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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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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영 [hufsanr] 쪽지 캡슐

2002-03-09 ㅣ No.1344

신약에 묘사된 마리아는

 

 

세사르 비달 지음/ 조원일 옮김

 

저자소개

 

세사르 비달(Ce’sar Vidal)은 미 동양연구 협회(ASOR), 그리고 시카고 동양학회와 같은 각종 연구기관의 회원이자, 현재 스페인 국립교육대학(Universiade National de Education a Distancia)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주후 팔레스타인의 유태 신앙 100년사"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최고의 학위 점수를 받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법 신학"에서도 학사학위를 취득했으며, 고대 동양과 종교사에 관한 연구가 그의 전공이다. 그는 약 30여 권의 책을 출간했으며, “어느 여호와 증인의 회고록"(1987), “영지주의적 복음"(1991), “뉴에이지의 정체"(1992), 일신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관한 사전(1992), “최초의 복음서 : Q문서" (1993), “사해사본"(1993), “또 다른 낙원 : 유명 교파들의 실체"(1994) 등 여러 편이 있다.

 

서문

 

마리아는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인가? 파티마(Fatima), 로데스(Lourdes), 그리고 가라반달(Garabandal)등, 소위 성지라는 곳에 구름처럼 몰려드는 순례자들과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마리아의 조각상을 한 번 보십시오. 지금 사람들은 정말 마리아를 창조된 신화적인 인물로 믿으려 들고 있습니다.

 

근래의 교황들(특히, 요한 바오로 2세)은 마리아를 숭배하는 일에 역점을 두어 왔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의 통합은 "마리아를 통해"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있고, 그것도 한 점의 의심 없이 말입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수많은 사람들의 열망을 입증이라도 하듯, 세계 도처에는 일련의 마리아의 출현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그녀를 일쓻는 말들이 하나 둘이 아닌지라, 오히려 부족할 지경입니다. "하늘의 여왕"이니 "성모"라느니 혹은 "순결한 동정녀," "우리의 어머니," "함께하는 여성중개자" 그리고 "순교자의 어머니" 등으로 불려지고 있으니까요. 그녀의 권능은 하나님에게 조차 부족하다고 여기는 그러한 온유한 자비로 이 세상에서 내세에까지 이른다고 굳게 믿고있는 사람들도 한 둘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숱한 사람들이 사랑의 무릎이라는 곳을 향하고 있음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죠.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의 이런 헌신을 지지할 만한 성경적인 근거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헌신이 과연 현실에 근거를 둔 것인지, 아니면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잡다한 종교의식에 근거한 것인지 궁금하기 그지없습니다. 여러 해 동안, 필자는 역사 연구, 특히 고대 동양과 종교사 연구에 몰두해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문헌들과 유적들을 연구하고, 이교도 신화들을 면밀히 검토하며 연계시켜보는 일로 하루 일과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책은 필자가 내린 결론들에 대한 요약서로, 카톨릭과 동방 교회들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마리아 숭배 현상에 대해 수 년간의 엄밀한 과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이같은 결론들을 내기위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본 단계를 밟아 왔습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역사적인 자료를 모두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필자는 논리의 출발점을 신약으로 잡았는데, 신약이 마리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유일하게 기록된 자료임을 보여주고 있고, 그녀에 대해 그다지 많은 부분이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모습을 재현하는 데는 기록상의 시기로나 신뢰성의 가치에 있어서 충분하다는 점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 다음 당시의 기록자들을 검토했으며,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고고학적 자료들에도 관심의 초점을 맞췄습니다. 최종적으로 카톨릭교회의 안팎을 가리지 않고 마리아 숭배와 관련된 문서라면 공식적이던 비공식적이든간에 철저히 연구를 했습니다.

