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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NP 82달러의 세계최빈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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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택선 [tsjeoung67] 쪽지 캡슐

2004-11-10 ㅣ No.74387


GNP 82달러의 세계최빈국

수입대체냐 수출주도냐, 60년대 초 우리나라는 두 카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었다. 언뜻 보기에 크게 차이가 날 것 같지 않은 두 정책, 그러나 이중 하나에는 한 국가의 명암을 가르는 중요한 열쇠가 포함되어 있었다. 어떤 열쇠를 쥐어야 문이 열릴 것인가? 그 선택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출주도 정책은 한 마디로 위대한 선택이었으며 결코 놓쳐서는 안될 귀중한 카드였다. 우리나라는 귀중한 카드를 쥐기 위한 위대한 선택을 했고 그로 인해 지금 선진국문턱까지 왔다.

61년, 5.16 주체세력들이 빈곤타파를 최우선 정책으로 내세웠을 때만해도 그것은 아득한 환상처럼 느껴졌다. 당시 상황은 1인당 GNP 82달러, 수출 4천1백만 달러로 아시아 지역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외국 자본들이 점점 철수를 하고 5.16 세력에 불만이 많던 미국마저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선언, AID(미국 국제개발국)가 지원하는 각종 미국측 원조자금이 급격한 감소추세를 보이던 시기였다.

혁명정부의 선택은 단 하나였다. 우선 국민으로 하여금 굶주림을 면하게 하자는 것. 원조에 의존하지 말고 우리 힘으로 일어서 보자는 것. 그래서 수립한 것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었다.

60년대 상공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을 지낸 김정렴씨는 제1차 개발계획을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계획안은 1959년에 자유당 정권, 1961년 민주당 정권이 시안작성에 착수했다가 미완성으로 남겨둔 장기 경제개발 계획안을 참고로 하여 서둘러 대폭 수정 보완한 것으로 대단히 조잡한 수준이었다. 계획에 책정된 공장의 대부분은 국내에 아직 설립된 바 없는 신공장 이었으며 관계 공무원은 물론 실업가들조차 외국에 나가 관계공장을 자세히 살펴본 사람이 드문 가운데 소요액이 책정되었다」


국가 원수가 차관 얻으러 외유


이렇게 엉성한 계획안이 짜여진 가운데 행정경험 없는 군인들이 각 부처의 수장 자리를 차지했다. 우리나라 경제를 이끌어갈 상공부 장관으로는 정래혁씨가 임명되었다. 차관으로는 5․16 하루 전날 민주당 정부로부터 임명을 받은 박충훈 차관이 자리를 그대로 유지했다.

『정장관은 경제통은 아니었지만 부하 직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었지요. 최고회의와 마찰이 있을 때마다 정장관이 나서서 잘 막아 주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무슨 배짱으로 서슬 시퍼런 최고회의와 맞섰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로 예산문제 때문이었는데 무조건 깎기만 하는 게 상책이냐, 예산도 없이 맨주먹으로 일하란 말이냐 하는 게 주로 마찰의 요지였죠』

박충훈씨(전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는 당시 가난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이렇게 들려준다. 61년 말에 우리나라 외환보유고는 약 2억달러에 불과했으니 각 부서가 예산문제로 시끄러웠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당시 미국은 우리나라에 대한 윈조를 점차 줄여나가던 중이었는데 일시 적이나마 미국의 마음을 돌리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정장관이 서독에 가서 재정차관 1억5천만 마르크(약3천만 달러)를 얻어 온 것이다. 적지 않은 이 차관으로 질식상태에 있는 우리 경제가 조금이나마 숨통을 틀 수 있었다. 이 일이 미국에 적지 않은 자극을 주어 다시 원조와 투자가 이어지게 되었다. 걸프나 칼텍스 같은 미국 회사들이 그 이후에 다시 발길을 한국으로 돌렸다. 1964년 12월에는 박대통령이 직접 서독에 가서 1천3백50만 달러의 재정차관과 2천6백25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얻어오기도 했다.

1964년에 우리나라가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을 때 이미 일본은 50억 달러를 넘어서고 있었고 태국은 7억3천6백만달러, 필리핀은 4억5천8백만 달러의 수출을 기록하였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도 우리의 다섯배 정도의 수출을 하고 있었다. 남미의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는 우리가 감히 넘보지도 못할 경제성장을 이룩한 시점이었다.

특히 북한은 우리를 훨씬 앞질러 가고 있었다. 남한이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는 동안 북한은 강력한 철권통치 속에서 공업화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도 6․25로 피폐할 대로 피폐했음에도 60년대 초에 이미 수출 2억 달러를 달성한 상태였다.

