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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 신부 “서른살 예수처럼 공적사명은 지금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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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가 온나라를 동토(凍土)로 몰아가던 1974년 한줄기 횃불로 나타난 이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6·10항쟁, 문규현 신부 방북 등 우리 사회의 격변기 때마다 활화산의 기운을 불어넣던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이 지난달 26일로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74년 당시 총무로서 사제단의 출범을 주도했고, 지금은 고문으로 30주년 기념행사준비에 바쁜 함세웅 신부(62·서울 제기동성당 주임)를 성당 안에 있는 사제관에서 만나 ‘사제단 30년사’에 얽힌 얘기를 들어보았다.
함세웅은 사제단의 나이 서른 살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비유해 그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예수님께서는 서른 살이 돼서야 비로소 공적인 삶을 시작하셨다”면서 “이전의 30년 세월은 준비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제단도 30년의 준비기간동안 열심히 밭을 갈고 씨를 뿌렸는데 이제 알알이 맺은 열매를 잘 가꾸고 수확하는 시기로서 30주년을 맞고 싶다는 것이다.
- 74년 지학순주교 구속 계기로 창립 -
사제단 결성의 구체적 계기는 74년 7월6일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가 김포공항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은 사건이었다. 당시 ‘거물 시국사범’이던 김지하 시인에게 도피자금을 제공한 배후조종자로서 지주교를 지목하고 있던 중앙정보부는 외국출장에서 돌아오는 그를 공항에서 연행했다. 함세웅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젊은 신부들은 곧바로 철야기도회를 갖고 제1차 행동에 돌입했다. 로마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지 1년 된 서른두 살의 청년 사제 함세웅은 서울 응암동성당 주임신부로 있었다. 그는 “그때의 요구사항은 지주교 석방에 머물러 있었고 우리의 의식이나 행동반경도 유신헌법에 전면적인 이의제기를 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주교는 김재규 중앙정보부 차장의 주선으로 이뤄진 박정희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의 만남을 통해 4일 만에 풀려났지만 연금상태에서 ‘유신헌법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격적인 양심선언을 발표했다. 결국 지주교는 박정권이 조작한 최대 공안사건인 ‘민청학련’ 사건으로 학생·개신교 목사 등 203명과 함께 구속됐다. 함세웅은 “이 사건은 교회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 잠자고 있던 젊은 사제들을 흔들어 깨워 세상의 복판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야 하는 사제 본연의 자리로 밀어넣었다”고 말했다.
원주에 집결한 사제들은 가톨릭대 교수로 있던 박상래 신부를 대표로, 함세웅을 총무로 뽑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기도하는 사제들’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사제 일동’ 등으로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붙였던 단체의 명칭도 ‘정의구현사제단’으로 통일했다. 함세웅은 “당시 ‘민주화’ ‘인권회복’ 등의 명칭도 거론됐으나 하느님의 1차적 속성이 ‘의로우신 하느님’이고 민주화 등이 상대화될 수 있는 개념인 데 비해 정의는 불변의 가치가 있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사제단의 창립선포 및 제1차 시국선언의 D데이는 한국천주교 순교자 대축일인 9월26일(80년 시성시복 이후 9월20일로 바뀜)로 잡았다. 신앙을 위해 목숨을 버린 순교자들의 정신으로 나아가겠다는 다짐에서였다. 명동성당에서 저녁 미사를 마친 사제들은 ‘유신헌법 철폐’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함세웅은 “교회 문밖으로 나갈 때 그 무시무시한 유신체제와 정면대결을 한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두렵고 떨렸지만 우리의 대오를 향해 시민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는 것을 보고 큰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세상을 향한 사제단의 행업(行業)이 본격적인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 70·80년대 민주화 고비마다 횃불역할 -
사제단이 자유언론 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당시의 젊은 기자들 덕분이었다. 사제단이 시위를 할 때면 기자들은 ‘언론인 각성하라는 구호도 외치시라’고 ‘코치’를 했고 기자회견때 기자를 사칭하며 ‘침입’하는 기관원들을 색출해 내쫓는 일도 기자들과의 ‘공조(共助)’ 때문에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사제단의 활동을 1면 사설 등으로 맹렬히 비난하던 조선일보와 자유언론을 외치던 수백 명의 기자들을 내쫓은 동아일보 등 이른바 ‘민족지(民族紙)’의 실체를 인식하게 된 것도 기자들을 통해서였다.