 

두 번째 단계로, 역사 연구에 주로 이용되는 과학적인 방법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읽고, 비교하고, 상호관계를 분석해서 찾아내는 일이 일반 성도들에게는 지루하게 보일런지 모르지만, 이런 일들이 대개는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있어서는 양념처럼 없어서는 안될 것들입니다. 더군다나, 이같은 경우는 이런 유형의 일에 유별나게 딱 들어 맞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책 출간을 위해 기초적인 역사 연구내용을 알맞게 편집하는 단계입니다. 분명코 많은 독자들이 알게 되겠지만, 차후 지면에서 언급될 내용들이 단순히 역사상 일어난 사건에 대한 설명에 머물지 않고, 독자들이 판단하게끔 지극히 개인의 판단 영역을 파고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은, 서로 다른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입장에서 사실을 밝히고자 할 때, 이 문제를 속시원히 해결해 줄 하나의 요소는 바로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마치 거울처럼, 빈틈없는 역사 연구를 통해 우리는 지금껏 신뢰를 두고 있던 것이 사실로 믿을 만한 것인지, 아니면 세대를 거쳐 전해온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한 것인지를 확인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많은 독자들에게 빛을 제공해 주리라 믿습니다.

 

끝으로, 제목에 대해 꼭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필자가 붙인 제목은 누구를 비방할 의도가 아니라, 단지 마리아에 대한 믿음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어왔는지 그 현실을 나타내고자 했을 뿐입니다.

 

고대의 신화들은 세월을 거치면서 주로 다른 신화들로부터 몇가지를 흡수하기도 하고, 다른 신화적인 인물과 하나가 됨으로써 믿음의 체계를 형성했습니다. 그런 신화들의 역사가 비록 모호할 수도 있지만. 그 중심에는 거부할 수 없는 영적인 힘의 존재가 있음을 경고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마리아의 경우에 있어서 필자는 진심으로 이것을 사실로 믿고 있는데, 그녀가 신약성경에 등장해서가 아니라, 카톨릭과 동방 교회들에 의해서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각 장들은 자연스럽게 이 주장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구성되었습니다. 필자의 주장이 옳은지 아닌지는 독자 여러분의 결정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제 1 장 신약에 묘사된 마리아는

 

마리아가 역사적으로 실존했음을 재현할 만한 자료가 우리에게 한정되어 있다.

 

일단, 첫 번째 자료로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가뭄에 콩나듯이 있는 몇 구절이 있긴 하다. 반면에 다른 자료들은 이 기록들에 견줄만한 것이 안되는 것이 사실이다. 두 번째는 마리아와 연관이 있을 법한 몇 점의 고고학 유물들이 있긴 한데, 의심의 여지가 최소한 있다. 마지막으로, 역사적인 가치는 없지만 중세의 것으로 추정되는 작자미상의 글들인데, 제2장에서 다룰 것이다. 본 장에서는 마리아에 관해 가장 신빙성있는 자료들만을 언급할 것인데, 바로 신약의 앞 부분에 해당하는 사복음서다. 역사적인 자료로서 사복음서의 상세한 분석을 위해 여기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 사복음서(요한복음 포함)가 A.D. 70년 전에 기록되었다는 것과 당시의 팔레스타인에 관한 믿을 만한 설명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것이다.

 

공생애 이전에 등장하는 마리아

 

복음서에서 마리아는 통상 예수님과 연관되어 간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녀 자신만 놓고보면 별 중요한 의미는 갖지 못하고, 자신의 아들의 생애에서 특별한 순간들을 명확히 나타내기 위해서 단순히 언급되고 있다.

 

그녀를 다루고 있는 최초의 사건은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마 1:16, 눅 1:31)에 관한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마리아가 "다윗의 가문에 요셉이라고 하는 남자와 정혼한 한 처녀"(눅 1:27)였으며, "나사렛이라고 하는 갈릴리의 한 마을"(눅 1:26)에 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마리아의 집안 중 일부는 제사장 계열이었음이 추정 가능한데, 사촌인 엘리사벳이 아비아 계열의 한 제사장과 혼인했고, 그녀 자신은 아론의 딸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눅 1:5).

