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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자유게시판

아버지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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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철 [hl1ye] 쪽지 캡슐

2004-05-21 ㅣ No.67179

                         아버지의 이름으로...

 

  십자가를 안테나로!

  얼마 전에 재미있는 현대판 '알라딘과 마술램프'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인즉, "알라딘이 마술램프를 키면 어김없이 '펑'하고 거인이 나와서, '주인님, 명령만 내리십시오. 무엇이든지 제가 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알라딘은 '집이 필요하다', '차가 필요하다'등등 소원을 마구 말했습니다. 그러면 즉각 램프 속의 하인이 알라딘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구해주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알라딘은 그것이 하도 신기하고 궁금하여 그 하인에게 도대체 어떻게 해서 내가 구하는 것이면 다 구해주느냐?라고 물었더니, 그 하인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빚의 신비입니다. 제가 주인님의 이름으로 신용카드를 막 긁었습죠...저도 신기하더군요. 왜 주인님께 카드회사에서 신용불량자 통보가 왔던가요?" ^^*

 

  오늘 복음(요한 16, 23-28)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면 아버지께서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해 본 적이 없다. 구하라,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아마 그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셨던 예수님의 능력(?)을 불신하여 예수님의 카드를 사용하지 않았나 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엉터리 제자들인 우리는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카드로 긁어대지는 않았는지요? 공부도 하나도 하지 않고 수능시험 때도 예수님의 카드로, 경영부실, 재투자부족의 사업에도 예수님의 카드로, 이라크 포로를 성학대하고, 혼인잔치에 참석한 하객들에게 헬기로 공습하고, 팔레스티나 난민촌의 양민들에게 미사일을 쏠 때도 예수님의 카드로 마구 긁어대어 '하느님을 신용불량자로 만든 신앙불량자'는 아니었는지요? 그리고 정말 우리가 해야 할 도리를 다하고 힘에 부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였는지 그동안의 예수님이름으로 쓴 크리스챤 카드내역을 점검해봅시다. 참고로 전에 로마에서 쓴 글을 다시 퍼올립니다. 가브리엘통신

 

 

                             <하느님의 항복>

 

  로마유학시절에 성당을 순례하다가 가끔 본 아름다운 광경은 성당안 고해소에서 고백성사를 보는 모습을 보게 될 때 입니다. 저는 그 진지한 고백성사광경을 보다가, 엉뚱하게도 전에 어느 할머니가 고백소 안에서 '신부는 죄인에게 강복하소서!’라는 기도문을 잘못 보고 '신부는 죄인에게 항복하소서!’라고 큰소리로 외쳤다는 에피소드가 생각이 나, '씨익’ 하고 웃어 봅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가을을 보내면서 가장 아쉬운 것은 가을 단풍을 못본 것이었습니다. 물론 주말에 교외에 나가면 볼 수 있겠지만 시내에서 서울 덕수궁 돌담길과 같이 낙엽을 밟으면서 거닐만한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한국의 가을 단풍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단연 은행나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수녀님이 좋은 피정이 있다고 하여 속아(?) 참석한  예비 신학생 피정에서 지도신부님께서 '은행나무와 같은 사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신부님은 은행나무는 나뭇잎, 열매, 나무, 등...,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며 은행나무의 경제성을 강조하셨는데, 저는 ’노란 손수건’이란 단편 소설을 읽고 그동안 '마지막 심판을 준비하라’는 하느님의 경고장(Yellow Card)과도 같이 생각되었던  은행나무의 노란 잎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하느님의 노란 손수건’이라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기에, 더욱 더 한국의 노란 은행잎이 그리워집니다.

 

  또 로마에 와서 겨울에 더욱더 아쉬웠던 것은 하얀 눈을 못본 것입니다. 로마의 겨울 날씨는 지중해성 기후라, 겨울에 오히려 흐린 날이 많고 비가 많이 옵니다. 저는 이 하얀 눈이 우리 죄인들을 위한 '하느님의 항복’(백기?)이라는 걸 수년 전에 '아버지의 이름으로’라는 영화를 보고 깨달았습니다. 요즘은 '테러’라는 단어가 인터넷 검색어의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영화를 볼 때만 해도 테러는 극히 일부 특정지역에서 벌어지는 남의 일로 생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영화의 내용은. "영국에 대항해 싸우고 있는 아일랜드 공화군(IRA)의 일원인 어느 청년이 폭탄테러의 현행범으로 체포되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 청년은 교도소에서 모든 것을 저주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불우한 성장과정을 비관하며 가족들의 면회마저 거절합니다. 하지만 그 청년에게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려는 훌륭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가족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자신도 테러 공범이라고 허위자백을 하여 아들과 같은 교도소에 갇히게 됩니다. 아들은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더욱더 아버지를 미워하고 다른 죄수들과 합세하여 자신의 아버지를 경멸합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는 그 모든 것을 사랑과 인내로 받아들이고... 마침내는 미움과 분노가 가득찬 그들을 사랑으로 따뜻이 녹입니다. 다른 죄수들과 함께 그 아들도 서서히 그 희생적인 아버지의 사랑에 녹아들어 갑니다. 이제 그 교도소에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심지어는 간수들도 그 아버지를 존경하게 됩니다. 어느 날, 그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날밤 교도소의 모든 죄수들은 그 죽음을 슬퍼하며 창밖으로 하얀 종이조각을 일제히 날립니다. 하얀 종이조각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덮어주는 즉,  죄를 고백하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는 우리 모든 죄인에게 항복하는 하느님의 하얀 눈처럼 차가운 땅에 소리없이 쌓입니다."

 

  아마 성베드로 성당 앞 광장에서 수개월동안이나 성탄의 의미을 깨닫게 하고 있는 성탄 구유의 아기 예수님도, 분열이 있는 곳에 평화를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성프란치스코도, 또 얼마 전에 테러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아씨시에서 모여 기도했던 수많은 종교지도자들도,  하느님의 그 항복?을 실천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의 그 항복을 본받으면(내탓이오!)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될까요? 성당에서는 신부님이 먼저, 집에선 아버지나 시어머니가 먼저, 학교에선 선생님이 먼저 그 항복을 실천한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항복이 우리에겐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더 늦기 전에 이 겨울에 하얀 눈이 아닌 하얀 가루(탄저균), 하얀 재(핵폭탄 낙진)가 흩날리지 않도록, 하느님의 항복을 본받읍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나가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아버지의 이름으로’화해를 청하고 항복하는 사람이 됩시다.   (로마에서 가브리엘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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