.
이제 한걸음씩 나가고 있으니까 빛이 보인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고.
하나가 되면 못하는 게 하나도 없어.

 
노동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그날이 하루속히 올 것을 나는 믿고 있어.
하다보면 온다고, 된다고.
그런데 너무 오래가지 말고.

 
집도 노동자가 짓고 길도 노동자가 만들고 비행기도 노동자가 만들고
옷도 노동자가 만들고 신발도 노동자가 만들고…
이 세상 인간들이 사는 것은 다 노동자 손을 통해서 되는 건데.
그런데 생산해서 이 나라를 움직이고 경제를 살리는 노동자들을 외면하고 있잖아.
경제를 움직이는 게 누군데 구조조정이니 뭐니 해서 노동자들이 피해를 봐야하냐고.
정치가 그런 식으로 하면 정말 안 된다고.
약자를 밟아서 그렇게 하는 것은 원칙이 아니라고.
어쨌든 단결해서 한발한발 나아가 노동자가 권리를 찾고
정치를 할 수 있는 그 대열에 하루속히 서줬으면 하는 게
이소선이, 전태일 엄마 소원이야.

 
내가 평생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는 노동자들이여, 단결해다오.
노동자가 하나 돼서 권리 찾는 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이소선이 바라고 있어.
내가 그런 세상 한번 보고 죽을라고 32년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노동자여 부탁이니 하나가 되길 바랍니다. "
 
 
 

 

 
이소선의 당부
/ 오도엽 시인
 
 
7월 18일, 무더위가 한창이던 날 저녁이었다.
이소선의 심장이 갑자기 멈췄다.
이십분 남짓 지난 뒤 이소선의 심장은 다시 뛰었다.
하지만 이소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잠만 잤다.
몸을 웅크리고 새록새록 숨만 쉬었다.
가족들이 달려오고, 전태일의 친구들이 달려오고,
이소선을 어머니라 부르던 세상의 아들딸들이 달려왔건만 눈을 뜨지 않았다.
잠만 자는 이소선이 얄미워
중환자실 침대에서 자던 이소선의 손을 살짝 꼬집었건만
꿈질할 뿐 눈을 뜨지도 입을 열지도 않았다.
 

9월 3일 아침, 이소선의 혈압이 뚝 떨어졌다.
가족들이 달려오고, 양대 노총 위원장이 뛰어왔다.
이소선은 야속하게도 한마디 말도 없이 숨을 멈추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어서 일어나시라고.
희망의 버스를 타고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크레인에 매달려 있는 김진숙을 만나러 가자고.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 줄 어머니가 살아계셔야 한다고.

 
욕심이었다.
마흔한 살 때 아들 전태일이 불꽃이 되자
이소선은 마흔한 해 동안
자신의 삶이 아닌 전태일의 삶을 살아왔다.
날마다 아들을 만나러 갈 날만을 손가락으로 꼽으며 말이다.
밤이면 성경책을 머리맡에 두고 전태일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창문 너머에서 허연 동이 터오면 태일이와 헤어짐이 아쉬워 눈물을 흘렸다.

 
이소선은 아들과 만날 밤을 기약하며 다시 낮을 견뎌왔다.
아니 싸워왔다.
때론 독재와 맞서,
때론 노동자의 시신을 보듬고,
때론 백날 가까이 곡기를 끊으며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외치는 단식 농성장에서.
전태일의 어머니, 노동자의 어머니라는 이름을 달고
마흔한 해를 거리에서 살아왔다.
그런 이소선이 끔찍이 사랑하고 미치도록 보고 싶은 아들을 만나러 가겠다는데
자꾸 깨어나라 외치는 것은 살아남은 이들의 욕심이었다.
 
 
그래서 울지 않았다. “엄마, 이제 안녕!” 인사를 했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여전히 점심때가 되면 전화기를 매만진다.
점심 먹었냐, 끼니 거르지 마라, 챙겨주던 이소선의 목소리가
당장 전화기에 들려올 것 같으니 말이다.
밤길을 걷다보면, 술 좀 작작 마시라는 이소선의 잔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 자꾸 뒤를 돌아보니 말이다.
‘정리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적힌 하늘빛 옷을 입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를 만나도 이소선이 먼저 떠오르고,
재능교육 학습지 농성장 앞을 지나도
옆에 이소선이 있는 것 같은데, 어쩌란 말인가.
 