 

유대인의 혼인은 두 단계의 과정을 밟는 것이 특징이다. Erusim 또는 Kidushim이라 불리는 첫 번째 단계에서, 두 사람은 여러 증인들 앞에서 정식으로 약혼식을 올리지만, 함께 사는 것은 아니다. 이 기간 중에 동침하는 경우가 생기긴 하나, 결혼이 아직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빈축을 사게 된다. 만일 약혼자외의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었다면 음란한 것으로 간주되어 마땅히 돌로 쳐 죽임을 당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아무일 없이 약혼한 지 일 년이 지나면, 둘은 Nisuim 또는 Khupah로 알려진 최종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끝나면 둘은 함께 살면서 침실에 들 수 있다. 이렇게 두 단계를 거치는 결혼 의식은 중세가 지나서야 비로소 하나로 통합되었다.

 

마태와 누가는 마리아의 임신(눅 1:26-38)이 첫 번째 결혼 의식을 했지만 두 번째 의식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녀와 동침한 적이 없었던 요셉은 즉시 이것이 간음에 해당함을 알고, 은밀히 그녀를 단절하려고 작정했다. 어쩌면 그녀가 돌에 맞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마 1:18-19).

 

마리아의 태에서 잉태된 아이는 불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된 열매임을 천사가 꿈에 나타나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던들, 분명히 요셉은 마음 먹은대로 행했을 것이다(마 1:20). 뿐만 아니라, 그 천사는 요셉에게 그 아이가 행해야 할 일은 "자기 백성을 죄들에서 구원"(마 1:21)하는 것이며, 이사야 7:14에서 말씀하는 메시야가 한 처녀에게서 잉태하리라(마 1:22-23)는 예언이 이루는 것임을 알려 주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삼기로 했지만(마 1:24), "그녀가 첫 아들을 낳기까지"(마 1:25)는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셋째 복음서인 누가복음에 마리아가 겪은 일들이 기술되어 있다. 그 설명에 의하면, 남자와 관계를 갖지 않고서도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눅 1:34-38),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만나러 유다를 향했다.(눅 1:39-40). 그들이 서로 만나자, 엘리사벳의 태속에 있는 아이는 뛰었고, 이로써 사촌인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하나님께 받고 있는 선물에 관해 즉, 메시야를 잉태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마리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가 가장 포괄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엘리사벳의 말에 대해 그녀가 보여준 반응을 통해서이다. 성모의 노래로 알려진 몇 구절들(눅 1:46-55)에 대한 연구는 우리의 조사 범주를 약간 벗어나긴 하지만, 그 구절들은 마리아가 했던 성경적인 예언에 대한 윤곽을 제시하기 때문에, 그 속에 나타난 기본 계획을 분석하는 것도 적절하리라 본다.

 

눅 1:46-47 ; 마리아는 하나님을 드높이며, 구주라 부르는 유일하신 그분 안에서 기뻐하고 있다.

 

눅 1:48-49 ; 하나님의 행하심은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며, 이는 그분께서 자기 여종의 낮은 지위를 살펴보시어 위대한 일을 행하시고 그 일들을 통해 장차 모든 이들이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모친이 된 것에 대해 복받은 사람이라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눅 1:50-55 ;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하는데, 주의 자비가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영원하며, 주님은 현존하는 질서를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으로 계속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메시야에 관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유다에 도착하여 석 달 동안 사촌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요셉이 그녀를 받아들인 것이 바로 이 무렵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눅 1:56). 그 후 몇 개월 간의 마리아와 남편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하지만 아이의 출산이 가까워지자 두 사람은 조세 등록을 위해 베들레헴으로 옮겨야만 했다(눅 2:1-5). 조세등록이 헤롯이 죽기 전에 일어났다는 사실로 예수님께서 B.C. 6년에 태어나셨음을 시사하지만, 더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태어날 당시의 상황은 여관에 방이 없었으므로 베들레헴에 있는 구유에서 태어나셨으며(눅 2:7), 같은 날 목자들이 구유에 누워있는 주께 다가가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렸다(눅 2:8-20)고 하는 좀더 상세한 구절들로 설정이 가능하다.

