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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안식일의 주인 (루카 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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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9-09-07 ㅣ No.132353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안식일의 주인 (루카 6,1-5)


바오로 사도는,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콜로1,21-23)
형제 여러분, 21 여러분은 한때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과 원수로 지냈습니다.
22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23 다만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었고, 나 바오로는 그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화답송 시편 54(53),3-4.6과 8(◎ 6ㄱ)
◎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다.
○ 하느님, 당신 이름으로 저를 구하시고, 당신 권능으로 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 하느님, 제 기도를 들으시고, 제 입이 아뢰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소서. ◎
○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저는 기꺼이 당신께 제물을 바치리이다. 주님, 좋으신 당신 이름 찬송하리이다. ◎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비난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 (루카 6,1-5)
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2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5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제1독서 (콜로1,21-23)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없고 나무랄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22)

 

'당신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로 번역된 '엔 토 소마티 테스 사르코스 아우투 디아 투 타나투'(en to somati tes sarkos autu dia tu thanatu; in the body of his flesh through death)는 번역하면 '그의 살의 몸 안에서 죽음을 통하여' 가 된다.

 

보통 '육체'를 표현할 때 '소마'(soma) 혹은 '사륵스'(sarx)한 단어만으로도 표현 가능하고, 그런 표현이 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오로는 여기서 굳이 두 단어를 다 쓰고 있다.

 

이러한 중첩적 표현으로 사용한 이유는, 초대 교회 때부터 유포되고 있었던 그리스도가 육체가 아닌 영이라는 주장과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죽음을 겪지 않고 다만 죽은 것처럼 보였다는 가현설(Decetism)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 역시 그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예수님께서 육체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목마르다'(요한19,28)라는 십자가상의 말씀을 기록하였고, 육체의 죽임을 당하지 않고 단지 고난당하고 죽은 것처럼 보였다는 가현설에 반박하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숨이 끊어진 예수님의 옆구리를 군사 하나가 창으로 찔렀고, 그때 '피와 물이 나왔다'는 사실을 기록하였던 것이다(요한19,34).

 

이러한 그리스도의 육체의 수난과 죽음은 우연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것이었으며, 이것은 무려 700여년 전 이사야 예언자의 구체적인 예언을 통해 이미 예고된 사건이었다(이사53,1-5).

 

'거룩하고 흠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본문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독생 성자를 피흘려 죽게 하신 목적 무엇인지 보여준다.

하느님께서는 성도들과 당신과의 화해만을 원한 것이 아니다. 화해한 성도들이 영적 성숙을 통해 점점 성화되어 하느님 대전에 어떠한 부끄럼도 없는 완전한 존재로 서기를 원하신다.

 

첫째, '거룩하고'로 번역된 '하기우스'(hagius)의 원형은 '하기오스'(hagios)이다. 이 단어는 '봉헌된', '하느님께 성별된'이라는 뜻으로  하느님께 바쳐지는 거룩한 산 제물을 뜻한다(로마12,1.2).

하느님의 어린양의 보배로운 구속 성혈로 말미암아 모든 죄에서 깨끗해진 성도들은 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하느님의 어린양을 위해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함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둘째, '흠없고'로 번역된 '아모무스'(amomus)의 원형은 '아모모스'(amomos)이다. 이 단어는 부정 접두어 '아'(a)'흠이 있는'이라는 뜻의 '모모스'(momos)의 합성어로서 일점의 티도 없는 깨끗한 상태를 뜻한다.

마치 방금 세탁한 흰 옷과 같이 조금도 더러움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묵시7,14). 특히 이 단어는 유다인들의 정결 의식 묘사할 때에 주로 사용되는 단어로서 하느님께 바쳐지는 일체의 흠이 없는 최고의 제물을 뜻한다.

 

셋째,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번역된 '아넹클레투스'(anengklletus)의 원형은 '아넹클레토스'(anengklletos)이다.

이 단어는 부정 접두어 '아'(a)'책임지우다', '결점을 찾아내다'라는 뜻의 '엥칼레오'(engkalle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어떤 일에 대하여 결점이나 비난, 문책같은 것이 없는 상태로서, 특히 비난받을 만한 죄가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단어는 '흠없고'라는 단어보다 그 의미가 몇 배나 강한 단어로서  단순히 흠이 없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책망할 것이 없는 온전한 제물을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서목 서간에서 이 단어를 사용해 봉사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인 원로와 감독 등이 이러한 상태에 이르러야 하며(1티모3,10; 티토1,6.7)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종말의 심판 때에 이러한 상태가 될 것이라고(1코린1,8) 말 한 적이 있다.

위의 세 개의 형용사는 결국 성도들이 하느님 대전에 가서 서게 되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밟아나갈 성화(聖化)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런 단어들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그리스도와 같이 변하게 될 성도들의 영광스런 모습(로마8,29.30; 에페4,13)이 성도들을 부르신 하느님의 목표이며 십자가 죽음의 목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을 통해 독생 성자를 십자가에 넘기시고 그들을 양자로 삼으셨지만,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된 이후에는 거룩하고 흠없고 나무랄 데 없는 모습으로 성장해 가기를 원하시며,  완전히 성화된 사람을 천국으로 맞아들이실 것이다.

 

한편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로 번역된 '파라스테사이'(parastesai; to present)'옆에'라는 전치사 '파라'(para)와 '두다'라는 뜻의 동사 '히스테미'(histemi)의 합성어로서 '곁에 두다', '가까이에 두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느님 가까이에 성도를 둔다는 의미인데, 일차적으로는 마지막 종말 심판 때에 성도들이 부끄럼과 두려움 없이 하느님 대전에 서게 될 것이라는 미래적 의미를 갖고 있다.

또한 이차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의 매일의 삶, 일상의 삶이 하느님께서 받으실 만한 영적 예배의 산 제사로 봉헌되어야 한다는 현재적 의미가 있다(로마12,1).

 

성도들은 마지막 날 주님 심판 대전에 온전한 모습으로 서기 위해 날마다의 삶 속에서 하느님 대전에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부단히 봉헌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은 매 순간 그리스도 가까이에 자신의 삶을 두는 거룩한 하느님 대전의 삶, 즉 '코람 데오'(Coram Deo)의 삶을 살아야 한다.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복음(루카6,1~5)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5)

 

루카 복음사가마르코 복음 2장 27절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략하고 있다.

또한 마태오 복음에서 장황하게 기록된 안식일에 대한 해설 부분인 마태오 복음 12장 1~8절도 생략했다.

 

이것은 루카 복음사가에 있어서 안식일 규정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지 않았던 이방인 독자들에게 안식일 규정을 깊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생략하고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인 것만을 나타내어도 제자들의 행위가 충분히 변호되기 때문이다.

 

본절과 관련지어 연상되는 레위기 23장 3절에 의하면, 안식일은 주 하느님께 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안식일의 소유권을 메시야인 자신에게 귀속시키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의 권한을 월권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 즉 '인자'(人子)가 곧 안식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암시한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잘못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무의미한 형식적 규정으로 무거운 짐을 지운 바리사이들에게 올바른 권위로 책망하실 수 있는 것이다.

 

원문을 보면, '인자'에 해당하는 '호 휘오스 투 안트로푸'(ho hyos tu anthropu; the Son of Man) 앞에 '안식일'이란 뜻을 가진 '투 삽바투'(tu sabbatu; of the sabbath)먼저 기록하고 있다.

희랍어에서는 언제나 강조하고자 하는 단어를 문두에 두는 경향이 있다.

루카 복음사가도 본문에서 쟁점이 바로 '안식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인자'보다 앞에 둔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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