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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10편 (사울왕의 죽음이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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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20-01-16 ㅣ No.135365

영화 아마데우스의 스토리입니다. 인터넷에서 스크랩해온 글입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1823년 눈보라치는 밤,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정신병원에 수감된 한 노인이 그를 찾아온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고해한다. 그는 요제프 2세의 궁정 음악장인 살리에리.

 

신부가 찾아갔을 때 살리에리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신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자신이 작곡한 곡들을 들려준다. 하지만 신부는 그 곡들의 작곡자는커녕 곡 자체도 몰랐고, 살리에리는 마지막으로 한 곡을 연주한다.

 

잠깐만 쳤는데도 신부는 흥분해서 멜로디를 입으로 부르며 단박에 알아맞추고, "제가 무척 좋아하는 곡인데, 선생님이 이 곡을 작곡하셨는지는 미처 몰랐습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곡은 살리에리가 아닌 모차르트의 곡이었고,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그야 내가 작곡한 것이 아니니까요"라고 말한다.

 

살리에리는 이탈리아 상인의 아들로 어릴때부터 아름다운 음악의 세계에 매료됐었다. 자기보다 더 어린 모차르트의 소문을 듣고 그가 부러웠고 음악을 배우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음악을 배우지 못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오스트리아로 유학 할 수 있었고 그야말로 각고의 노력으로 교회 지휘자 자리를 거쳐 궁정악장의 자리까지 올랐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모차르트의 공연을 보고 그의 천재성에 감탄한다.

 

살리에리가 미리 짜여 있는 형식을 준수하고 음악에 관한 주제도 하느님을 찬양하는 전통적인 교회 중심의 대세에 따르는 음악가였다면, 모차르트는 신들린 연주력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편곡 능력, 그리고 시대의 감성을 뛰어넘는 작곡 실력까지 갖춘 천재적 음악가였다.

 

하루하루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불굴의 의지로 자신을 채찍질 하는 수도자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살리에리에게, 모차르트란 존재는 경이롭고도 부러운 존재로 다가온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음악적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일상 생활은 폐인에 가까울 만큼 방탕한 삶의 연속이었다. 버는 돈이 적은 편이 아니지만 버는 족족 결혼한 아내에게 선물 사주랴, 최신 유행에 맞추어 옷 사랴, 밤마다 화려한 파티를 벌이랴 모두 탕진해버렸다. 게다가 워낙 기분파라서 한번 시작한 파티는 모두에게 꼭 쏴야직성이 풀리는 그였다.

 

그렇게 방탕한 생활을 함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가 만들어내는 작품들은 세간의 관심을 끌고 유명인사가 된 모차르트의 명성은 살리에리가 궁정음악가로 있는 오스트리아 황제에게까지 소문이 들어간다.

 

그는 황제에게 국립극장에서 상영 할 오페라를 지어달라는 발주를 받아 작곡한 <후궁으로부터의 도피>를 독일어로 선보이는가 하면 오페라를 늘어지게 한다는 이유로 황제가 금지한 발레를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삽입하는 등, 이탈리아인들이 많았던 음악계의 높으신 분들의 미움을 살 짓만 골라서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황제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발레 금지령도 모차르트의 작품을 보고 철폐하였다.

 

음악을 너무도 사랑하지만 재능에 한계를 느낀 살리에리는 그러한 모차르트를 가까이 혹은 멀리서 지켜보며, 하나하나 작품이 나올 때마다 그의 작품에 대하여 경배를 하면서도, 그러한 위대한 작품들이 모차르트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을 저주한다.

 

게다가 평소 살리에리가 사모하던 오페라 배우가 모차르트에게 마음을 돌리자, 살리에리는 이제 모차르트에게 재능을 부여한 하느님마저 저주하기에 이른다.

 

마침 모차르트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사망 소식에 생기를 잃고, 거기에 폐렴과 각종 합병증으로 병자의 신세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을 살 돈이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을 즈음, 살리에리는 시종을 시켜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가면파티에서 입었던 가면으로 분장을 하고 나타나 장송곡을 지어달라고 의뢰합니다. (인터넷에서 스크랩)

 