 

팔일이 되어 아기에게 할례가 행해지고 그 이름을 예수라 불렀다(눅 2:21). 정결례를 위한 날들이 지나, 주께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그를 데려왔다. 그 가족들은 가난한 자들이 관례에 따라 드리던 제물을 바쳤다. 즉, 산 비둘기 한 쌍과 어린 집 비둘기 두 마리(눅 2:22-24, 레 12:6-8)가 전부였다. 거기서 마리아는 시므온과 안나가 그 아이에 대해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메시야임을 선포하는 것을 보았다(눅 2:25-38). 모세의 율법에 따라 행한 후에, 그녀는 요셉과 함께 어린 예수를 데리고 나사렛으로 돌아갔다(눅 2:39).

 

마태복음은 이 무렵 예수께 드려지는 동방박사의 경배(마 2:1-12)와 무죄한 아이들의 학살(마 2:13-18)을 함께 설명하고 있다. 꿈속에서 한 천사가 나타나 요셉에게 이집트로 달아날 것을 경고한 덕분에 그 아이는 대학살에서 피하게 된다. 또 다른 꿈을 통해 요셉은 헤롯이 죽은 뒤에 이스라엘로 돌아가려는 결심을 하게 되고(마 2:19-21), 유다가 아닌 갈릴리로 향할 마음을 먹게 되었던 것이다(마 2:22).

 

일단 나사렛에 정착한 요셉의 가족들은 평온한 생활을 누린 것 같고, 그런 분위기에서 『아기가 자라매 영 안에서 강건해지고, 지혜로 충만하며, 또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눅 2:40). 예수님께서 사역하시기에 앞서, 이 기간 중에 예수님에 대해 아는 내용이라고는 누가복음 2:41-52에서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 것처럼 어린 예수님께서 성전에 홀로 머물게 된 사건이 전부라는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에서 그 사건이 중요한데, 특히 선한 의도였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릇된 어머니의 태도를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대면하셨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다.

 

마리아가 “아들아,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걱정하며 너를 찾았다”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나의 아버지의 일을 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셨다.(2:48-49). 마리아와 요셉 어느 누구도 그 대답의 심중을 이해하지 못했다. 누가는 “그러나 그들은 주께서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눅 2:50)고 기록하고 있다. 목자들처럼(눅 2:19) 마리아는 그 말씀들을 간직하고 마음속으로 묵상하였다(눅 2:51). 이 구절들이 비록 짧긴하나, 마리아에 관해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그녀는 유대인이며, 요셉과 정혼했으나 동침하지는 않았을 때 성령의 능력으로 메시야를 잉태하게 되었다. 그녀의 영적인 소망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분의 약속들을 지키셔서 메시야를 보낼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소망,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에 신실하시며 기적들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에 마리아는 기뻐했다. 그 첫째 이유는 그분이 자신의 구원자이기 때문인데, 이것은 그녀가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메시야를 잉태할 어머니로 누군가를 정하려 했을때, 하나님께서 그녀를 주목하셨기 때문이다. 그녀의 무조건적인 순종을 포함한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불완전한 인간에 불과했다. 마리아는 목자들이 그녀의 첫 아들을 보러온 이유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성전에서 그를 찾았을 당시에 예수님께서 그녀와 요셉에게 던진 대답을 더더욱 이해하지 못했다.