북한은 1946년부터 민주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개혁을 실시하였는데 사실상 경제개혁이었다.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 국유화를 통해 기반을 마련한 다음 1947년에 경제개발 계획을 실시한 이래 계속적인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53년 8월 당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 때 이미 김일성은 중공업의 복구발전과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우리나라도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경제개발에 관한 논의가 있었지만 실제로 경제개발 계획을 실시한 것은 1962년의 일이니 북한은 우리보다 10년 앞서 경제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자립적 민족경제로 앞서간 북한


북한은 1956년에 제1차 5개년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소련이북한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면서 원조를 대폭 삭감하기에 이른다. 아울러 동유럽 국가로부터의 원조도 삭감되었다. 이로 인해 북한은 외부의 원조에 의존하지 않는 이른바「자립적 민족경제 건설노선」을 채택했다.

자립적 민족경제는 자립성과 주체성을 본성으로 하는 경제정책으로서 생산의 인적․물적 요소들을 자체로 보장할 뿐 아니라 민족국가내부에서 생산 소비적 연계가 완결되어 독자적으로 재생산을 실현하여 나가는 경제체제를 의미한다. 자국의 자원과 인민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자립적 민족경제는 또한 해외에서 수입하는 물건을 국내에서 만들어 외화를 아끼자는 수입대체 전략의 한 방편이었다. 자급자족하고 자립경제를 건설하자는 건 우선 당장은 바람직해 보이지만 얼마 안가 한계에 부딪친다는 지극히 단순한 모순이 숨어 있었다.

이러한 자립적 민족경제는 한때 북한 경제가 자립경제의 전형으로 일컬어질 만큼 나름대로의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으나 오늘날 북한 경제의 부진을 가져온 주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자립적 민족경제정책의 채택이야말로 우리나라와 격차가 벌어지게 된 중요한 갈림길로 들어선 순간이라 할 수 있다.

1945년 우리나라는 2차대전이 끝난 후 아시아 국가들이 발빠르게 경제문제에 대처하여 빈곤타파는 물론 경제적 부를 주변에 과시하고 있을 때 해방과 6.25, 그리고 정치혼란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경제에 눈을 뜬것은 5․16이라는 또 한번의 정치격변을 겪은 후의 일이었다. 주변국가들에 비해 무려 16년이나 늦은 출발선에는 바닥을 드러낸 외환보유고, 혼미한 정치상황, 미미한 원조상황이 함께 서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극적인 역전극을 펼쳐 북한은 물론 우리나라를 앞섰던 나라들을 저만치 따돌린 것은 바로 결정적 순간에 수출주도라는 위대한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상공팀과 최고회의가 예산문제 외에 또 하나 중요한 마찰을 빚었는데 바로 수입대체냐 수출이냐 하는 문제였다. 최고회의뿐만 아니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주도한 경제기획원의 입장도 수입대체 쪽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석유․비료․철강 등 원자재는 물론 쌀․보리 등 생필품의 상당부분까지도 수입에 의존해야 했으므로 당장 수입대체가 유리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한국무역협회에서 발간한 「무역의 날 30년사」에는 50년대 상황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미국의 원조가 농산물 위주로 이루어짐에 따라 정부는 이를 활용하여 밀가루 섬유 설탕 등 소위삼백산업을 중심으로 수입 대체적 공업화를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미국의 구호물자를 원자재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이점과 함께 이들 산업이 노동집약적이고 저수준의 기술이 요구되며 국민경제적 필요성이 크다는 점에서 추진되었다. 이러한 수입대체적 정책으로 인하여 50년대 전체의 수출액은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아 2천만 달러 내외에 그친 반면 수입대체를 위한 기계류 및 원자재수입과 농산물 수입등으로 수입은 3~4억 달러에 달하여 무역수지 적자폭은 연간 3억 달러를 상회하였고 이는 미국의 원조자금에 의하여 대부분 충당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상황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유원식씨(최고회의 재정위원장)등 최고회의 핵심 주체세력들은 수입대체산업 건설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제1차 경제개발 계획 속에 종합제철 공장 건설 문제가 논쟁의 대상이 되면서 수입대체냐 수출이냐 하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중공업을 먼저 건설하여 수입대체를 해야 자립경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 단연 우세했다.

이에 대한 상공부의 의견은 우선 비교우위가 있는 경공업을 육성하여 수출산업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수입대체와 수출 중 어디에 우선 순위를 두느냐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었던 셈이다.

상공부는 이 결정을 앞두고 일본 시찰을 다녀오는 등 여러가지 검토를 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철강수요는 약 10만t이었고 공장을 세운다면30만t의 규모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갔으나 막상 일본에 가보니 상황은 예상과 딴판이었다. 최소한 1백만t 규모가 아니고서는 종합제철의 구실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30만t은 뒷골목 대장간 수준에 불과한 지경이었다.


