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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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의 처지와 인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봅시다.(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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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식 (1998년 입국)
나는 북한을 버린 사람이다. 북한을 배반했다는 말이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한 믿음을 버렸다. 믿음을 버리는 데 역할을 한 것이 있다. 남한의 라디오 즉 내가 즐겨 듣던 KBS 방송이었다. 남한방송을 통해 남한의 발전상을 듣게 되었다. 맨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적은 양의 정보나마 이리저리 연결해보니 방송의 내용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 남한이 살 만한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비록 노동자 출신이지만 내 운명을 완전히 바꿀 것에 대한 결정을 스스로 내린 것이다. 하지만 KBS 방송내용처럼 남한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북한을 탈출할 때 대부분의 탈북민들은 남한행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 남한으로 곧바로 갈 것을 염두에 두고 북한을 탈출한 것은 아니다. 보위부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내뺐다고 할 수 있다. 북한에 대한 미련은 버렸지만 남한으로 가기보다는 중국에서 살아보겠다는 생각이 컸다. 남한은 너무 먼 곳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인정받을 수 없는 곳이다. 나는 첫 6개월 동안 모내기, 밭갈이, 김매기 등 북한에서도 안 해보던 일들을 다했지만 돈을 한번도 만져볼 수 없었다. 그들은 먹여는 주었지만 월급은 안 준다. 그래서 여기저기 기회가 닿는 대로 조금이라도 대우가 나은 곳을 수소문해본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면 적은 돈이나마 만져볼 수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옮긴다. 하지만 그곳도 마찬가지이다. 월급을 달라고 하면 처음엔 미룬다. 그 다음에 또 달라고 하면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폭력이 나오고 살인도 하게 된다. 자연히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인건비 몇원, 몇십 원을 받는 과정에서 싸움도 하고 경찰에 쫓기기도 하였다. 그러니 중국에 살면 그 나라에 대한 증오만 늘어난다. 중국내 조선족도 도와주지 않는 경우 많아 중국에 있는 조선족들은 말만 통했지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자들이 들어오면 남의 부인까지 팔아먹는데 그게 무슨 같은 민족인가. 인간에 대한 불신은 중국에서부터 시작된다. 한국에서는 무슨 외국인 노동자 인권에 대해 말이 많다. 특히 조선족들은 목소리가 크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100만 원 이상 월급을 받고 식사 제공받으면서 일한다. 우리는 그들 밑에서 겨우 몇 위안도 못 받고 일하였다. 우리가 당하던 수모를 생각하면 이 사람들은 복에 넘치는 사람들이다. 중국에 온 지 약 10개월 만인 99년 1월 19일에 대한민국으로 탈출할 것을 결행하기로 하고 대사관을 찾아갔다. KBS 방송에 의하면 분명히 한국대사관을 찾아가면 ‘따뜻하게 맞아 줄 것이고 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때 한국대사관은 지금처럼 독립건물이 아니고 고층빌딩에 들어가 있었다. 없는 돈으로 깨끗한 옷을 사 입었다. 새로운 나라로 가는 입구부터 더럽게 보이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요즘처럼 경계가 삼엄하지 않았다. 탈중 시도도 그리 많지 않았고 기획진입작전 등도 없을 때였다. 택시에 내려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대사관이 위치한 4층으로 올라갔다. 거기까지는 이상하리 만큼 쉬웠다. 중국경비가 한 두 명 정도 있었고 사무실 복도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복도에서 어슬렁대다가 대사관 직원인 듯한 사람이 나왔을 때 다가갔다. “도와주십시오. 한국으로 가고 싶습니다”라고 애원하자 그는 손을 내저으며 “나는 관계없는 사람이다”라고 하며 황급히 도망쳤다. 그래서 한번 더 기다렸다. 또 한국관리로 보이는 사람이 나왔는데 그이 역시 마찬가지로 도와줄 생각을 한했다. 중국경비가 낌새를 채고 인상을 쓰며 신분증을 보자고 요구했고 금세 행동을 취할 태세였다. 조금만 더 지체하면 잡힐 것이 분명하였기에 냅다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KBS 라디오의 방송내용과 현실은 달랐다. 대사관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처럼 따듯하지도않은 정도가 아니라 무슨 검정개가 왔는지 노란개가 왔는지 최소한의 신경조차 쓰지 않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중국에는 희망이 없었고 북한은 더더욱 돌아갈 수 없는 곳이 아닌가. 단 하나의 선택은 한국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KBS 가 말한 내용 중 나머지 방법에 기대를 걸어 보기로 하였다. 그것은 홍콩행이었다. KBS 에 의하면 홍콩은 중국과 달라서 인권이 보장되는 곳이고 탈북자가 난민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여비를 벌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흑룡강 조선족 지역인 계서시의 계림향이라는 곳에서 일을 하였는데 벌이가 안돼 겨울 동안 내몽골의 ‘운우월’이라는 곳으로 갔다. 운우월은 요즘 탈중 루트로 사용되고 있는 내몽골 국경지역인 ‘만저우리’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이다. 그곳에서 통나무를 나르는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거의 400위안(6만 원) 정도를 벌었다. 그때 한 끼에 만두 하나씩 먹으면서 일했다. 만두는 하나에 5전이었다. 1위안이면 만두 20개를 살 수 있는 돈이다. 2000년 3월 갖은 고생을 다해 선진을 통과한 나는 홍콩으로 들어갔다. 한국영사관이나 유엔공관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찾지 못하고 홍콩경찰서로 가서 내가 북한사람이라는 것과 한국으로 나가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홍콩 경찰은 오히려 인간적 대우 홍콩경찰은 매우 인간적으로 대우해줬다. 격리수감되어 있는 동안 그때까지 먹어 보지 못한 맛있는 식사가 제공되었고 후식으로 바나나 등 과일을 주었는데 내 생애에 바나나를 먹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수감실 역시 나에게는 고급 호텔로 느껴졌고 한국 책도 읽을 수 있었다. 벽에는 낙서가 있었는데 ‘자유민주주의 세상으로-신의주 김아무개’등이 적혀 있었고 이 모든 정황으로 보아 내가 한국으로 보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45일이 지났을 때 나는 다시 KBS 방송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진으로 보내진 나는 다른 탈북민들과 합류해 비행기로 북경에 호송되었고 그곳에서 다시 연길로 가서 결국 용정구류소에서 북송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 후 탈출만을 생각하고 운이 좋았기에 다시 북한을 탈출할 수 있었고 목숨을 걸고 몽골행을 시도한 결과 이렇게 남한에 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KBS 의 안내 방송을 따라간 것이 아니었다. KBS 방송에 따라 행동했는데 대사관에서 냉대받았고 홍콩에서 체포되어 북한으로 압송된 것 아닌가. 방송에 따라 행동하다 죽을 뻔했다는 말이다. CNKR 조사연구부 http://www.cnkr.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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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297 | 사과문|10| | 2004-06-30 | 이서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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