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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통을 대하는 가톨릭 신앙의 참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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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훈 [saint72] 쪽지 캡슐

1999-01-06 ㅣ No.37

 

 

앞의 저의 글에서 가톨릭 신자의 진정한 신앙 생활은 그 어떤 불의하고 인간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강철과 같은 의지로 꾸준히 신앙을 실천하는
태도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한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는 가톨릭 신자가 죽음을 앞둔 마지막 고통 앞에서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을 어떻게 나타내는지에 대한 감동적인 일화를 소개하
고자 합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들의 신앙에 대해, 고통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필자는 바랍니다.



  

 

 

   어둔 밤의 기도

 

 

 

 1964년 12월 3일 취리히의 대학병원에서, 한때 명성을 떨치던 배우이며 연

출자이던 에른스트 긴스베르크가 타계하였다. 베를린의 유다인 의사 가정

에서 태어난 그는 35세때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취리

히로 온 가족이 망명하여 그곳 연극계에서 그는 빛나는 경력을 쌓았다.

 

1962년 옛 고향, 베를린에로의 그의 귀향은 개인적 기쁨도 컸지만 연기자로

서 제 2의 화려한 위업을 달성하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그러한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불치의 병에 걸렸음이 선고되었다. 특이한 향토병이 그의 온몸으

로 퍼져가는 과정에서 그는 가장 아끼던 목소리까지  잃게 되었다. 이 당시

의 고통을 기도 형태로 만든 것이 있다. 그 기도의 마지막 구절들은 알파벳

문자판의 보조를 받아가면서 겨우 표현된것이다.  그의 저서 ’이별’에 실려

있는 그 기도 중에 그토록 힘겹게 표현된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움직일 수 없는 두 손을

 

    마음으로 모읍니다.

 

    이 어둠이 어서

 

    산화되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희망도 끼어들 수 없는 고통의 긴 밤중에 - 이미 만사가 끝장이건만

- 긴스베르크는 기도하기 위해 두 손을 모은다. 이미 움직일  수 없는 손이

지만 마음으로 더 힘있게 모은 그의 기도는, 깊은 밤의 짙은 어둠을 하느님

께서 어서 휘몰아가시기를 비는 간청으로 넘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어서

광명의 나라에로 데려가주시기를 비는 것이기도 하다.

 

 

 고통의 막다른 골목에 다달은 인간은  여러 반응을 보일 수 있다.그  예로,

프로이드는 그의 오랜 임종의 고통을 침묵과 체념 속에서 장부답게 참아냈

는가 하면, 사경의 베토벤은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하며 몸부림쳤다고 전해

진다. 그런데 베토벤이 몸부림을 치고, 프로이드가 스토아 학파처럼 침묵을

지킨 것에 비해, 긴스베르크는 두 손을 모았던 것이다. 저항, 체념, 내어맡김

- 이것들은 마지막 고통을 대하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태도들인데, 저항의

태도는 인간적 연민을 느끼게 해주고, 스토아적  체념은 고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반면에 기도를 통해서 보여지는 그리스도교적  내어맡김은 오늘의 사

람들에게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기도와  내어맡긴다는 태도는 고통

의 현실을 도피하려는 불성실한 태도, 혹은 전능한  주인- 하느님에게 무조

건 복종하는 비겁한 태도로 보여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적 내어맡김은 소극적인 인내도, 맹목적인 복종도 아니다. 그것

은 고통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으로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두 손으로 받아들

여주시리라는 희망으로 지탱되는 능동적 자세이다.

 

바울로 사도에 의하면 그리스도교적 귀의는 맥없는  체념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당신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하느님 뜻에의 자발적인 동의이다.

 

오직 기도하는 마음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고통의 철저한  수용,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는 고통 중에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 고통까지 바꾸어놓

을 수가 있다. 그는 정복당하지만 그럼으로 더 강해진다.

 

마치 사랑이 늘 지게 하나 더 강하게 만들어주듯이.

 

 물론 고통을 변화시키는 수용의 자세는 그리스도인에게 날 때부터 저절로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수용의 자세를 지니기 위한  처절한 싸움과 비탄과  탄원을 통해서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교적 위탁은 기도의 열매이나, 멀고먼 길의 마

지막에 가서야 주어지는 것이다. 고통의 막장에 다다른 그리스도인, 그도 역

시 눈물을 흘리고,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비탄 속에서 하느님께 반항할지도

모르나 이러한 가운데에서 기도는 우러나오고, 이 기도는 인간 존재를 구성

하는 본질적인 것이 된다. 무릇 인간은 기도 속에서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

을 느끼고 감지하는지 알게 되고, 이 모두를  가지고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

이다.

 

 고통을 부끄럽게 여겨 감추고 도망치는, 고통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일차원

적 능력 위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기도는 무언가를 부숴버리는 힘있는 행위

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힘있는 기도는, 현실에 안주할 수 없는 이가 "생명을

사랑하시는"(지혜 11,26) 하느님께 비탄과  눈물로 달아드는 것이기  때문이

다.

 

 

 그리스도인도 헤어날 길 없는 고통 속에서는  울 수 있고 불안해할 수 있

다. 게쎄마니 동산에서 예수는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앞두

고 주저하며 떨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고고한 스토아 학파

같을 수는 없다. 그 역시 살과 피를 가진 한 인간이다. 불안과 슬픔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언가 부족한 사람이다.

 

 긴스베르크는 이렇게 쓰고 있다.

