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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지 모를 영혼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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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요하 [jiyoha] 쪽지 캡슐

2004-08-08 ㅣ No.69709

 

                                                   누군지 모를 영혼들을 위하여




(1)

지난해 팔순을 지내신 내 노모께서는 매일 묵주기도를 기본적으로 15단씩 하신다. 당신 스스로 정해 놓으신 매일의 의무이다. 그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어머니 자신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략 2, 30년은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대개 이른 아침에 기도를 하신다. 당신 방의 기도상 앞에 앉아 촛불을 켜놓고 하신다. 또 대개는 앉은자리에서 묵주기도 15단을 내처 하시지만, 깜빡 늦잠을 잔 날이라든가, 거의 빠지지 않는 아침미사에 가시는 날은 15단을 다 채우지 못하고 일어서는 경우도 있다.

그런 날은 아침식사 후에라도 기도를 해서 묵주기도 기본 15단을 반드시 오전 안에 다 채우신다. (이 기본 15단에다가 평일미사에 가실 때마다 미사 전에 공동으로 하는 성전건립을 위한 묵주기도에 참여하시고, 매주 목요일 오전의 레지오 쁘레시디움 주회에 참석하시면 또 5단을 하고, 가령 출타를 하실 때는 내 승합차나 버스 안에서 계속 묵주를 손에 쥐고 계신다. 그래서 쉽게 100단을 넘기는 날들도 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른 아침 묵주기도 전이나 후에는 아침기도와 삼종기도 뿐만 아니라 성월기도, 사제를 위한 기도, 수도자들을 위한 기도, 세상 떠난 이들을 위한 기도에다가 가정을 위한 기도까지 하시니 기도 시간이 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머니가 하시는 갖가지 기도들은 대부분 외워서 하시는 기도들이다.

나는 어머니가 앉은자리에서 갖가지 기도와 묵주기도 15단을 내처 다 하시는 것을 보면 다시금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노인네가 허구헌 날 같은 기도를 1시간 이상씩 하면서도 지겹지도 않은가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나는 지금까지 앉은자리에서 단독으로 묵주기도를 내처 5단 이상 해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부터 5단을 해본 적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5단 이상을 해본 적은 전혀 기억이 없는 것이다.

어머니처럼 앉은자리에서 혼자 묵주기도를 15단이나 할 자신이 내겐 없다. 하자면 할 수는 있겠지만 필경 중간에 졸음과 무진 싸우다가 끝내는 모로 쓰러질 확률이 크다. 사실은 5단을 하면서도 졸음과 싸우고, 쉽사리 포기를 한 적도 많다.

어머니처럼 앉은자리에서 혼자 묵주기도를 1시간 이상 내처 할 수 없는 내 '약점'을 깊이 의식하게 되면서 나는 백화산 등산길의 묵주기도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 세월이 아마 20년은 되었지 싶다. 백화산을 거의 매일같이 지속적으로 오르기 시작한 때는 내 당뇨를 안 1998년부터지만….

내 차를 갖지 않고 주로 버스를 타고 먼길을 다닐 때는, 청년 시절부터 버스 안에서 묵주기도를 하기 버릇해왔다. 그래서 버스 안에서 전교를 한 적들도 있고, 한 개신교 청년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잠시 교리논쟁을 벌인 적도 있다. 그처럼 버스 안에서 묵주기도를 많이 한 오랜 전력이 있기 때문에 등산길에 좀더 쉽게 묵주를 손에 쥐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지난해부터는 시내를 걸어다닐 때도 손에 묵주를 쥐고 다닌다.)

백화산 등산길의 묵주기도에 신경을 쓰게 되면서 나는 어머니의 묵주기도 하루 기본 15단을 쉽게 상회할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처럼 앉은자리에서 내처 묵주기도 15단을 바치지는 못하지만, 백화산을 오르고 내리며 15단 이상을 무리 없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흥겨웠다. 등산길의 묵주기도는 정말 재미있다. 기도에 열중하다 보면 숨이 가쁜 힘든 지점도 어려운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며 통과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색다른 명상의 세계로 빠져들기도 한다.


(2)

우리 고장(충남 태안)의 명산 백화산은 높이가 284미터밖에 되지 않는 별로 크지 않은 산이다. 하지만 남문리 동문리 상옥리 어은리 산후리 삭선리 등 6개 리에 걸쳐 있고, 그만큼 등산로로 많다. 내가 아는 등산로만도 여덟 개나 된다.