 

공생애에 등장하는 마리아

 

예수님의 공생애를 언급하고 있는 구절들을 통해, 마리아의 다음과 같은 특징에 대해 보다 선명하게 본다. 하나님께 신실하나 불완전한 존재이며, 아들의 사역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여인.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간 중에 카나의 혼인식과 연관되어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다(요 2:1-11). 여러분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 함께 혼인식(요 2:1)에 초대되어 등장하는 마리아를 보게된다(요 2:2). 술이 바닥나버린 사실로 마리아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결국 그 문제를 예수님께 알렸다(요 2:3).

 

존 크리소스톰과 같은 몇몇 교부들은 마리아가 남보다 뛰어나려는 욕망에 이끌렸다고 주장하지만, 분명히 마리아의 의도는 선했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님의 사역이 어떻게 전개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했던 대답은 더 이상 명확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여인이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 2:4).

 

예수님께서 어머니의 “중재요구"를 거부하고 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리아를 “여인”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녀가 그분을 낳았다는 이유로 가질 특권은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요구는 합당치 않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카톨릭 역본인 예루살렘 성경에는 예수님의 대답에 대해 “개입을 거부하는 유대인적 기질”이라는 주석을 달고 있다. 마리아는 그의 반응을 이해했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주장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간에 하인들이 그대로 행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사역에 방해를 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였던 바로 그순간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바로 거절하셨지만,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려는 동일한 경향이 복음서에 여러 번에 걸쳐 나타난다. 마리아와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이 그에게 말을 걸려고 말씀을 전하는 것을 방해했을 때, 주님의 반응은 더 이상 분명할 수 없다.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자기의 손을 내밀며 말씀하시기를 “나의 모친과 나의 형제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그 사람이 나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시니라』(마 12:49-50 ;참조 막 3:31-35, 눅 8:19-21).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특별한 관심도 그녀에게 결코 주지는 않으셨다.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모든 자에게 동등하게 대하셨다. 예수님께서 그를 낳은 것은 복임을 인정하고 계셨지만, 더 큰 영적인 복이 있음을 알고 계셨다. 누가복음 11:27-28 말씀은 그러한 사실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다. 『주께서 이런 일을 말씀하고 계실 때 한 여인이 무리 속에서 목청을 높여 주께 말씀드리기를 "당신을 낳은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라고 하니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정녕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복이 있느니라."고 하시더라.』

 

분명히 예수님의 어머니가 된 것은 영적인 복을 받았다는 증거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이 훨씬 더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이다. 전반적으로 볼때, 몇몇 역사학자들이 내놓은 주장처럼 예수님께서 선천적으로 모정이 부족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반대로, 이것은 예수님께서 매순간마다 사역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설정할지를 알고 계심을 보여준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아직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우선순위가 틀어지는 일을 허락치 않으셨다. 동시에 어머니로서의 축복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다른 성도들보다 영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 않음을 알고 계셨다. 말씀에 경청하고 지키는 자는 누구나 그의 어머니와 동일한 가치가 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마리아보다 더 큰 복을 받게 된다.

 

각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균형잡힌 태도는 마지막 사역 중의 하나에서 자신의 죽음 이후에 어머니의 처소와 부양을 부탁하려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요한복음 19:25-27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무서운 형벌의 고난을 겪고 계신 동안,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리아를 돌보도록 맡겼다. 주님의 형제들이 “주를 믿지 아니함이라."(요 7:5)고 우리가 믿는다면 이것은 합당한 조처였다. 이전에, 이 구절은 마리아의 만유의 어머니임을 언급할 때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그러한 해석은 오늘날 많은 카톨릭 저자들에게조차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한 예로, 보수적 성향이 짙은 카톨릭 신학자인 오트(L. Ott)는 모든 신자들에게 마리아의 모성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명확한 성경적인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신학자들은 요한복음 19:26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성경적인 지지를 찾는다. "여인이여, 당신의 아들을 보소서" 하지만, 문자그대로 그 의미를 보면, 그 말씀이 지칭하는 대상은 단지 마리아와 요한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자료들은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국면을 보여주고 있다. 주님은 어머니를 사랑했고, 심지어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그녀를 돌보았다. 하지만 그분의 사역에 끼어들 권한은 결코 주시지 않았다. 단지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이유로 별다른 특권을 누릴 가치를 갖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리스도 죽으심 이후의 마리아