 
“노동자가 똘똘 뭉쳐 하나가 되어 싸우세요!”
 
 
이소선이 입에 달고 살던 말이다.
이 말이 가끔은 오해를 받기도 하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정파의 눈으로 보기고 하고 조직의 논리로 재단하기도 했다.
이 말과 행동 때문에 이소선이 빨갱이의 대모로 지칭되기도 했고,
싸움꾼으로만 여겨지기도 했다.

 
양대 노총 위원장이 함께 이소선의 영결식장에 나와 조사를 낭독하는 게
마치 이소선의 마지막 바람이었던 것처럼 알려지기도 했다.

 
이소선의 ‘똘똘 뭉쳐’는 양대 노총만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다.
10%도 되지 않는 조직률의 양대 노총이 합친다고
이소선의 ‘하나가 되세요’가 되는 게 아니다.
이소선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청계피복노동조합을 만들어 노동운동을 했지만
청계천에만 머물지 않았다.

 
노동자의 신음이 있는 곳,
노동자의 눈물이 있는 곳은 어디든 마다 않고 달려갔다.
이소선이 달려간 곳은 노동조합이 있는 곳만도 아니었다.
노동자만 찾아간 것도 아니었다.
 

청계피복노동조합이 만들어진 초기에 노동자의 권리보다는
자신의 욕심에 눈이 어두웠던 위원장이 있었다.
늘 노동자의 편에 서있는 이소선을 눈엣가시처럼 여겨
이소선을 노동조합에 못 나오게 했다.
그때 이소선은 떡 광주리를 이고 평화시장 앞 계단에 쭈그려 앉아 떡을 팔았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노동조합 활동은 하지 못하지만
어떻게든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시다와 미싱사를 만나고 싶어서였다.
어린 여공의 품을 한시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시락을 싸오지 못해 점심시간에 수돗물로 헛배를 채운 시다를 만나면 떡을 그냥 건넸다.
난 이곳에서 재단사로 일한 전태일의 엄마라며,
내 아들이 버스비로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쌍문동 집까지 세 시간을 걸어서 온 태일이의 엄마라며 떡을 건넸다.

 
이소선이 어머니로 불린 것은 전태일의 어머니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거창한 조직의 이름을 걸고,
또는 화려한 명함을 내밀며 노동자를 만나지 않았다.
노동자를 끔찍이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이 숱한 아들딸을 만들었고,
그들의 입에서 어머니라는 말이 스스럼없이 나오게 하였다.

 
자동차 오른쪽 바퀴를 다는 정규직 노동자가
같은 공장 같은 라인에서 왼쪽 바퀴를 다는 비정규직의 삶을 모른 척 하고서야
어찌 이소선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꽥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거리로 쫓겨나가는
숱한 저임금 노동자의 삶을 먼저 챙겨주지 못하고

어찌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함께 싸우겠다는 약속을
이소선의 영정 앞에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소선은 전태일을 열사도 투사도 아니라고 했다.
누구보다도 사람을 끔찍이 사랑할 줄 알았던 아들이었다고 한다.
전태일을 열사라 부르지 말고 그냥 동지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내 곁에 있는 벗으로 여겨달라고 소망했다.
 

노동운동의 위기를 말한다.
위기는 개악된 노동법 이전에,
노조 전임자 임금을 제한하는 타임오프나
교섭을 제한하는 복수노조 이전에,
어용이나 실리주의 조합주의 이전에,
신자유주의 자본의 탄압에 앞서,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진 채
노동해방을 외치는 입 때문에,
내 밥통의 크기만을 생각하는 심보 때문에,
이웃을 둘러보지 못하는 눈 때문에 닥친 것은 아닐까,
이소선의 영정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참 맑은 날, 이소선은 전태일을 만나러 갔다.
작은 선녀 이소선은 어머니의 너른 품이 무엇인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깨우쳐주었다.
이소선의 영정 앞에 바쳐진 그 국화가 시들기 전에,
이소선의 무덤가에서 흘린 눈물이 마르기 전에
이소선이 남긴 외침의 본뜻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봐야겠다.

 
“노동자가 똘똘 뭉쳐 하나가 되어 싸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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