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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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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1-07-05 ㅣ No.5394

 
 

나는 개신교 신자가 아님을 밝혀 두면서

개신교 창에서 뭐 이런거 가져 오느냐고 하지 마시고 보시고 참고하세요

보기 싫으신분은 안보셔도 됩니다.

답변은 사양합니다.      ~로마노~~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가 아니었다.

 에스라하우스의 원장으로 30년 이상 성경 통독 운동을 전개해온 노우호 목사(예장통합, 마산 샤론교회 시무)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던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로 알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노 목사의 비판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으로 원문을 그대로 옮겼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던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로 알고 있는데, 이는 성경을 정밀하게 보지 못한 사람들의 경솔함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지도 않았다. 이 오해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으로 착각한 데서 비롯되었다. 둘째,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가 아니었다. 창녀로 볼 수 있는 죄 많은 여인은 베다니에 살고 있던 나사로의 누이동생 마리아였다. 셋째, 막달라 마리아는 나이가 상당히 많은 여인이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을 뒷바라지를 하면서 섬겼던 여러 여인들이 이름이 나올 때 언제나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온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연배 비슷 서양과는 달리 동양 사람들의 관습은 나이가 많은 사람의 이름을 앞에 기록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모친 마리아와 거의 같은 나이였거나 그 이상이었다. 예수님이 자기 어머니 뻘이나 되는 고령의 여인과 결혼을 했다는 댄 브라운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삼류 코미디도 못되는 이야기다.

 막달라 마리아는 재력이 있는 중년이었고 아마도 과부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녀는 한때 일곱 귀신이 들어가서 폐인이 될 뻔했는데, 그녀를 억압하던 일곱 귀신을 예수님께서 쫓아내어 주심으로 정상적인 회복되시어 그날부터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다. 그녀는 자기의 소유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섬겼다. 예수님의 삼년 사역에 들어간 경비 중 상당 부분을 막달라 마리아가 담당했고 베대의 부인 즉 야고보와 요한의 모친이 일부분을 담당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눅 8:2~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라는 여인은 젊은 여인이라고 볼 수가 없다. 헤롯이 자기의 내탕고를 맡을 청지기를 풋내기 젊은 아이를 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나이 50이 덜된 사람이 헤롯왕의 청지기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요안나 역시 나이가 대체로 50대였을 것이고 당시 상당한 신분에 있었던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의 이름보다 앞에 거명되는 막달라 마리아의 나이도 최소한 50대 여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가 아니었다 성경 어디에도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기록이 없다.

 그럼에도 그녀가 창녀로 언급되는 이유는 59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부활절 설교를 하면서 누가복음 7장에 등장하는 마리아를 베다니 마리아인 줄 모르고 그녀를 창녀이며 막달라 마리아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더 자세하게 살펴본 사람이라면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마리아는 베다니의 마리아 즉 나사로의 누이동생이었고, 그 장소는 베다니의 나사로 집 가까이에 살고 있었던 바리새인 시몬이라는 문둥병 환자의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다니라는 동네는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한 가난하고 소외된 마을이었다.

 그곳에는 불가촉 질병을 앓는 사람들이나 죄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동네였다. 그래서 그 동네의 이름도 '벧-아니' 즉 베다니 , '슬픔의 집'이라는 뜻이다. 병든 나사로 역시 나병환자였다는 것이 정설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에게는 여동생이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마르다'이고 다른 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였다. 예수님은 나사로와 오래 전부터 사귀어왔고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는 당연히 나사로의 집을 찾았으며 당연히 그의 여동생들도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으며 고마운 분으로 존경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자주 출입하는 것을 그 이웃에 사는 바리새인 시몬이라는 문둥병을 앓는 사람이 자연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때 앓던 병으로 죽어 장사까지 지냈던 나사로를 능력으로 살려내신 사건이 있은 후로부터 예수님은 베다니 마을에서 매우 유명해졌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평소에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시몬은 혹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게 되면 무슨 은혜를 받을 수 있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게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꺼림이 없이 그 초대에 응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때 시몬의 이웃에 살고 있었던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그 자리에 나타나서 예수님께 다가가 예수님의 머리에 한 방울을 떨어뜨린 후 나머지 향유는 한꺼번에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를 풀어서 예수님의 발을 닦고 있었다. 향유를 깨뜨린 마리아는 막달라가 아닌 '베다니'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더라."(요 11:1~2) 복음서마다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댄 브라운은 복음서를 읽지 않고 무슨 책을 읽었는지가 매우 궁금하다.

 복음서의 어떤 부분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하고 다른 곳에서는 발에 부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런 경우는 간단하다. 처음에 한 방울은 머리에 붓고 나머지는 발에 부었던 것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마 26:7)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막 14:3)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 7:38)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5)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6)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요 12:1~3)

  엉뚱한 근거로 소설 쓴 댄 브라운만 탓할 일은 아닌 듯 성경을 제대로 보지 못한 <다빈치 코드>의 댄 브라운이 엉뚱한 이론을 만들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하기야 우리 한국의 찬송가에까지 그런 실수를 할 정도로 성경을 잘 모르니 댄 브라운만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 찬송가 346장에 보면 꼭 오해하기 좋게 되어 있다. "값비싼 향유를 주께 바친 막달라 마리아 본받아서"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라 베다니 마리아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향유를 가지고 간 것은 예수님께서 무덤 속에 계실 때 그 시신 즉 미이라에 바르기 위하여 준비했었던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인지 베다니 마리아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쓴 책이 그렇게 팔리고 또 그런 것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고 하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목사들이 그 동안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이런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우리 목사들이 잘못하여서 엉뚱한 피해자를 만들면 천국가서 그분을 어찌볼꼬!!