이 영화는 실제와는 다른 픽션입니다. 물론 픽션을 그리기는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서 우리 인간의 심리를 잘 묘사한 부분을 가지고 신앙에 접목해보면 많은 유익을 가져올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 저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시기, 질투가 증오로 이어지고 그 증오가 마침내는 얼마나 자신에게 사무쳤으면 하느님까지 저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걸 보면서 우리는 단순히 인간이 가지는 시기, 질투를 그냥 보편적이고 당연한 감정이라고 단정 짓는 걸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다가 이게 자칫 자신의 영혼이 병들어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 영화에서 나오는 살리에리가 성경에 나오는 사울왕과 너무나도 흡사합니다. 아니 어쩌면 이보다 더 잔인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울과 다윗간에 이런 피 티기는 심리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건 단순히 인간 군상의 이야기를 알려주려고 하는 게 아닐 것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뭔가를 배워야 할 겁니다. 사무엘상권 제일 마지막 31장은 사울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11절부터 잠시 보겠습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이 이스라엘에 싸움을 걸어왔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필리스티아인들 앞에서 도망치다가, 길보아 산에서 살해되어 쓰러졌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사울과 그의 아들들에게 바짝 따라붙어, 사울의 아들들인 요나탄과 아비나답과 말키수아를 쳐죽였다.

 

사울 가까이에서 싸움이 격렬해졌다. 그러다가 적의 궁수들이 사울을 발견하였다. 사울은 그 궁수들에게 큰 부상을 입었다. 사울이 자기 무기병에게 명령하였다. “칼을 뽑아 나를 찔러라.

 

그러지 않으면 할례 받지 않은 저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희롱할 것이다. ” 그러나 무기병은 너무 두려워서 찌르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울은 자기 칼을 세우고 그 위에 엎어졌다.

 

이젠 다윗을 그토록 죽이려고 했던 사울왕이 죽게 되어 다윗에게는 한시름 들었습니다. 사울왕의 죽음을 보면서 하나 생각해볼 게 있습니다.

 

물론 다윗을 증오한 댓가로써 사울이 죽음을 맞이했다고는 볼 수가 없지만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종국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마음속에는 다윗을 향한 분노와 증오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자세히 서술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울왕이 살리에리처럼 영혼이 병드는 건 똑같은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인간의 여러 감정 중에 미움이라는 감정이 단순하게 있을 땐 모르는데 확대 재생산되면 겉잡을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젠 초점을 다윗으로 옮겨서 한번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사울과 같은 동등한 입장에서 본다면 다윗도 역시 자기가 미움을 살만한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왕의 개인감정으로 인해 자신의 생명까지 위태로운 상황으로 내몰리는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인간적으로 보면 증오를 하게 되면 다윗이 더 심한 증오를 사울왕을 향해 했어야 되는 게 인간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당연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사울왕의 증오를 증오로 맞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게 원래 다윗 속에 훌륭한 인품으로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마음에는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겠지만 이런 모든 일련의 일을 하느님의 손에 맡긴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는 다윗이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자신이 평소 가진 소신과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믿음이 남달랐다는 게 하나의 원인이 될 겁니다. 바로 기름부음을 입은 자는 해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도 쫓기는 신세가 되는 그런 상황에서도 사울의 친척인 시므이가 다윗을 향해 욕설과 저주를 해도 다윗은 어떤 감정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시므이는 유다 지파의 다윗이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 때문에 자신의 심기가 불편했을 겁니다.

 

베냐민 출신의 사울왕이 왕으로 있게 된다면 뭔가 콩고물이라도 떨어질 게 있다는 식으로 자기에게 이익이 될 수 있을 건데 다윗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고 생각하니 당연히 그에 대한 감정이 다윗을 향한 폭언이었을 겁니다.

 

다윗은 이때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아비사이에게 그냥 놔두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하나 살펴볼 게 또 하나 있습니다. 다윗이 한 말을 통해 이때 다윗이 왜 그런 태도를 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므이가 자신을 향해 한 행동에는 하느님의 뜻이 숨어 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식도 지금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데 남이 자신을 향해 저주를 하는 이유도 있다고 말을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개신교에 있는 유명한 성경 연구가인 아더 핑크가 한 해석이 좀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해석을 했습니다.

 

시므이의 저주 같은 폭언이 바로 자신의 충신이였던 우리아의 죽음에 대해 하느님께서 이를 통해 자신을 징벌하는 거라고 여겼기 때문에 다윗이 그만 아무런 감정 없이 자신에게 닥친 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시므이가 한 말은 실제 사실이 아니고 거짓이었지만, 우리아의 죽음이 자신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 반성을 하게 만든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때 이와 더불어 자신이 그동안 무수한 잘못을 한 걸 회개하는 시간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다윗이 이런 회개를 하고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시므이만을 바라봤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시므이를 바라봤기에 그게 어쩌면 인간 시므이의 말이었지만 하느님의 음성이 간접적으로 전해져온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 수 있을 겁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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