상공농사(商工農士)만이 살길

박충훈 상공차관을 비롯한 상무팀이 박정희 의장 앞에서 브리핑을 한 끝에 수입대체보다는 수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상공부에서 수출을 강조하면서 박의장을 설득한 것은 다음과 같은 논리였다.

『철강공업을 예로 들자면 막대한 투자로 건설한 공장이 수출산업으로서 국가 경쟁력이 없으면 지탱해 나가기 힘들다. 그 공장에서 만들어진 제품을 수출하지 못할 경우 국내에서 국제시세보다 훨씬 비싼 물건을 울며 겨자 먹기로 써야 한다. 수출을 안하면 외화를 벌 수 없고 외화가 없으면 필요한 물자를 사올 수 없다. 그렇게되면 어쩔 수 없이 저개발상태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수출 지향적 경제는 전향적이고 적극적인데 비해 수입 대체형은 방어적이고 소극적이다. 뿐만 아니라 수출제일주의는 자유기업, 시장경제 원칙과 자유민주주의 창달에도 기여하는 것이다』

박의장은 자신의 통솔 목표와 일치한다며 상공부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보릿고개를 타개하고 실직자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하려면 원자재를 들여와서 가공수출을 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이라는 상공부의 의견에 전적인 찬성을 표했다.

『박대통령을 따라 기차편으로 지방 순시를 간 적이 있어요. 기차 안에서 박대통령이 내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우리나라에는 사농공상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제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공농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공이 상을 앞서 공상농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했더니 박대통령이 그 말에도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물건을 만들기만 하면 무엇하느냐, 팔아야 되지 않느냐, 그러니 역시 공보다 상이 앞서야 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박충훈씨는 이러한 박대통령의 사고가 수입대체가 아닌 수출제일주의를 채택하게 되었고 그런 연유로 그가 수출전략의 최선봉에 서서 지휘를 하였을 것이라고 들려준다.

김정렴씨의 회고록에도 박대통령의 이러한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경제야말로 국정의 기본이야. 경제가 잘 되어서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등 따뜻하고 포실한 생활을 해야 정치가 안정되고 국방도 튼튼히 할 수 있지 않은가』


외환보우고 점점 줄어


당시 세계적인 추세는 수입대체 전략 수립이었다. 2차대전 이후 인도가 수입대체를 당면목표로 러시아로부터 지원을 받아 제철공장을 짓는 등 경제부흥의 기치를 내걸어 경제개발의 시범케이스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을 때였다.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가 수출 정책을 채택하는 것은 당연히 무모한 일로 비쳐졌다. 사실상 상공부도 수출이 안될 때를 대비한 방안이 전혀 없어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가공무역을 한다지만 수출이 안되면 원자재 값은 어떡할 것인가, 한 치 앞을 기약할 수 없을 때였다.

수출주도로 정책이 결정이 되었으나 결정을 하였다 하여 산적한 문제가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수출할 물건을 만들 자금이 문제였다.

당시 우리나라 외화획득의 주 수입원이라고 해봐야 천연자원 수출과 미8군과 관계되는 사업이 전부였다.

『미8군내에 건설, 물품, 용역 등 세분야의 군납을 따내 외화를 벌어 들였는데 현대의 정주영씨가 건설공사를 따내서 4,5천만 달러, 한진의 조중훈씨가 용역을 따내 3,4천만달러를 벌어들였죠, 미8군에서 활동하는 연예인들의 수입이 중요한 외화 벌이가 됐을 정도니 외화벌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상상이 갈 겁니다』

당시 상공부 수출진흥과장이었던 문기선씨(현 문기상 합동특허법률사무소 소장)의 회고이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각료의 잦은 교체였다. 자금도 문제지만 각료가 자꾸만 교체되다보니 일관성 있게 경제정책을 주도해 나갈 수가 없었다. 결국 방향만 수출주도로 잡아놓고 정작 정책은 허공에 뜬 상태였다. 당시 각료의 이동상황을 살펴보면 17대 정래혁 장관 1년2개월, 18대 류창순 장관이 7개월, 19대 박충훈 장관이 6개월, 20대 김훈 장관이 4개월, 21대 이병호 장관이 5개월 등 반년 단위로 장관이 바뀌었다.

더구나 국내공장 가동을 위한 원자재 수입과 생필품 수입, 공장건설 등으로 그나마 보유하고 있는 외화가 자꾸 줄어들기만 했다. 당시 상공부 공업국 과장이었던 오원철씨(현 기아경제연구소 고문)의 논문에 당시 우리나라 외환보유고 현황이 잘 나타나 있다.

