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성지순례ㅣ여행후기

수원교구 골배마실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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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임 [kr3217] 쪽지 캡슐

2012-08-06 ㅣ No.749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수원교구 골배마실 성지

 골배마실은 김제준 성인과 성 김대건 신부의 신앙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김대건 신부의 가족이 고향인 충청도 솔뫼를 떠나 정착한 골배마실은 김대건의 소년

시절의 향취가 남아 있는 곳이요, 성소의 꿈을  키우던 장소이다. 1836년 이웃 은이

공소에서 세례 받은 뒤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위치: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

문의: 은이 성지 TEL (031)338-1702

찾아가는 길: [승용차] 영동고속도로 양지IC에서 나와 용인 방면으로 우회전한

후 1km
가서 17변 국도와 만나는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양지 성당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우측에
양지골프장이 나온다.  골프장 내로 들어가 직진하여 약 500m

더 들어가면 길 우측 개울
건너에 성지가 있다.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가족이 충청도

솔뫼를
떠나 서울 청파동을 거쳐 용인 땅에 정착한 것은 대략 1827년경으로
알려졌다.

골배마실이라는 지명은 이곳이 옛날부터 첩첩산중인데다 뱀과 전갈이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서 뱀마을, 즉 '배마실'이라고 부르던 동네에서 시작되는

산골짜기 안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것은 1821년 8월 21일, 지금의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인

솔뫼에서 부친 김제준(金濟俊, 1796~1839, 이냐시오) 성인과 모친 고(高) 우르술라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김 신부의 집안에 신앙이 스며든 것은 그의 증조부

김진후
(金震厚, 1739~1814, 비오)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1791년 진산 사건(珍山

事件)으로
그는 옥에 갇히고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유배를 가기도 하였으며, 1805년

다시 붙잡혀
결국 10년의 옥고 끝에 1814년 순교하였다.


 

그로부터 7년 후 김대건 신부가 탄생하고 재복(再福)이라는 아명(兒名, 어

릴 때
이름)으로 7살까지 솔뫼에서 지내다 김 신부의 조부인 김택현(金澤

鉉, 宗元)이
가세가 기울고 더 이상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워지자 가족들을

이끌고 바로 이곳
경기도 용인 땅으로 삶의 터를 옮겼다. 당시 그의 가족이
정착하여 교우촌을 일군
곳은 골배마실이 아니라 남쪽 산너머에 있는 '한덕

골'(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묵4리)였다.


 

한덕골로 내려오기 전에 이보다 더 험준한 인근의 광파리골에 살았고, 그 후 한덕골

에서
다시 인접한 굴암(구람)으로 내려와 살았다고 전해진다. 김제준은 그 후 가족들

을 이끌고
1835년 무렵에 한덕골 일대에서 골배마실로 이주하였다. 선대의 신앙을 이

어받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모방(Maubant, 羅伯多錄, 虛, 1803~1839, 베드로)

신부로부터 세례와
견진을 받고 회장에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면서 자신의 아들을 사

제의 길로 인도하였다.

김대건 안드레아는 1836년 4월 이웃에 있는 은이 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뒤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1836년 12월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9년 만이 1845년 10월 국내에 잠입한 김 신부는 비로소 자신이 자라던 골배

마실을
찾아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감격의 재회를 하였다. 귀국 후 페레올

주교의 배려로
첫 사목지를 은이 마을로 정한 김 신부는 공소를 차려 용인

일대의 사목을 시작
하였지만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모친 역시 귀

국 후 잠시 얼굴을 대했을
뿐, 김 신부는 사제품을 받은 지 1년 만인 1846

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장렬한
순교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진산 사건(珍山事件)

1791년 신해박해의 계기가 된 사건으로 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천주교인 윤

지충
(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申主)를 불태워 버린
폐제분주
(廢祭焚主) 사건을 말한다.

 

1790년 말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주교는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윤지충은 1791년 5월(음) 그믐 모친 권씨(權氏)의

상(喪)을 당한
후 그해 8월(음) 그믐에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워 땅에

묻었고  윤지충의 외종
사촌 권상연도 죽은 고모의 신주를 불태워 윤지충과

보조를 같이 하였다.

이 사건을 충효의 유교 이념을 국시로 하는 조선 사회에 대한 도전으로 받

아들였다.
두 사람은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운 사실로 1791년 12월 8일

(음 11월 13일)
처형 당하였다.

 

성지 안내글의 출처: 가톨릭출판사 / 순교자의 맥을 찾아서

 http://paxkorea.kr/   <<  참고하세요~!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이번 성지 순례를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사실 이번 순례길에는 골배마실 성지와 은이 성지 그리고 새남터 성지 순례는  
계획에
없었습니다. 전날 솔뫼 성지를 순례하고 다음날 미리내 성지를 순례하는
일정과 미리내
순례를 마치고 다른 곳을 순례할 계획을 세우고 떠났었습니다.

 그런데 미리내 성지 순례를 마치고 우리의 발걸음은 은이 성지로 향했고 은이
성지에서
골배마실 성지로 그 다음은 새남터 성지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새남터
에서는 당고개 성지
로 저희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날이 바로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 축일인 7월 5일이었습니다.
저희는 순례를 하면서 주님의 섭리하심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렸습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워도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정말로 주님이심을 체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태어나신 곳으로 다음은 어린시절을 보내신 곳으로 다음은
당신의
첫 사목지로 다음은 순교하신 곳으로  자연스럽게 이끌어 주심으로써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으셨을까를 묵상해 봅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주님에 대한 사랑이 어떻게 싹트고 자랐는지를 보게 하시고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저의 몫이고 저의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안에서 그래도 가장 신심이 깊다고 자부하는 저에게 거름이 되라고
하신 말씀
이셨습니다.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더욱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갈
때 언젠가 꼭 열매가
맺을 것임을 보여주신 순례길이었습니다.

아직 열매를 맺지 못한 부모님과 동생들과 조카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모두 세례의 은총을 받고 주님의 자녀로 태어나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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