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2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자유게시판

서한규님...

스크랩 인쇄

이윤석 [animation] 쪽지 캡슐

2004-08-19 ㅣ No.70188

오랫만입니다...

 

저는 서한규님이 왜 많은 분들의 진행 중인 글이 아닌 지나간
저의 글에 대해 유독 관심을 갖고서 문제를 짚고 넘어가자는 것인지
잘 이해가 안가지만 일단 글을 주셨으니 답을 드리겠습니다...

 

연산군에 대해 제가
'연산군이 왜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연산군이 되었습니까...?
폭군이었고 백성의 뜻을 저버린 인간이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런 저의 시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요...?

 

뭐가 그리 놀라운 일이었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것은 학교 때 배운 연산군에 대한 일반적 견해이건만
무슨 커다란 오류를 발견하셨다는 듯이 놀라신단 말인가요...?

 

제가 역사를 억지로 왜곡했다는 말씀인가요...?

 

연산군에 대해 제가 얘기한 것은 어릴 때 학교에서 배운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서한규님의 역사공부에 도움이 되시라고 인터넷에서
연산군 검색해서 가져 올테니 참고 하셨으면 합니다...
(제글 맨 아래에다 놓겠습니다...)

 

아무튼 서한규님이 제게 문제를 제기하신 뜻은 역사에 대해
똑바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긍정적인 뜻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노재성씨에게 답변글로 달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으시고 타겟도 저에게만 향했다는 점이
조금 찜찜하기는 합니다...

 

님이 역사에 대해 예민하게 올바른 시각을 요구하신다면
노재성씨가 얘기한 부분에 대해서 더 문제제기를 하셔야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노재성씨는 폭군도 역사고 친일도 역사고 독재도
역사이기 때문에 흘러가는대로 나둬야 한다는
생각의 요지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작성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글을 이곳 가톨릭 굿뉴스게시판에 퍼왔을 때는 자신의 생각이
그 글에 공감하기 때문인 것이고 자신이 퍼온 만큼 스스로 책임도
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노재성씨가 퍼온 글에서
'신기남은 자기 아버지가 반민족헌병오장출신이라는거 알면서도 자신의
안위와 출세를 위해서 숨기고..거짓말하고.
반민족특위에서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를 다시 또 죽이고....
이제 노무현한테도 팽 당하고
역사란 바로잡는것이 아니라....흘러가는것이다'
라고 써 있습니다...
(제 의견을 간단히 적겠습니다... 신기남씨가 부친에 대해 밝히지 못한 것은
분명 부끄럽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부친에 대한 존경심도 당연히 있겠지만
부친이 행한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스스로 고통스러웠다는 증거 아닙니까...?
그리고 반민족특위에서 아버지를 다시 또 죽인다는 말이 과연 상식을 가진
인간의 입에서 나온 말일까요...? 노무현한테 팽 당한다는 말과
역사란 바로 잡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이다라는 말을 님이
공감하시겠습니까...? 거짓과 왜곡이 뻔히 보이지 않습니까...?)
 

서한규님은 분명 저의 작은 역사 얘기에 대해서도 혹시 아닌것 같다는
생각만으로 놀랍다는 오바 표현까지 하시며 지적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분명 역사는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죠...?

 

최소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한규님은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 것이죠...?

 

그렇다면 저런 글에 대해서 더 분개하셔야 하는거 아닐까요...?

 

진정 국민이라면 조국의 역사를 바로 알고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연산군에 대한 몇 단어에 놀라지 마시고 지금 이시간에도 망령들에 의해
왜곡되어가고 있는 매국과 반역의 역사에 놀라주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밑의 글은 제가 네이버에서 퍼왔습니다...

 

제가 얘기한 연산군은 폭군이고 백성의 뜻을 저버렸다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다는 건지요...?

 

@@@@@@@@@@@@@@@@

 

연산군
■ 1476∼1506
■ 조선 제10대 왕
■ 재위 1494∼1506
■ 휘는 융

 

1. 불운한 출발
조선 제10대왕으로 휘는 '융'이다. 성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로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 뒤에 11대왕이 된 중종이 있었으나,

1483년(성종 14)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에 중종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라 그의 무도함

을 알면서도 그냥 세자로 삼았다 한다.

 

그리하여 1494년 12월에 성종의 승하와 함께 왕위에 올랐는데, 재위 12년 동안 너무도 무

도한 짓을 많이 하였으므로 폐위, 교동(喬桐)에 안치되어 있다가 그 해 11월에 죽었다.

15대 광해군과 함께 조선시대 두 사람의 폐주 (廢主) 가운데 한 사람이며, 따라서 《선원

계보 璿源系譜》에도 묘호와 능호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의 재위기간의 실록 역시 《연산군일기》로 통칭된다.

 

실록 첫머리에 있는 사평(史評)도 그의 일기에서는

“……만년에는 더욱 황음하고 패악(悖惡)한 나머지 학살을 마음대로 하고, 대신들도 많

이 죽여서 대간과 시종 가운데 남아난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포락 (烙: 단근질 하기),

착흉(胸: 가슴 빠개기), 촌참(寸斬: 토막토막 자르기), 쇄골표풍(碎骨瓢風: 뼈를 갈아 바

람에 날리기) 등의 형벌까지 있어서……”

 

운운하는 말로 되어 있을 만큼 그는 조선조의 대표적인 폭군이었다.

