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신비가
인간은 하느님의 신비 속에서 창조되고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를 통해서 성령의 궁전을 이루며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신비로운 삶을 살게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자신 안에서 신비의 체험을 느끼지 못한다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막연한 환상이 아닙니다.
이 신비는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 무엇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성은 인간의 의지와 하느님의 은총 사이에서
수덕생활을 통해서 주어지고 얻어지게 되며
신비주의란 인간적 의지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지에 의해서 하느님의 의지대로 나타나기 때문에
결코 고통과 갈등으로부터 빠져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비가가 되려면 기쁨과 즐거움보다도
오히려 엄청난 고통이 수반될 수도 있습니다.
신비주의는 천성적으로 조용하고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신비주의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소심한 사색가도 아닙니다.
신비가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통해서
영광을 드리는 사람이며 신비가는 관상을 통해서
살아있는 하느님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신비가는 현실과 거리가 먼 상태가 아니라
현실 안에서 하느님과 만남을 이루게 되기 때문에
하느님의 이끄심에 응하는 사람을 신비가라 하겠습니다.
신비가에게는 하느님의 영이 늘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역동성을 얻게 되며 직관적으로 대단함을 나타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하더라도
활동 속에서 하느님의 체험을 느끼지 못한다면
결코 신비가가 될 수 없으며 이런 신비가가 되기 위해선
나의 정체성을 더 착실하게 가지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수덕적인 생활을 가지고 신비체험이라 하지 마십시오.
수덕적인 생활과 신비적인 체험은 엄연히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덕적인 생활을 가지고
신비적인 체험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일도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나타나는 계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환시와 꿈을 계시로 받아드리고
그 계시에 대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는 늘 하느님 당신은 누구시며
또 나는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신비체험적인 하느님의 은총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고
하느님의 거룩한 신비체험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함부로 드러낸다는 것은 곧 자만에 빠져
자신이 우월 주의에 빠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겸손이 다할 때 비로소 인간은 성화의 길로 가게 됩니다.
모든 사물과 창조주에 의해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곧 하느님과 함께 해 나가는 신비체입니다.
그럼으로 인간이 행하는 덕행은 하느님께서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해주는 신비적 친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머물면서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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