 

예수님의 죽으심 이후에 마리아에 관한 쓸만한 역사적인 정보는 아주 희박하다. 이것은 그녀가 원시공동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곳에 등장한 그 어떤 기록도 없다. 아주 희박하긴 하지만 유일한 가능성은 고린도전서 15:6에서 바울이 말한 500명이 넘는 형제들 중에 마리아가 있었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예루살렘에서 회중의 모임에 나타났음을 사도행전 1:14로 알고 있다.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한 가운데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확신할 수 없다. 사도행전 1:14 이후에, 성경에서 그녀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론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역사상의 인물로서의 마리아와 예수님과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그녀가 어떻게 보여졌는지에 대한 일반적인 그림을 본다.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들에 도달한다.

 

1. 그녀는 나사렛 태생이었으며, 제사장 계보의 집안이었다.

 

2. 요셉에게 정혼했으나, 처녀였으며, 이후에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잉태하게 된다.

 

3. 석 달 동안 사촌인 엘리사벳과 함께 지냈고, 그 후에 나사렛으로 돌아간다.

 

4. 사촌인 엘리사벳에게 가서 성모의 노래로 알려진 구절에서 엘리사벳과 엄청난 기쁨을 나눈다.

 

이 구절에 의하면 마리아는 하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는데, 이것은 자신을 정말로 구원이 필요한 존재로, 바로 죄인으로 여기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메시야를 잉태하도록 자신을 선택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님을 기적을 행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약속에 신실하신 분 특히,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에 대해서.

 

5. 그녀와 동침한 적이 없었던 남편 요셉은 그녀를 은밀히 단절하려고 생각했지만, 한 천사가 꿈에 나타나 알려준 뒤에는 그녀를 아내로 받아들였다.

 

6. 베들레헴에서 그녀는 예수님을 말 구유에 낳았고, 그날 밤에 목자들이 마리아가 애지중지 품고 있는 바로 그 아이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왔다.

 

7. 예수님의 할례와 정결례를 위한 날들이 지나고 성전에 재물을 드렸는데, 그 재물로 봐서는 요셉과 마리아가 하급계층에 속한 사람들임을 알 수가 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와 머무는 동안, 시므온과 안나가 그 아이가 바로 메시야임을 알아챈다.

 

8. 이 일 후에,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동방 박사들의 문안을 받게 되고, 그들은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경배를 드린다. 요셉이 꿈을 통해 들은 천사의 지시만이 헤롯의 암살 계획에서 아이를 구출하게 되는데, 바로 요셉과 마리아가 아이를 데리고 이집트로 달아났던 것이다.

 

9. 헤롯이 죽고 난 뒤, 요셉의 가족은 나사렛으로 돌아와 정착하게 된다.

 

10.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 성전에 그를 두고 온 것을 잊은 요셉과 마리아가 다시 그를 찾았을 때 주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11.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마리아는 여러 상황에서 개입하려고 했지만, 그 계획은 아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12. 그처럼 누구라도 주의 모친이 남다른 특권을 가졌다는 느낌을 갖도록 허락치 않으셨고, 오히려, 마리아 자신이 주의 뜻을 행하는 자는 누구라도 자기보다 더 큰 복이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13.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모친을 돌보도록 위탁하셨다.

 

14.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님을 보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만한 근거가 되는 글은 없다.

 

15. A.D. 30년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 모임의 일원이었다. 그후에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신약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초기 교회 안에서 그녀의 중요성은 모르긴해도 한정되었거나 거의 무시되었음을 의미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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