 

같은 폐주라 하더라도 광해군에 대해서는 사고(史庫)의 정비라든가 성지(城池)·병고(兵

庫)의 수리, 또는 대륙정책에 있어서의 현명하였던 외교정책 등을 들어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수도 있지만, 연산군은 이러한 긍정적 요소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왜인과 야인의 입구(入寇)를 의식한 끝에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하였다든

가, 또는 변경지방에로의 사민(徙民)의 독려, 기타 《국조보감 國朝寶鑑》, 《여지승람

輿地勝覽》 등의 수정 등 치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무도하기 이를 데 없던 폐

정(弊政)에 비긴다면 보잘 것 없는 일인 것이다.

 

2. 사화의 시작

그런데 즉위 초에는 아직 전조(前朝)의 치평 기운이 남아 있고 또 인재와 사림이 성한 가

운데 어느 정도의 질서는 유지되고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4년째부터는 드디어 패

악한 본성이 나타나기 시작, 5∼6년 동안에 두 차례나 큰 옥사를 일으켜 많은 사류(士類)

를 희생시키는 참극을 벌였다.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와 1504년의 갑자사화가 그것이다. 이 두 사화는 물론 당대

정계의 난맥상 속에서 생겨났던 것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또한 연산군 개인의 성품이

많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에도 문제는 있었다. 무오사화는 《성종실록》 편찬 때 그 사

초 중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견됨으로써, 이에 관련되었던 사림

학자들이 많이 참화를 당하였던 사건이다.

 

그러나 이때 그렇게 많은 사류들을 희생시키게 되었던 것은, 본래 학자들을 싫어하는 연

산군의 성품을 이극돈 (李克墩) 등 훈구 재상들이 교묘히 이용, 그들의 정쟁에 이용하였

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갑자사화도 결국은 연산군의 사치와 향략 때문에 그토록

큰 옥사가 벌어졌던 것이라는 측면이 더 큰 비중을 가진다.

 

즉, 그의 방탕한 생활에서 오는 재정난을 메우기 위하여 훈구 재상들의 토지를 몰수하려

는 기미가 보이자, 그들은 왕의 이러한 횡포를 억제하려 하였고, 그리하여 여기에 또 한

번의 사화가 벌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화의 직접적인 구실은 물론 생모 윤씨의 폐비

사건으로 소급이 되지만, 이 역시 그의 포학한 성품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어쨌든 이 두 사화의 양상은 모두가 참혹을 극했던 것으로서, 김종직의 경우는 부관참시(

剖棺斬屍)하였고, 폐비 당시의 두 숙의(淑儀)는 타살을 하였으며, 할머니인 인수대비(仁

粹大妃)도 구타, 치사하게 하였고, 기타 윤필상 (尹弼商), 김굉필(金宏弼) 등의 사형을

필두로, 한명회(韓明澮), 정여창 (鄭汝昌)도 모두 부관참시를 당하는 등, 패륜과 무도함

을 극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3. 폐정의 원인

학자에 따라서는 그가 그토록 광포하고 난잡스런 성품을 가지게 된 동기를 주로 생모를

잃었던 사실에서 찾으려는 경향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비교적 체통을 유지하고 있는 실

록 《연산군일기》에서도, 그는 원래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자

질이 총명하지 못한 위인이어서 문리(文理)에 어둡고 사무능력도 없던 사람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하여 당시의 정계와 연산군과의 사이에는 부지불식간에 갈등이 일어났고, 여기서 그

는 문신들의 직간(直諫)을 귀찮게 여긴 끝에 경연과 사간원·홍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

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을 하였으며, 기타 온갖 상소와 상언·격고 등 여론과 관

련되는 제도들도 모두 중단시켜버렸다.

 

당시로서는 가장 패륜스러운 일로 생각되던, 이른바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는 단

상제(短喪制)를 단행한 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성균관·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

고,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천사(興天寺)도 마굿간으로 바꾸며, 민간의 국문투서사건을

계기로 한글의 사용을 엄금한 일이 있고, 기타 이러한 조치들과 관련되었던 이야기들이

무수히 많다.

 


4. 중종반정과 몰락

어쨌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심은 소란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1506년(연산군 12) 9월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등의 주동으로 연산군 폐출운동이 일어

남과 함께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이 옹립되니 이것이 곧 중종반정이었다.

묘는 양주군 해등촌(海等村: 지금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데, ‘연산군지묘

’라는 석물 이외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

성종실록 기사에는 보여지지 않는 성종의 이면. 바로 그는 호색한 중의 한명이었다는 점

이다.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은 조선을 대표하는 폭군 중에 한 명이다. 채홍사나 청홍사를

조직하여 전국의 미녀들을 궁중에 모아놓은 것만도 부족해서, 자기 큰 어머니인 월산대군

의 부인마저 찾아갔고, 궁중 밖 민가가 가깝다고 주민들을 이사시키고, 사냥터 만든다고

주민들을 멀리 이주시키기까지 한다. 희대의 폭군인 연산군은 그 어머니인 폐비 윤씨를

닮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아버지 인 성종을 닮아서 그랬다는 부전자전에 더 힘을

주고 싶다.



175 9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