 

 

 
 
 마리아 막달레나는 화가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성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녀는 일반적으로 긴 금발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는,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섹시한 여인으로 그려졌다. 화가들이 마리아 막달레나를 이처럼 여성성을 강조한 모습으로 그린 데에는 그녀를 매춘부 혹은 간음하다 걸린 여인과 동일시했기 때문인데 이는 어디까지나 세속적으로 전해진 이야기일 뿐 실상 성서에서 이 같은 사실을 찾아볼 수는 없다.
 
성경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이름이 등장한 곳은 루카복음이다(루카 8,2). 그런데 성경의 이 구절 바로 앞에는 죄 많은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예수님이 바리사이 사람 시몬 집에서 식사를 하시던 중에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루카 7,38)”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이 일화는 신약성경의 4대 복음 저자가 모두 소개를 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루카는 그녀가 죄인이었다고 말하고 있고, 요한은 그녀를 마르타의 자매 마리아로 소개하고 있다.
<가톨릭 자료실 <성화/이콘 해설중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다
요한복음서 마태오복음서 마르코복음서 루카복음서
[ 제 12 장]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다
1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2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3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4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5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7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8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 제 26 장]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
6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의 일이다.
7 어떤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다가와, 식탁에 앉아 계시는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
8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불쾌해하며 말하였다. “왜 저렇게 허투루 쓰는가?
9 저것을 비싸게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을 터인데.”
10 예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 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11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준비하려고 한 것이다.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 제 14 장]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
3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의 일이다. 마침 식탁에 앉아 계시는데, 어떤 여자가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
4 몇 사람이 불쾌해하며 저희끼리 말하였다. “왜 저렇게 향유를 허투루 쓰는가?
5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을 터인데.” 그러면서 그 여자를 나무랐다.
6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가만 두어라. 왜 괴롭히느냐? 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7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으니, 너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들에게 잘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8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바른 것이다.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굿뉴스<가톨릭정보<4복음대조표~에서
 
 
 
Re:막달라의 마리아
 
작성자   이주은(june)  쪽지 번  호   1169
 
작성일   2005-01-30 오전 8:40:53 조회수   360 추천수   0
 

막달라 마리아는 Mary of Magdala 의 한국어 표현이고, 마리아 막달레나, 혹은 막달레나 마리아는 Mary Magdalene의 한국어 표현이라 생각됩니다.  Magdala 는 지역 이름이고, Magdalene 은 그 지역 사람들을 호칭합니다.  물론 둘다 막달라 라는 지방 출신의 마리아 라는 이름의 여자를 가리키는 것이구요.  같은 예를 들자면,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이므로 Jesus of Nazareth(나자렛 - 지역 이름) 이라고 불릴 수도 있고, Jesus the Nazarene(나자린 - 나자렛 출신 사람) 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마태오 복음 2장 23절에 보시면 "그를 나자렛 사람이라 부르리라"가 나오지요?  영어로 보시면 "He will be called a Nazarene"이라고 나옵니다.  이와 같이 막달라 마리아, 마리아 막달레나, 막달레나 마리아 모두 미리 말씀드린 것 처럼 막달라 라는 지방 출신의 마리아 라는 이름의 여자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성서 어디어디에 나온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성서 다른 어느 곳에 나온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같은 여자냐 하는 것은 질문하신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같은 사람 일수도, 다른 사람 일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성서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조금 덧붙이자면, 당시 풍습은 여자들에게는 항상 그 여자가 속한 남자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마태오 복음 27장 56절에 보시면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있었고,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라고 나오지요.  이렇게 여자는 어릴 때는 아버지에게 속하고, 결혼해서는 남편에게 속하고, 남편이 먼저 죽고 나면 아들들에게 속하므로 항상 누구의 딸, 누구의 부인, 누구의 어머니 라고 불리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만일 남편은 죽었는데 아들은 없는 경우, 남편의 형제들도 없거나 거두어 주기를 거부할 경우, 정말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척박한 팔레스타인 지방의 길거리를 다니다 굶어 죽기 딱 좋은 상황, 그렇게 죽어도 아무도 개의치 않을 상황입니다.  율법에도 추수를 하고 난 다음 밭에 떨어진 이삭은 줍지 말고 과부들에게 남겨 두라고 나오지요.  대부분의 과부들은 이렇게 땅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 먹으며 근근히 생을 연명해 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성서에 과부에게 잘하라고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율법에서 형이 자식 없이 죽으면 동생이 그 부인을 자기의 부인으로 맞이해야 한다는 것도 바로 이런 과부의 생명과 안위을 보장해 주려는 제도적 장치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 라는 이름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 그 마리아는 어떤 남자에게 속하지 않았었다는 것입니다.  아예 결혼을 못했거나 아니면 결혼을 했었는데 과부가 되었다 등의 추측이 있습니다.  누구의 딸로 태어나,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되면 금새 결혼하고(당시 보통 12-15세에 여자들은 결혼하는 것이 풍습), 그 다음에는 누구의 부인이나 누구의 어머니라고 불리는게 당연하다시피 한건데, 나이들어서까지 혼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마을에서 온갖 명예롭지 못한 소문들의 주인공, 즉 '동네북'이 되는 것입니다.  혼자 있게 될 경우 그 이유야 여러 가지 이겠지만, 이런 경우 창녀라고 불리는 것은 꼭 그 직업을 가져서가 아니라 혼자라는 그 자체로도 그렇게 불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 복음서 어디에도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기록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어디서 '주워 듣고'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좀 씁쓸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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