「1962년 말에는 1억 6천6백79만3천 달러, 63년 3월에는 1억3천7백5만7천 달러, 동년 9월에는 1억5백40만5천 달러로 떨어졌으며 그나마 순 미국달러는 9천3백29만8천 달러로 채 1억 달러가 되지 않았다」


외화벌이 일등공신은 보세가공

오원철씨의 논문에 나타난 62년도 수출품목을 보면 당시 우리나라 사정이 잘 드러나 있다.

「1962년도에는 5천4백81만 달러어치를 수출했다. 내용을 살펴보면 돼지 1백47만 달러, 생선 3백45만 달러, 마른생선 2백49만 달러, 조개류 1백81만 달러, 쌀 8백93만 달러, 김75만 달러 등 식료품과 산 동물 수출이 2천 1백85만 달러에 이르렀다. 그 외 생사 3백96만 달러, 고령토 흑연 등 광석 2백69만 달러, 중석 3백37만 달러, 철광 3백85만 달러, 돈모 99만 달러, 한천 1백32만 달러, 무연탄 2백74만 달러 등 원자재를 가공도 안하고 수출한 것이 약1천5백만 달러가 되었다. 총 수출액의 75%가 천연물이었다」

경제개발이 추진되면서 1차산업 위주의 수출구조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하여 1963년에 단순 가공품이기는 하나 합판이 최대의 수출품목으로 등장하면서 수출의 서광이 조금씩 비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2년간 경제개발계획은 별다른 진전이 없이 오히려 외환보유고만 줄어든 상황이 되고 말았다. 당시 외화를 벌어들인 일등공신으로는 보세가공이 있었다.

『5.16 직전에 상공장관을 지낸 천우사 사장 전택부씨는 동경상대를 나온 비즈니스 감각이 아주 뛰어난 분이었어요. 박장관과 친해서 두 분이 자주 만났는데 그때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나온 걸로 알고 있어요. 그분이 최초로 보세가공 일을 일본으로부터 가져왔어요. 일명 홀치기라고 부르는 일이었죠. 일본에서 일감을 가져다 완제품이 아닌 중간단계의 일을 해서 다시 일본으로 보내면 일본에서 마무리를 하는 식이었죠. 일거리가 부족했던 때라 부녀자들에게 아주 인기를 끌었어요』

문기상씨의 회고이다. 보세구역을 설치해 외국물품을 가공하는 일은 자원이 모자라고 노동력은 많은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출품목인 셈이었다. 원자재를 들여다 가공해 수출하는 보세 가공무역이 훗날 공산품 수출로 이어지게 되었으므로 개척자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박충훈씨는 그의 회고록에서 전택부씨를 조세가공의 시조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큰 기여를 했다고 찬사를 했다.


경제개발 계획의 축소 조정


수출주도라는 방향을 잡았지만 62년과 63년은 그 성과가 아주 미미한 실정이었다. 수출보다는 외국차관을 끌어들여 발전시설과 배전시설, 공장설립, 사회간접자본을 설립하는 일이 더 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의욕적으로 수립했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축소 조정되고 어렵게 수립한 수출주도정책은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오원철씨는 논문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공업부문 투자액중 당초 중공업에 속하는 금속 기계부문에 28.8%를 투입하여 11개 사업을 추진하려던 원래 계획을 5개사업 14%로 축소시켰다. 그것도 교통부 철도공작창확충사업을 빼면 4개 사업에 겨우 2.1%를 할당한 것이다. 중공업은 보완작업시거의 배제되고 말았다. 경공업 분야는 40.2%를 투자하여 23개 사업을 추진하려던 원래계획이 12개 사업38.6%로 변경되었다. 나머지 31%는 중소기업 육성 등 기타 산업에 대한 투자였다. 특히 중소기업 육성은 시금한 과제로 인식되어 당초 1.8%밖에 투자계획이 없던 것을 30.4%로 대폭 증액하였다.

교통부 소관 30억6천만원을 뺀 민간에 대한 중공업 투자액 5억3천만원과 경공업 투자액 9백88억2천만원을 비율로 나타내면 5대95이다. 그러니까 1차 5개년계획은 경공업분야에 중점 투자하도록 수정된 것이다. 연평균 성장률도 당초 7.1%에서 5%로 하향 조정하였고 총투자도 50.8%에서 31.9%로 대폭 축소 하였다. 가용 자원면에서 외자도입 계획도 8.95%에서 8.1%로 줄었다. 그리고 국무회의는 외환사정이 호전될 때까지 민간사업에 대한 지불보증을 중지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경제의 성장잠재력을 웃도는 지나친 성장목표 설정, 화폐개혁 실패와 그에 따른 경제적 혼란, 일기불순으로 인한 농산물의 흉작, 개발 인플레 발생, 수입수요 급증과 미국 원조감소로 인한 외환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두 번의 통화개혁 중에서 1953년 2월15일의 첫 번째 개혁은 6․25에 따른 막대한 전비를 충당하느라 과다하게 풀린 통화로 발생한 악성 인플레를 수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1962년 6월에 단행된 긴급통화조치와 긴급 금융조치는 화폐단위만 10분의 1로 절하했을 뿐 국민경제에 크나큰 충격만 안겨준 쓰라린 패배였다.