함세웅이 사제단 활동을 통해 결코 잊을 수 없는 ‘영원한 동지’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에서 은폐조작사실을 폭로했던 고 김승훈 신부다. 함세웅의 신학교 3년 선배인 김신부는 호방하고 따뜻한 성품을 지녀 사제단의 후배신부들은 ‘단장님’으로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함세웅은 “사제단 창립 30주년을 맞아 새삼 그분이 차지했던 자리가 커 보인다”고 말했다. 함세웅에게 있어 또다른 은인은 브라질 빈민운동의 대부이자 ‘정의·평화의 사도’라는 영광스러운 별칭을 얻은 고 헬더 카마라 대주교다. 함세웅은 “주교님의 저서를 읽으면서 큰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함세웅이 즐겨 인용하는 헬더 카마라 대주교의 어록은 ‘한 사람만 꿈을 꾸면 꿈에 지나지 않지만 모든 사람이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이 절정에 이른 80년대 중반, 당연히 사제단의 활동도 가장 치열했던 그 시기에 그들이 세상에 내놓은 성명서와 선언문 등 갖가지 문건이 문득 생각났다. 일선 경찰서에 출입하던 새내기 기자로서 자주 접했던 사제단의 글은 다른 재야단체의 그것들과는 주장하는 바는 대동소이할지라도 문체(文體)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철저한 경어체와 구어체로 쓰인 그 글들은 부드럽고 아름다우면서도 결코 문약(文弱)으로 흐르지 않았고, 힘차고 강건하면서도 격한 금속음을 내는 법이 없었다. ‘도대체 그 글들은 누가 썼느냐’며 오랜 궁금증을 참지 못해 질문을 던지자 함세웅은 “고정된 필자는 없었고 내부의 토론과 인권변호사들의 법률적 자문을 거친 집단 창작물”이라고 말했다.
지난날과는 크게 달라진 정치·사회적 환경속에서 사제단이 새로이 해나가야 할 일은 교회를 쇄신하고 교회를 복음적 공동체로 만드는 일이라고 함세웅은 강조했다. 그는 “과거 우리가 한 일을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힘있게 하고 있어 우리의 목소리가 작아질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면서 “앞으로 사제단은 교회의 내적 성찰과 함께 북한돕기운동, 환경운동, 미국에 대한 재인식 운동 등을 중점적으로 펼쳐 나가겠다”고 말했다.
현안이 되고 있는 국가보안법 문제에 대해 함세웅은 “인간이 법의 주체이자 목적이 돼야 한다”면서 “십계명조차도 인간 위에 있을 수 없는데 하물며 분열과 적개심을 고취시키는 국가보안법은 당연히 시대착오적 악법”이라고 못박았다. 그는 “이런 법을 일부 종교인들이 끌어안고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 앞으로 교회쇄신·북한돕기 등 중점 -
42년 서울 출생인 함세웅은 65년 가톨릭대학을 졸업했으며 이탈리아 로마 울바노 대학원에서 석사,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제단 활동 외에도 그는 가톨릭대 교수,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인권위원장, 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평화방송 사장 등을 지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보람이 있었던 것은 군사정권시절 서울대교구 홍보국장을 하면서 매주 25만부의 주보(週報)를 발간한 일이다. 함세웅은 “당시 당국의 감시망을 뚫고 부천서 권인숙양 사건과 6·10항쟁 등 제도권 매체들이 제대로 보도하지 못한 수많은 ‘특종’을 터뜨렸다”면서 “경향신문도 이 시대의 횃불이 될 것을 확신한다”고 덕담을 건넸다.
〈손동우 전문위원 sdw@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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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12 | 양대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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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12 | 노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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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스무 살이 되면 생물학적·법적으로는 어른 대접을 받지만,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도덕률을 다져가는 완전한 의미의 성년은 아무래도 서른 살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른바 ‘이립(而立)’도 바로 그런 측면을 강조한 것이 아닌가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