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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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님 장례식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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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ystefano] 쪽지 캡슐

2004-03-08 ㅣ No.6623

3월 8일 사순 제 2주간 월요일-루가 6장 36-38절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따님 장례식 날>

 

저녁기도를 하러 성당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사무실에 손님이 계시길래 어떤 분인가 하고 들어갔더니 연미사를 신청하러 오신 할머님이셨습니다. 그냥 인사만 하고 나오려다가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할머님은 망연자실, 자포자기한 모습, 기력이 하나도 없는 얼굴이셨기에 제가 여쭈었습니다. "할머님, 댁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목 메인 할머님의 말씀을 듣던 저는 너무도 가슴이 아파서 할 말을 다 잃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따님 장례식을 치룬 날이었답니다. 이제 겨우 40대 중반인 딸, 남한테 죽어도 싫은 소리 못하는 착하기만 했던 딸, 평생 가족들 뒷바라지하느라 생긴 스트레스성 병으로 세상을 떠난 딸을 생각하니 너무도 억울해서 못살겠다고 하셨습니다.

 

딸 장례식에 가서 작별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노라고, 하루 종일 분을 삭이느라고 여기저기 다니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고 가슴이 찢어지는 할머님의 고통을 앞에서 "힘내시라" "기도하겠다"는 말조차 꺼내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할머님은 아마도 요 근래 밥 한술 제대로 뜨시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돌아가시다가 쓰러지시겠다 싶어서 아이들 식사시간인데, 가셔서 밥 한술이라도 뜨고 가시라고 말씀드렸더니 마지못해 따라오셨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시끌시끌한 아이들의 활기찬 모습을 본 할머님은 힘겹게 밥을 좀 드셨습니다. 한 마음씨 예쁜 아이가 할머님께서 뭔지 모르지만 힘들어하신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반찬을 더 가져오고 국도 좀 더 떠드리는 등 곰살맞게 할머니 시중을 들어드렸습니다. 얼마나 기특하던지요.

 

이 세상에는 한없이 깊은 슬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나 십자가에 속울음 우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요?

 

할머님의 주체 못할 큰 슬픔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상대방의 속마음 안으로 들어가 본다면, 그가 안고 살아가는 남모르는 슬픔이나 고통, 짙은 상처를 알게 된다면 섣불리 상대방을 판단할 수 없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비판하지 말. 남을 단죄하지 마라. 남을 용서하여라. 남에게 주어라."

 

결국 자비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평생 동안 지고 온 무거운 십자가를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오늘 오후에는 한 아이와 함께 추모의 집을 찾았습니다. 작년 이맘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골이 보관되어 있는 납골당엘 갔습니다. 아버지의 유골 앞에서 아이는 아무런 말도 없이 굵은 눈물만 뚝뚝 떨어트렸습니다. 아이의 처지가 너무나 딱했습니다. 이제 겨우 15세인데, 엄마는 어디 계신 줄도 모르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유일한 연고자인 형은 행방이 묘연하고...

 

아이가 한 평생 지고 갈 외로움이나 허전함, 상처나 번민을 생각하니 얼마나 마음이 짠해왔는지 모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기 원한다면 이웃의 상처를 주목해야만 합니다. 그의 말 못할 고통, 깊은 슬픔, 남모르는 사연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만 용서가 시작됩니다.

 

결국 용서는 한 인간 존재를 연민의 눈, 측은지심의 눈,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할 때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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