구정권의 부패에 편승하여 음성적으로 축적, 편재된 자금이 상당히 온존되어 있다고 판단한 최고회의는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이러한 음성자금과 과잉 구매력을 진정한 장기저축으로 동원하여 이를 투자재원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인플레를 미연에 방지하는 조치로 통화개혁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러한 취지에도 불구하고 당시 우리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미국의 반대에 부딪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민정이양 이후 「돌격내각」구성


김정렴씨의 회고록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나타나 있다.

「5.16 군사혁명 초기에 한미간에 알력이 있었고 혁명이 성공한 후 미국측이 이를 승인한 후에도 양국간의 정치적으로 원만하지 못한 상태가 계속되어 오던 차 통화개혁에 있어서도 독주와 비협조, 그리고 국가자본주의가 아니냐 하는 낭설 등으로 말미암아 한국 정부와 일대 대결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 같았다. 미국측은 드디어 무조건 통화개혁의 백지화를 요구하면서 응하지 않으면 경제원조를 중단하겠다는 통보였다. 그 당시만 해도 미국의 경제원조는 우리나라 경제운용상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수출주도 정책이 비로소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1964년부터이다. 당시 상공부에 재직했던 사람, 아니 우리나라 경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1964년을 누구나 즐겁게 회고한다. 우리나라가 최초로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하고 경제기반을 다진 해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수출이 1천억 달러를 돌파하게 되었다. 31년만에 1천 배의 성장을 이룩한 셈이다. 지금은 단일품목으로도 1백억 달러의 수출이 이루어지지만.

64년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대단히 혼란스러운 해였다. 민정이양이 이루어져 제3공화국이 발족된 첫해지만 상황이 좋지 못했다. 야당의원들이 삼분폭리 사건을 들고 나왔고 새나라 자동차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 본회의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대학생들의 대일 굴욕외교 반대 데모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마침내 6․3사태로 이어져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는 지경으로 번지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9월 들어 중부지방에 폭우가 쏟아져 7백70여명의 사망․실종자가 생기고 농작물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런 혼란한 지경에서 경제개발 계획은 실패의 조짐을 드러냈고 보릿고개는 여전히 사람들을 옥죄고 있었다. 개발계획을 세운 62년 초보다 상황이 더욱 나빠져 있었다.

위기의식이 감돌고 있었다. 바닥을 헤매는 외환보유고,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경제상황. 이대로 계속 되었다가는 63년 12월 민정이양을 한 박정희 정부는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될 게 뻔했다. 변화가 필요했다. 박대통령은 민심을 수습하고 새롭게 일어서기 위해서 대대적인 개각을 단행했다. 특히 경제각료 구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돌격내각」이라는 닉네임을 얻은 정일권 국무총리, 저돌적인 추진력의 장기영 부총리, 수출장관이라는 별명을 가진 박충훈 상공장관, 금융계통의 해박한 학식을 지닌 김정렴상공차관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수출인맥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인맥이 수출주도 정책을 성공으로 이끈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박충훈 상공장관은 이한원 대한제분 대표가 장기영부총리에게 천거하여 재기용되었는데 수출장관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그의 기용이 매우 적절했다는 것이 당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한결같은 평가이다


수출 3개년 계획 수립



김정렴씨는 회고록을 통해 당시 상황을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5월13일 연락이 와서 아침 일찍 정일권씨도 함께 자리를 했다. 장부총리는 박대통령에게 경제전반에 대한 소신을 피력한 다음 특히 시장 자유화정책의 중요성과 긴급성, 그리고 추진상의 크나큰 난관등을 상세히 설명하고 이를 꼭 성공시켜야만 하겠는데 이를 위해서는 박대통령의 확고하고 지속적인 지지와 재무부 및 상공부를 비롯한 경제부처 전체의 일사불란한 협력이 절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고 이 자리에서 박대통령으로부터 시장 자유화 정책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 언약과 함께 경제팀은 언제나 장부총리가 원하는 대로 구성해 주겠으니 기필코 시장자유화 정책을 성공시키라는 당부가 있었다」

수출이 원활하려면 적당한 선에서 수입도 자유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 경제팀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수입이 자유화될 경우 가뜩이나 경쟁력이 없는 국내 상품이 잠식될 우려가 있어 선뜻 자유화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지원 아래 시장 자유화 정책이 탄력적으로 운영되다가 1967년에 가서 네거티브방식이 본격 거론되었다.

