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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23세의 앙콜 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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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23세의 앙콜 방송 :
평화 tv 는 지난 사순절과 교황 주일을 맞이하여 교황 요한 23세 의 일대기를 방영하였습니다. 교황 요한 23세는 평화의 교황이라 일컬어지며,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교회 내부 쇄신과 변화에 많은 공헌을 하셨습니다. 그 제목은 "평화의 교황 요한 23세 : Pope John 23rd, the Pope of Peace" 이었습니다. 그의 본 이름은 안젤로 쥬셉페 론칼리 Angelo Giuseppe Roncalli (1958.10.28 즉위 - 1963.6.3. 서거) 이었습니다. tv 는 쉬지 않고 장장 3시간 20분을 방영하였습니다.
안젤로는 어린이 시절 신학교에 가고 싶었으나 농사를 짓는 간난한 농촌 가정에서는 안젤로를 신학교에 보낼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가 의기 소침해 있을 때에 이 이야기를 들은 삼촌은 안젤로에게 "왜 신학교에 가고 싶은가" 라고 물었습니다. 안젤로는 "나를 부르는 것 같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삼촌은 이 말을 알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 내가 돈을 대겠다. 수업료와 책값 구두까지 사주겠다고." 당시 이타리아 시골 농촌에서는 30 리라는 큰 돈이었나 봅니다.
안젤로는 집을 떠나 마차를 타고 가족들, 그리고 삼촌의 전송을 받으며 신학교로 갔습니다. 사제가 된 안젤로는 고향 Bergamo 교구의 주교님 의 비서로 근무했습니다. 이 때 이지역 근로자들의 항의 데모가 있었습니다. 근로자는 하루 14시간 노동에 시간당 7 센트의 임금을 받고 일 했습니다. 주교님은 이 노동자들을 이해 하셨교 안젤로는 구속된 여인의 어린이를 수녀원으로 데리고 와서 보살피게 하였습니다.
이 교구 주교님에 대한 조사는 교황청으로 보고되었습니다. 교황 비오 10세는 이 문제는 지역의 문제라고 판단하시여, 이 문제는 더 이상 확대 되지 않았습니다.
세계 1차 대전시, 1915년 Karst 에서의 전쟁을 목격하였습니다. 안젤로는 교황청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1925년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안젤로를 부르시고 그를 불가리아 교회로 보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젤로는 자기는 적격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황성하는 안젤로를 적격자로 보셨습니다. 그를 주교로 임명하시고 그를 불가리아의 sofia임지로 보내 셨습니다.
불가리아는 정교회 국가이고 가톨릭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 니다. 성당에는 난로도 제대로 못 때는 그리고 직원도 없고 사제 만이 있는 그런 열악한 화경의 교회이었습니다. 이때 이지역에 지진이 발생하여 인근의 정교회 성당이 파괴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론칸리 주교(안젤로)는 수레에 빵을 싣고 그 현장에 달려 가서 그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었습 니다. 그런데 가톨릭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일부 정교회 신자 가 돌을 들고 주교님께 욕을 하며 던질듯 하였습니다. 론칸리 주교는 "죄 멊는 사람이 먼저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 을 들은 정교회 사제가 돌을 든 사람을 말리며 주교님께 인사하고 주교님도 인사하고 이렇게 두 교회 지도자들은 화해 를 하였습니다. 론칼리 주교님은 성당 북구비용으로 1200리라 라는 큰 돈을 지원해 주었고 이로 인하여 정교회는 성당을 복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로 하여 교구 재정에 어려움이 생겼고, 주교님은 후임자 에게 맡기고 떠났습니다. 이 때 정교회 신자들은 마차를 타고 떠나는 주교님을 양 줄로 길게 나란히 서서 양손에 촛불을 들고 주교님을 전송하였습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정교회의 슬리피 사제는 "형제애를 알게 되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1944년 론칼리 주교님이 터키. 이스탐불의 교황대사 시절이었 습니다. 일단의 유다인들이 기차편으로 독일을 탈출하여, 중립국인 터키 이스탐불에서 독일군에 의해 강제 정차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론칸리 교황대사는 현장으로 갔습니다. 그는 여기서 차속에 갇혀있는 유다인들을 보았습 니다. 지날 때에 한 여성이 론칼리 주교님께 가톨릭 사제 이신가 물었습니다. 고개를 끄떡하셨습니다. 그녀는 수용소의 약도를 건네 주었습니다. 주교님이 미사를 드리시는 성당에 독일군 대장(대령) 과 제3국의 대사가 함께 와서 주교님을 면담했습니다... 제3국의 대사는 가톨릭 신자였고 그는 주교님을 조용한 터키식 식당으로 주교님을 초대하여 주교님 께 hitler 의 잘못을 말하고 바티칸의 지지를 부탁했습니다. (이 대사는 독일에 협조했으나, 전후 유런베르크 재판에서 이 때의 일로 인해, 론칼리 대주교님의 도움으로 석방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론칼리 주교님은 기차역으로 갔습니다. 이 유다인들은 터키 다르소에 있는 사도 바오로의 집을 순례하기 위하여 여행중이고 독일 주교님이 이를 허가 했다는 말을 독일군 대령은 믿지 않았습니다. 이 때 그 제3국의 대사가 역으로 들어와 그 독일주교님의 허가서는 사실이라고 확인해 주었 습니다. 독일군 대령은 내키지 않았으나 기차의 통과를 허락하였습니다. 이 때 차안의 유단인들의 환성은 대단했습 니다.그 유다인 여인은 론칼리 주교님께 감사를 표시하였고 그 표시로 유다인의 상징인 6각형 별패을 선물하였고 론칼리주교님은 답례로 묵주를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1945년 드골 장군은 30명의 주교님들을 추방하려고 하였 습니다. 교황 비오 12세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하여 론칼리 대주교님께 위임하셨습니다. 대주교님은 부적절하다고 사양하였으나 이를 받아 들었습니다. 론칼리 교황대사는 드골 장군에게 면담을 요청하였으나 거절 당하였습니다. 교황대사님은 꾀를 내셨습니다. 교황대사관에서 (드골 장군을 위한?) 파티를 열었는데 푸랑스에서 최고의 요리 사를 고용하여 그 파티를 성황케 하였습니다. 여기 한 장면이 있는데 소련대사가 푸랑스 정부는 교황대사관에 최고의 요리사를 보내며 호의적이라 말하고, 론칼리 대사 님도 숙녀들을 만나 보시라고 얄궂은 소리를 하였습니다. 론칼리대사는 자기가 숙녀를 만나면 사람들이 당신을 쳐다 보기 때문에 (안된다?) 고 응수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했음인지 드골장군은 30명의 주교 추방을 중단하였 습니다.
론칼리대주교는 외교적 성과를 올리셨습니다. 이분은 후에 베니스의 총대주교님이 되셨고 추기경님이 되셨 습니다.
--다음은 교황 선거 부터 시작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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