 

 

 

 

   텅 빈 병실 어둠에 갇히어

 

   쓰디쓴 울음을 울고 있습니다.

 

   조그만 틈도 없이 꽉 막힌

 

   시커먼 어둠에 갇혀

 

   어머니께 매달리는 허약한 겁쟁이 아이처럼

 

   그렇게 울고 있습니다.

 

   발가벗겨져 부끄러움에 떨고 있는데

 

   그분은 어서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눈물과 원망 가운데에서  왜라는 물음을 제기할  수도 있다.

탄식은 고통의 언어이다.

 

말문을 막아버리는 고통이 겨우 찾아낸 언어가 바로 탄식인 것이다. 탄식이

나 왜라는 울부짖음마저 억제될 때 사람은 더 살 힘을 잃게 될 것이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앞두고 시편 22의 절규를 외쳤다. 하느님과 인간에게서 버림

받은 예수는 하느님의 침묵과 죽음의 심연에로 가라앉는다. 그러나 이 심연

속에서도 예수는 하느님께 매달린다. 고통을 이기지 못해 하느님을 향해 외

치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납득하지  못하나 당신을 놓칠 수는 없노

라"고. 이렇게 고통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맛보신 예수는 그만큼 인간과

깊이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동료 예수는 옛 이스라엘에서뿐 아니라,

지금도 온 세상 어디서든지 들려오는  시편의 절규를 더욱 큰  힘의 ’왜’롤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무의미의 마지막  밑바닥까지 내려감으로써 이

’왜’를 모두 맛보았고, 우리도 ’왜’를 하느님께 소리칠 여지를 주었다.

 

 "오, 하느님, 왜 우리의 아이가 불구여야 합니까? 왜 나는 절름발이입니까?

왜 우리 부부는 파경에 처했습니까? 왜  나를 이해하고 내 편을 들어줄 이

가 아무도 없단 말입니까? ...."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는 관계를 잃지  않는

이러한 탄식과 물음의 외침은 기도의 형태가 되어준다.

 

 긴스베르크는 이렇게 탄식한다.  

         

 

 

    오, 나는 이미 불구가 된 몸입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사람이 짐승과 구별되는

 

    최종적인 말(語)마저 앗아간단 말입니까?   

 

 

 고통과 맞설 때 우리는 하느님께  울며 탄식하고 의문을 던질  뿐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구해주십사 간청할 수 있으며 또  애원해야 한다. 긴스베르크

의 탄시과 ’왜’ 라는 물음은 이윽고 감동적인 청원에까지 이르게 된다.

 

 

 

    오, 나의 하느님,

 

    언어마저 완전히 앗기운 채

 

    파멸의 태풍 속에 파묻혀 있나이다.

 

    오직 한 가지 간절히 청하는 것은

 

    ’감사’ 라는 한마디만이라도 말하게 하소서.

 

 

 그러나 이 간청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무정하게도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갔다. 긴스베르크의 간절한 청원은 그저 허공  속에 울리다가 사라

져버리는 것처럼만 보였다. 하느님은 침묵할 뿐이셨고, 이러한 침묵은 다른

기도를 더 계속할 용기를 꺾어버리고 만다. 이  상황에 대한 이해는 게쎄마

니에서의 예수의 기도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예수는 두려움으로  떨며 세

번씩이나 땅에 엎드려 기도했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

을 나에게서 거두어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마르 14,36). 예수의 기

도에서 중요한 것은 이 후반부이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

대로." 모든 고통 속의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어려움을 없이  해달라는 모든

간청의 기도는 이 후반부의  단계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것은  납득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은총을 간구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통을 피하게 해달라는 예수의 청은 채워지지  않았지만, 잠에 빠

져 있는 제자들에게 돌아온 예수는 기도하러 갈 때의 그와는 달랐다. 더 이

상 탄식하거나 떨지도 않았고, 자신의 때를 향해 용감히 나아갔다.

 

"때가 왔다.... 일어나 가자" (마르 14, 41-42).

 

 

 

 긴스베르크의 상황도 그와 비슷하게 전개된다.  외적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하느님은  언제나 그렇듯이 자연법칙에  간섭하지 않으셔서

그의 병세는 여전했다. 그러나 내적으로  기적이 일어났다. 기도 속에서 긴

스베르크에게는 그리스도교적 귀의의 은총이 선사되었다. 그는 자신의 고통

에 대해서 애정을 품게 되었고, 가장 사랑하는 것까지도 담담하게 떠나보낼

수 있는 의연함을 보였다.  긴스베르크는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놓을 수가 없다는 바울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께 완

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내면적 변화에 완전히 승복된 긴스베르크는 감사하는 사람으로 바

뀌었다. 고통에 대해 감사하는 게 아니다.  그 고통을 통해 믿음이 더 순수

하게 되고 더 성숙되었다는데 대해, 그리고 그  고통으로 좌절되지 않고 믿

음을 더 성장시킬 힘을 하느님께서 주셨다는 것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하게

되었다. 긴스베르크는 침묵 속에서 온전한 신뢰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의탁

하는 그의 마지막 기도를 다음과 같이 바쳤다.

 

 

 

  이 언어까지 잃은 자를, 광명의 고향에로

 

  말없이 받아주시는 주여,

 

  이제 저의 감사를 받아주십시오.

 

  인간의 말로는 표현할 길 없는

 

  이 넘치는 감사를 받아주십시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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