박충훈 상공부 장관은 본격적인 수출주도 정책의 재수립을 위해 부임 첫날부터 분주했다. 투자규모, 자본조달 계획 등을 다시 책정하여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목표 실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보완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우선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상관없이 상공부에서는 수출 3개년 계획을 세웠다. 3년 동안 7억 달러를 수출하여 3년 후에는 연간3억 달러를 수출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야심찬, 그러나 당시로서는 무모해 보이는 전략이었다. 수출구조에 있어서도 공산품을, 64년에 51.6%에서 67년에는 63%까지 높일 수 있도록 계획했다. 1964년의 상황을 살펴보면 우리나라 수출액은 전세계 국가중 84위로 세계 수출총액의 0.08%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수출만이 살길입니다』


박충훈 당시 상공장관은 재임용되어 임명장을 받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에게 상공정책에 관하여 설명을 하면서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수출만이 살길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나라 전체가 수출 제일주의를 국가의 최중요 정책으로 삼고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통령 각하께서 총사령관으로 진두 지휘해 주셔야 합니다. 격려도 해주시고 애로도 타결해 주셔야 합니다』

갖가지 난관이 가로막고 있는 상태에서 최고지도자가 강력한 힘으로 뒷받침해 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박장관이 건의를 올린 것이다. 그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쾌히 응낙을 했다.

박대통령은 그날의 약속을 성실히 지켜 상공부에서 수출지원책을 내놓으면 웬만한 것은 대통령 이름으로 받아들여져 일사천리로 시행되곤 했다. 정부조직법상 윗자리에 있는 경제기획원이나 재무부에서 상공부가 내놓은 시책의 뒤치다꺼리나 하느냐는 불평이 있을 정도였다.

상공부 장관 시절이 가장 보람있었다고 회고하는 박충훈씨는 수출장관이라는 별명을 의식한 탓인지 자신은 수출 엔진에 시동을 건 사람 정도로만 비쳐달라고 주문한다.

『박대통령이 총사령관이었고 나는 참모자에 불과했습니다』

오원철씨는 당시 분위기를 딱 한마디로 표현했다.

『국시는 수출제일주의, 정책은 공업입국이었죠』

외환보유고 겨우 9천3백만 달러로 빈털터리가 되기 직전, 수출하지 않으면 외화를 벌수 없고 외화가 없으면 죽는다는 각오로 뛰었다고 덧붙인다.

박장관은 대통령에게 수출 목표를 1억 달러로 약속하고는 상공부 취임식에서는 1억2천만 달러로 늘려 발표했다. 그만큼 분발하자는 의도였다. 상공부의 수출진흥책은 두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무역업무에 대한 애로 타개와 장려책이고 둘째는 수출품 제조업체에 대한 지원책이었다.

우선 잠시 중단되었던 수출입 링크제와 소요량 증명에 의한 기술소득제도를 부활시켰다. 수출입 링크제는 공산품 수출을 촉진시켜 우리나라 공업화의 기폭제 구실을 하게 한 제도이다. 당시 이 제도를 발판 삼아 현재의 재벌기업으로 성장한 기업도 있다.


내가 책임지겠다

당시는 항상 달러가 모자라 수입이 이권화 되다시피 했다. 환율이 1백30대 1이었을 때 1달러분의 물건을 수입하면 1천원이 되는 품목도 있었다. 수입허가만 받으면 당장5~6배의 장사가 되던 때였다. 당시는 수입을 하려면 반드시 상공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수입달러를 배정받는 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수출입 링크제란 바로 수출한 사람에게 수출액의 1백%에 해당하는 수입권을 주는 제도였다. 다만 어떤 물건이건 다 수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무역계획에 책정된 범위 내에서만 가능했다.

당시 가장 수출을 많이 한 합판을 예로 들자면 90%가 원자재이고 가득액은 10%밖에 안되는데 1백%의 수입권을 주는 것은 부당이득을 주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많았으나 상공부는 그대로 강행했다.

그것이 자극제가 되어 수출품의 경쟁력을 강화시키고 고용을 늘려, 그로 인해 초기단계에서 국제시장을 개척해 나가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산품을 수출하면 돈을 벌게 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시켜 얼마 되지 않은 국내자본이나마 공업분야로 몰릴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약간의 적자 때문에 수출을 못하던 품목도 제도 때문에 수출을 하는 예가 많았다. 특히 수출기반이 약한 공산품의 수출에 도움이 되었다.