나는 올해부터는 이 여덟 개의 등산로 중에서 네 개 정도의 등산로를 번갈아 밟고 있다. 거의 매일같이 등산을 하면서 등산로를 바꾸는 것에서 색다른 기분을 느끼곤 한다. 옛날 남문리 집에서 살 때, 그러니까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에 주로 올랐던 추억 어린 길을 지난해 여름 무려 30여 년 만에 다시 밟아보면서, 그 사실에 경탄을 하기도 했다.

여러 개의 등산로를 날마다 바꾸어 산을 오르지만, 내려올 때는 우리 집 뒤쪽으로 곧바로 내려올 수 있는 중봉재 코스를 택하곤 한다. 이 중봉재 코스는 사실 내가 가장 많이 밟은 길이기도 하다.

다른 길로 올랐다가도 내려올 때는 반드시 중봉재 코스를 택하는 데는 특별한 까닭이 있다. 그 길이 우리 집 뒤쪽으로 곧바로 내려오는 길이기도 해서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 중봉재 코스에는 내가 오를 때나 내릴 때나 반드시 멈추어 서서 땀을 식히는 지점이 있다. 길과 거의 평면을 이루고 있는 비교적 큰 바위인데, 그 바위를 딛고서면 동쪽으로 건너편 산자락의 전체가 훤히 보인다. 그리고 그 산자락의 곧바로 보이는 지점에는 무덤 하나가 있다. 또 그 산자락의 기슭쯤에도 무덤이 있다.

나는 그 지점에 이르면 반드시 멈추어 서서 건너편 산자락의 무덤들을 보며 기도를 한다. 처음에는 그 두 지점의 무덤들이 하나씩인 줄 알고 그 무덤들을 바라보며 성모송과 '구원을 위한 기도'를 한 번씩만 했었다. 그런데 지난해 가을 그 건너편 산자락의 등산로를 처음 밝아보았을 때 중턱에 있는 묘는 부부 합장 묘임을 알 수 있었고, 기슭쯤의 묘는 두 동인데도 멀리에서 보는 내 눈에는 하나로만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그 묘들을 바라보며 하는 성모송과 구원을 위한 기도를 도합 네 번씩 하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한 번씩을 더 하는데, 그것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백화산 안의 모든 묘들의 주인들을 위해 바치는 기도이다.

나는 백화산 중봉재 코스의 그 쉬는 지점에서 바라보이는 건너편 산자락의 그 묘들이 언제부터 거기에 있게 되었는지, 누구네 묘인지 따위를 전혀 모른다. 그 묘 안에 잠들어 있는 이들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은 이들인지는 더욱 모른다.

그러니 그 묘들의 주인들은 생전에 나와는 전혀 아무런 인연도 없었던 이들이다.

하지만 그 묘 안에 잠들어 있는 이들은 오늘 나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천주교 신자인 내가 묵주를 손에 쥐고 거의 매일같이 백화산을 오르므로, 그리고 내가 쉬는 지점에서 그들의 묘를 보게 되었으므로, 그리하여 내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으므로 매우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인연이 이승과 저승 사이에 맺어지게 된 것이다.

나는 그것도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인연은 산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그런 식의 인연도 매우 중요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도 백화산의 중봉재 길에서 건너편 산자락의 묘들을 바라보며 그 묘 안에 잠들어 있는 이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 그들이 어쩌면 저 연옥 속에서 다만 한 방울의 물 같은 것일지도 모르는 내 기도의 덕을 오늘도 입으리라는 것을 믿는다. 그 믿음 때문에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거기에 하느님의 안배와 은총이 존재함도 믿는다. 그 믿음 때문에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매우 드문 경우지만 바쁜 시간 사정이나 다른 특별한 일 때문에 그 지점을 거치지 않고 산을 내려가는 때도 있다. 그때는 내 가슴속에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생겨난다. 그 묘 안의 영혼들이 적이 섭섭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정말이지 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서 그 지점을 찾지 않거나 그냥 지나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잠시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건너편 산자락의 무덤들을 보며 그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은 마치 하나의 의무처럼 되어 버렸다.

기도는 모든 믿는 사람들의 중요한 필요 덕목이고 의무이기도 하다. 기도는 나누는 것이기도 하고, 나누는 것이라면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내가 오늘도 절대자의 존재를 믿고 절대자를 향해 기도하며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 거의 매일같이 백화산에서 건너편 산자락의 묘들을 보며 누군지 모를 그 영혼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사실, 그렇게 내 기도를 저승의 그들과도 나눈다는 사실에서 무한한 행복감을 얻는다.

오늘의 이 행복감으로 절대자가 마련해 놓으신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며, 오늘도 묵주를 손에 쥐고 백화산을 오를 것이다. 저 피안의 정토, 우리의 본향을 향하여…. *


(040807)
충남 태안읍 샘골에서 지요하 막시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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