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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땅나 39 【참행복2】 “슬퍼하는 사람" 십자가의 길 제9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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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라 [cham3385] 쪽지 캡슐

2017-12-12 ㅣ No.116786

[하늘땅나39] 【참행복2】 “슬퍼하는 사람" 십자가의 길 제9처 1

제9처 세 번째 넘어지다.

세 번씩이나 넘어짐 : 실패한 자, 쓸모 없는 자, 믿지 못할 자가 됨. 모든 이가 그가 힘이 있음을 믿지 못함. 힘없는 자로 여김 받기에 충분하다.

예수 그리스도님 : 예수 그리스도님께서는 기진 맥진하시어 세 번째 넘어지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걸어갈 힘도 혼자 일어날 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형 집행인에게 자신의 몸을 다 내어 맡길 수밖에 없게 되시었습니다.

: 나 안에 완전히 실패한 자로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그래도 괜찮은 모습을 보이고 싶은 욕망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자신이 무엇이라도 되는 양 생각하는 자만심이 살아있기에 그것을 철저히 없애기 위해서는 한번 더 넘어져야만 합니다. 완전히 실패한 자,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여김 받도록 내동댕이쳐져야만 고개를 들고 있던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외적인 교만심’을 없앨 수가 있습니다.

세 번씩이나 넘어진 지금! 아버지의 뜻에 따를 수 있는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옷 벗김으로 인해 창피 당하는 것(10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11처), 죽는 것(12처), 십자가에서 내려 무덤에 묻히는 것(13, 14처) 등. 십자가를 짐으로 오는 고통의 절정 순간입니다. 또한 믿고 지켜보던 이들의 일말의 희망을 무산시키는 순간입니다.

이제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어진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송두리째 내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힘이 다 빠져 버려 손가락 하나 까딱거리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태오 18, 3~4

‘어린이와 같이 되는 것’이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맞지 않는 더러운 겉옷을 없애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동안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어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자존심, 체면 등 자신을 치장하는 “모든 허례 허식들을 없애버린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 그 어떤 사람의 눈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옷을 벗고 있어도, 아는 것이 없어도, 재주가 없어도, 가진 것이 없어도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는 상태입니다. 어린아이는 남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어린아이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상태를 받아주고 사랑해주는 부모님의 품안에 머물러 있으면 마냥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의 제9처까지 온 사람 자신 안에 온갖 부족함, 더러움, 결점, 약점이 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기꺼이 받아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내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제9처까지 오는 동안에 뼈저리게 느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체면 : “나는 있는 나다.” 라고 하시는 “하느님의 자존심” ‘투명한 상태의 당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시는 것’이지만 “죽게 만들어진 짐승의 상태가 된 사람의 자존심”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 ‘투명하게 만들어진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겹겹이 짐승의 옷으로 둘러싸고 감추어서 도저히 다른 이가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없게 만든 불투명한 것’입니다. 자신의 본 모습을 겹겹이 짐승의 옷으로 둘러싸이게 한 사람은 혹시나 다른 이가 자신에 관하여 들추어내어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도저히 참지 못하고 화를 내거나 원수처럼 여기기가 일수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느님의 모상을 닮게 만들어졌기에 세상 모든 이는 똑같이 고귀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 당연한데도 짐승의 옷을 덧입고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도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알지 못하고 있기에 자신만이 남과 다른 어떤 특별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양 생각하여 자기 아닌 다른 그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길을 통해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 자신의 얼굴에 겹겹이 둘러쳐졌던 너울을 없애고 고귀하고 깨끗한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면 자기만 잘났거나 또한 더럽거나 하지 않고 세상 모든 사람이 모두 다 똑같이 불완전하여 죄를 짓고 살고 있으며 다 똑같이 고귀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더 이상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우거나 자신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하거나 다른 이들을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기어 업신여기는 일은 없게 됩니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창세기3,9-11,17a,19,21

높아지려는 교만심으로 야훼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죄를 지음으로 입었던 옷’ 2천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낮추시어 벗으시었습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실 때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셨던 옷(짐승의 옷)을 우리 스스로 벗어 던질 수 있게 됨으로써만 다시 에덴동산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십자가의 길에서 세 번째 넘어짐으로 ‘짐승처럼 죽게 된 나의 몸을 감싸고 있던 짐승의 가죽 옷’ 벗어버릴 수 있는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한 알의 밀알로서의 자신의 겉껍질이 이제 완전히 다 썩은 것입니다.

제9처를 통해서 마지막 남은 자존심, 체면, 허례허식 등. 자신을 남 앞에 드러내려는 ‘외적 교만함’ 철저히 없애버려서 태초에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벌거숭이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던 것처럼 부끄러움을 모르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태초에 하느님께서 만드셨던 본래의 모습을 지닌 사람”이 되기 위한 마지막 준비 작업입니다. 이로 인해 그 동안 쌓아 올린 자아의 벽을 다 허물어버릴 수 있게 됩니다. 이제야 낙원에서 쫓겨 날 때 하느님께서 손수 입혀주셨던 짐승의 옷인 가죽옷을 완전히 벗어버릴 수 있는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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