소요량 증명이란 기술소득제도로서 원료를 들여다 제품을 만들어 수출할 때 거기에 드는 원자재 수입을 인정하고 관세를 면제해주는 제도였다. 예컨대 원자재 열 개를 들여와 제품을 만들었을 때 알뜰하게 하여 두 개가 남았을 경우 그 두 개에 대해서 기술소득이라 하여 면세를 해주었다. 그러다보니 누구나 재료가 덜 들도록 연구를 하게 되었다.

이 제도는 엄밀히 따져 위법이었다. 박대통령이 『내가 책임질 테니 그대로 시행하라』는 말에 힘입어 시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수출한사람에게 인센티브를 주어 더욱 수출을 늘리게 하는 한 방편이었다.

박충훈씨는 이 제도에 대해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았으나 어느 특정인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떳떳하게 시행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상공부는 64년부터 매년 수출진흥 종합시책을 마련하여 수출진흥정책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해오고 있다. 당시 시책을 살펴보면 외화획득 기업의 수출소득과 수출활동에 대한 사업소득세 및 법인세 및 법인세50% 감면, 수출용 원자재에 대한 수입관세 면제, 수출금융의 특별 저리지원, 해외시장 정보의 수집 및 시장개척을 위한 무역진흥공사(KOTRA)와 중소기업을 위한 무역협회 산하 소액수출 전담회사인 고려무역 설치, 수출품 생산업체의 육성, 수출유공업자(생산업체의 기능공 기술자 세일즈맨 포함)에 대한 국가 상훈법에 의한 훈장포상 수여 등이 있었다. 수출진흥 종합시책 16개목표 중 제3항의 목표는 이런 것도 있었다.


무엇이든 내다 팔아라


「수출하여야만 이익이 된다는 상식을 무역상사 및 기업가가 갖도록 무역행정을 집행한다」

당시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국민들에게 수출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는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수출에 대한 인식이 없던 사람들에게 수출이야말로 돈 버는 길이라는 인식을 확실히 심어주는 것이 중요했다.

『웬만한 사람들은 다 수출에 매달렸죠. 그저 국내시장만 생각하던 사람들이 화려한 수출 장려제도를 보고 너도나도 무엇이든 팔려고 애썼어요. 가장 큰 소득은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는 점입니다』

수출 장려제도가 전 국민에 널리 퍼진 것이 무엇보다도 큰 수확이었다고 박충훈씨는 전한다.

그밖에도 수출증대와 중소기업 육성을 함께 도모하고자 1백65개 업체를 수출품 생산업체로 지정하여 시설 투자금 융자, 외화배정등에 있어 우대조치를 강구하고 1965년에는 같은 차원에서 1백개 업체를 수출중소기업 시범공장으로 지정하여 생산성본부등 전문기관에서 경영지도 혹은 기술지도를 해주도록 했다.

지원시책을 다각도로 강구하고 수출을 많이 하면 고급승용차도 들여와 탈 수 있도록 해주는 등 혜택을 베풀자 수출은 명예와 소득을 보장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수출업계가 크게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64년은 국내 자본과 기술과 인력이 수출로 집중되어 하나의 붐을 이루어 거국적 수출무드가 조성된 해였다.

수출목표 달성이라는 지상과제를 안고 무역자유화, 수출지향공업화, 가공형 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발전시켜 나가자는 대의를 마련하고 열심히 추진해 나가는 가운데서도 의견 대립과 업계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상공부가 품목별 자유화 물가안정을 위한 긴급 수입원료의 배분, 시설의 확충 및 배정 등을 시행할 때마다 이해가 상반되는 당사자들의 관심이 총집중되었다.

그럴 때마다 박장관은 유리창 행정이란 시정 방침하에 모든 것을 국장회의에서 처리해 나갔다. 때로는 격론이 벌어져 공기가 험악해지기도 했으나 찬반간에 충분한 의견개진이 있은 다음 무역의 자유화와 공업정책의 방향에 비추어 판정에 공정을 기했다.

마침내 1964년 11월30일, 수출액이 1억 달러를 초과한 1억1백39만2천 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그날의 기쁨을 잊지 않기 위해 11월30일을 수출의 날로 정해 매년 기념하고 있다. 당시 온 국민의 감격이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출품의 내용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공산품이 60%를 차지했다지만 합판이 1천8백만 달러로 가장 많았고 다음이 면직물, 해태, 생사순이었다. 미국 일본 홍콩 독일 영국 등이 우리의 주요 수출국이었다. 주변국가들은 이미 우리의 대여섯 배, 북한은 우리의 두배 이상을 수출할 때였지만 뭔가 해낼 수 있다는 사기가 충천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큰 수확이었다.


