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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탈북민증언] 탈출과정 여성피해 더 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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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명구 [hmk12] 쪽지 캡슐

2004-07-20 ㅣ No.69043

탈출과정 여성피해 더 심각  



김미란 (가명·29) 2003년 7월 입국

여성으로서 북한에서 보위부관리를 하였지만 살기가 어려워져 하얼빈에 있는 이모집으로 국경을 넘어 도착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 보위부가 나를 찾아 이모집까지 찾아왔다. 나는 급히 심양으로 피했고 한인교회의 도움으로 교회 내에서 머물렀다. 얼마 후 교회에서 브로커를 소개해 주었고 나는 이들을 따라 한국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브로커들은 3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조선족이었다. 이 들의 일은 위조 신분증을 우리에게 만들어 주고 한국영사관으로 데리고 가서 정확한 시점에 안으로 진입시키는 것이다. 브로커가 이 일을 하면서 받는 돈은 한국 돈으로 1인당 700만~800만 원이다. 이 돈은 우리가 한국으로 가서 정착금을 받으면 지급하기로 계약을 한다. 중국에서는 조선족 여자를 한국으로 보내 국제결혼을 시켜주는데 수수료가 1,000만~1,500만원이라고 한다. 우리를 보내는데는 남한 내 조직도 필요 없고 서류도 필요 없으니 금액이 비교적 저렴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200만~300만 원이 소요되었다고 들었는데 그에 비하면 말도 못하게 오른 금액이다. 이들 브로커는 나에게 자신들은 지금까지 500명을 한국으로 보냈고 자신 있다고 하였다. 그들이 하는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어찌하겠는가. 희망이라고는 그들밖에 없었다.


수십일 동안 은신하다 영사관 진입에 성공

  20일 동안 살피면서 심양의 영사관에 진입할 계획을 세웠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북경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하지만 북경으로 가는 것 역시 위험한 일이다. 북경 행 열차 내에서의 검열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숫자는 탈북민 7명 그리고 브로커 2명까지 합하여 도합 9명이었는데 4명과 5명으로 조를 나누어 다른 날에 열차를 타고 출발하였다. 북경에 도착하여 기다리는 인원과 합류하니 탈북민수만도 19명이 되었다. 브로커들은 우리들을 북경 변두리 아파트에 몰아 넣었다. 방은 컸으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데도 나가지 못하고 수십 일을 한곳에 머문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신경이 점점 날카로워졌고 급기야 싸움도 일어나게 되었다.

  여자로서 밝히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그렇게 함께 몰려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성폭행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남한사람들은 잘 믿지 못할 것이다. 브로커들이 요구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허락하여야 하는 상황이다. 우리는 약자이고 밖으로 쫓겨 나가면 공안에 잡혀가 북송되고 만다. 북송은 그냥 북송인가. 여자로서 갖은 수난을겪고 북송되는 것이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중국 땅 내에서는 전혀 법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우리가 중국에서 자유로이 다닐 수 있고 한국 영사관에 당당하게 들어가 이주신청을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이런 수난의 굴레로 빠져들어 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일을 무릅쓰는 것은 그래도 이것이 북한에 잡혀 들어가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브로커들은 아파트가 너무 시내에 가까이 있어 위험하다며 외곽의 농촌지역에 집을 마련하였는데 아무래도 농촌지역이 월세가 싸게 먹혔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몇몇이 이탈하였다. 브로커들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내 쫓았다. 우리는 12명으로 줄었는데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많았다.

  북경에서는 45일씩이나 대기하여야 했다.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는 것이었다. 영사관 진입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순찰차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 순찰차의 번호는 110호. 아직도 한국영사관과 주위외국공관 경비업무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순찰차는 시간에 따라 한국영사관과의 거리가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리 눈에 보일 정도로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이 차량이 가장 멀리서 가장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포착하여야 한다.

  처음에는 남아 있는 12명이 동시에 진입하려고 했으나 위험 부담 때문에 ‘소규모 부대 작전’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2002년 12월 27일에 7명으로 된 첫 조가 진입에 성공하였다. 우리 5명의 차례는 2003년 1월 9일에 왔다. 간단한 개인 물품을 챙기고 탈북민 티가 나지 않게 깨끗한 옷을 갈아 입고 영사관을 향해 떠났다.

  북경의 한국영사관 입구는 2중으로 되어 있다. 1차 검문에서는 신분증만 보여주면 통과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준비해 둔 위조 중국 신분증을 제시하고 통과하였다. 하지만 두 번째 관문에서 경비는 우리에게 영사관을 방문한 목적이 무엇이냐고 중국말로 묻는다. 우리는 어물거리게 되고 경비는 컴퓨터에 입력하고자 우리로부터 신분증 제시를 요구한다. 바로 여기서 태어나서 축적하였던 모든 힘을 다해 밀치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앞에는 여자 3명이 섰고 남자들은 뒤에 섰다. 남자들이 뒤에서 밀기로 하였다.

  줄을 서서 들어가는 척 하다가 갑자기 뒤에서 후닥닥 밀어 붙였다. 맨 앞에 있던 진숙이가 순간적으로 밀려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탈북민 남자가 공안을 냅다 메쳤다. 순식간에 경비소는 비명과 욕설과 사이렌소리로 뒤섞이고 몸싸움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내 뒤에 섰던 정미는 나보다 빠르게 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중심을 잃고 넘어지던 공안의 손이 더럭 정미의 웃옷 덜미를 낚아채었다. 정미의 움직임이 순간 둔해지면서 상체가 뒤로 당겨졌다. 순간이었지만 공안의 아귀에 너무 힘이 들어가 옷을 움켜쥔 주먹이 하얗게 된 것이 보였다. 잡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정미는 날쌔게 팔을 뒤로 뻗었다가 쫙 당기면서 웃옷에서 자신의 몸을 빼내었다. 정미의 옷이 벗겨지면서 공안은 중심을 잃으며 허공에 손을 저으며 넘어졌고 정미는 빨려 들어가듯이 영사관 공터로 들어갔다.

  성공이었다. 우리 모두 영사관 영역으로 진입에 성공한 것이다. 우리는 남아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영사님, 살려주세요.” 그러자 상황을 다 알고 있지만 영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체 하면서 나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우리 북한사람들 이예요. 남한으
로 보내주세요!”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공안이 우리를 따라들어 왔다. 영사는 그들에게 손을 저으며 정중히 공안에게 이곳은 한국 영역이니 나가 달라고 부탁하였다. 공안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기괴한 얼굴 표정을 지으며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살았다.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며 숨어살던 중국을 탈출한 것이다.

/CNKR조사연구부  http://www.cnk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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