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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첫 미사가 열렸던 그 날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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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언론홍보팀 [commu] 쪽지 캡슐

2014-04-15 ㅣ No.835

 

“한국 교회 첫 미사가 열렸던 그 날을 기억하며…”

염수정 추기경, 예수부활대축일에

가회동성당서 미사 집전

20일 오후 2시 봉헌

1795년 예수부활대축일에 가회동성당 인근서 봉헌된 한국 첫 미사

오는 8월 시복되는‘하느님의 종’주문모 신부가 미사 집전해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이 오는 20일(일) 예수부활대축일을 맞아 오후 2시 가회동성당(주임 송차선 신부)에서 미사를 집전한다.

   

서울대교구 대변인 허영엽 신부는 “예수부활대축일에 교구장은 교구장좌 대성당(서울대교구는 명동대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것이 관례이다. 하지만 금년 8월 시복될 ‘하느님의 종 124위’ 를 기억하고, 이들의 순교 영성을 되새기자는 의미에서 한국교회 첫 미사가 열린 곳에서 교구장 집전으로 미사를 봉헌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가회동성당은 한국 교회 역사상 첫 미사가 봉헌된 미사 터를 관할한다. 한국 교회 첫 미사는 1795년 예수부활대축일(당시 4월 5일) ‘북촌심처’라고 불렸던 현재의 북촌한옥마을(서울 종로구 계동)에서 봉헌된 것으로 전해진다. (출처 샤를 달레 원저 ‘한국천주교회사’)

 

 

한국 교회 첫 미사를 주례한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는 조선 신자들의 요청에 의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첫 선교사이다. 1794년 12월 24일 밤 조선에 입국한 주 신부는 ‘북촌심처’에 위치한 역관(譯官) 최인길(마티아, 1765-1795)의 집에 머물면서 한글을 배웠고, 이곳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주문모 신부와 최인길은 모두 오는 8월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복될 ‘하느님의 종’(복자의 전 단계)이다.

   

   

한국의 선비와 벽안의 사제가 어깨동무한 형상

지역 주민과 관광객들에게 열린 성당

   

 

 

 

가회동성당 외부 전경

   

교구장 집전으로 봉헌되는 이날 미사는 지난 해 11월 말 준공된 새 성전의 봉헌식으로 진행된다. 봉헌식은 식전행사로 머릿돌 제막, 성모상 축성, 테이프절단 등이 이어지며 성수 축성 및 도유 예식(하느님께 봉헌된 거룩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주례자가 성전과 제대 등에 성유를 바름)이 진행되는 봉헌미사, 축하식 순으로 진행된다.

   

 

  

△가회동성당 1층에 마련된 역사전시실

   

새 성전은 연면적 3738.34㎡, 지하 3층, 지상 3층 규모이다. 북촌 한옥마을에 위치한 가회동성당은 오랜 역사와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여 사랑방, 대청마루를 가진 한옥과 성전이 들어선 양옥이 어우러진 구조로 신축되었다. 성전 1층에는 역사전시실이 마련돼 한국 천주교회와 가회동성당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송차선 신부(가회동성당 주임사제)는 “가회동성당의 모습은 조선의 선비와 벽안(碧眼)의 사제가 나란히 어깨동무하는 모습을 형상화 했다. 관광객들과 지역 주민들이 가회동 성당에서 한국 천주교회 역사를 접하는 동시에 이곳을 편안한 쉼터로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설명했다.

 

 

   

□ 가회동성당과 ‘하느님의 종’ 3위

주문모 신부, 최인길 마티아, 강완숙 골롬바

   

주문모 신부는 보편교회 교계제도에 대해 무지했던 조선에 입국한 첫 사제다. 주문모 신부는 계동에 있는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 머무르며 한글을 배우고 1795년 4월 5일 예수부활대축일에 가회동 본당 지역인 계동의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서 신자들과 첫 미사를 봉헌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전국에 주문모 신부에 대한 수배령이 내렸다. 주문모 신부는 초대 여성총회장 강완숙 골롬바(‘하느님의 종’으로 오는 8월 시복 예정)의 집으로 피신하고, 최인길은 그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주문모 신부라고 자칭하면서 자수하여 체포됐다. 여회장 강완숙의 집 역시 가회동성당 관할구역이다.

   

최인길은 조선인임이 금방 들통 나 모진 고문을 받았고, 현 단성사 자리인 좌포도청에서 순교했다. 연이어 체포된 신자들이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자백하도록 강요받거나 죽임을 당하자 주 문모 신부는 의금부로 가서 자수했다. 그는 문초 중에 “제가 조선에 온 것은 오로지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예수님의 학문은 사악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주문모 신부는 1801년 5월 31일 당시 그의 나이 49세로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하느님의 종’ 3위가 활동했던 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가회동성당은 서울대교구 내 성지 23곳을 엮은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http://holyplace.catholic.or.kr) 제2코스에 포함되어 있다. 지난 해 8월 교황 프란치스코는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에 사도적 축복을 내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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