『우린 그때 모두 미쳤었다』

마침내 1964j년 12월31일 10시경 1억2천만 달러의 수출목표가 달성되었다. 수출대금이 1억2천90만 달러가 입금된 것이다. 5개년 계획이 끝나는 마지막 해인 1966j년에 1억1천7백50만 달러를 수출할 계획이었는데 목표가 2년이나 앞당겨진 것이다. 바로 7개월 전 경제개발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내 시름에 잠겨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저녁 늦게까지 수출통계 숫자를 집계하여 수출목표액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결과를 기다리던 박대통령에게 목표 돌파를 보고했다. 박대통령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전 직원에 대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상공부 직원들은 모두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이며 사무실에서 만세를 불렀다. 통행금지가 거의 다 되었을 때야 비로소 퇴근을 서두른 상공부 직원들은 모두들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우린 그때 다들 미쳤었어요. 밤낮으로 일했던 기억밖에 없어요. 위에서부터 이래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었죠. 최고지도자께서 적극 지원하니까 모두들 신이 나서 일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신바람이 나야 성과가 큽니다. 정말 신바람 나게 일했어요』

박충훈씨는 그 신바람의 근원은 국가 최고지도자의 지원과 신뢰였다고 말한다.

『당시 상공부는 환상의 팀웍을 이루었어요. 복지부동이라는 말은 상상도 못했죠. 며칠씩 밤을 새는 건 보통이었어요. 퇴근시계가 땡 하면 퇴근하는 공무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죠.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우르르 달려나가 막걸리를 마시며 사기를 북돋웠죠. 선후배 관계가 아주 돈독했죠. 소신껏 일하라고 격려해 주었을 뿐 위로부터의 압력이란 없었어요.

그리고 인사가 아주 공정했어요. 낙하산 인사라는 것은 아예 없었고 결원이 생기면 평소 일 잘하는 직원을 눈여겨보았다가 서로 데려 가려고 했죠. 여름에는 아예 퇴근도 안하고 책상에서 잠깐 눈붙이고 나서 다시 일어나 일했습니다. 그때는 뭐랄까 어떻게 보면 너무 설치는 분위기 였어요. 모두들 열에 들떠서 신들린 듯이 일했습니다』

수출진흥과장이었던 문기상씨의 회고이다. 당시 최상의 콤비플레이를 벌였던 사람들은 상역 사이드에는 차관보, 김우근 국장, 심의환 상공과장, 문기상 진흥과장 등이었으며 기술계통으로는 오원철 공업1국장, 엄익호 공업2국장, 안영철 섬유과장, 이상섭 중화학과장, 류각종 경공업과장 등이었다. 문기상씨는 똑똑한 계장들이 든든한 바탕이 되었다고 덧붙인다.

『무엇보다도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일할 맛을 나게 했습니다. 당시 박충훈 상공장관은 방문을 열어놓고 누구나 들어와서 의견을 말하도록 했는데 좋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언제든지 뛰어들어가서 얘기를 했지요. 박장관은 용인술이 아주 뛰어난 분이라고 생각돼요.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귀담아 듣고 잘한다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지요. 설사 가당찮은 의견이라도 끝까지 다듣고 난 다음 참 좋은 의견이지만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하고 기분 나쁘지 않게 얘기하는 겁니다. 상사가 인정 해준다는 생각이 드니까 부하직원들이 모두들 신이 나서 일했지요』

문기상씨와 박충훈씨의 회고에는 공통적으로 신바람이라는 얘기가 들어 있다.

『우리는 그저 정책을 세워 주관해 나갔을 뿐이고 국민들이 국가의 시책에 적극 호응하여 열심히 따라준 덕분이지요. 그리고 첫째 국가 최고지도자의 의지가 확고했고 우리나라가 융성기에 접어들어 운이 크게 따랐던 것도 사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박충훈씨는 그 당시의 감격이 아직도 새롭다고 전한다.


박대통령 야전사령관 자처

1964년 수출진흥 체제 구축의 일환으로 해외시장 개척을 전담하는 한국무역진흥공사(KOTRA)를 설립한 데 이어 1965년부터 수출진흥회가 개최되었다. 애초에 이 회의는 국무총리가 주재했었다. 제1회 회의는 정일권 국무총리의 주재하에 중앙청에서 열렸으나 제2회부터 청와대 응접실에서 박정희 대통령 주재하에 회의가 진행되면서 이름도 수출진흥 확대회의로 개칭됐다.

김정렴씨는 제1차 경제개발 계획추진에 있어 국가원수가 계획사업 하나하나를 항상 챙기고 정부와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애로를 타개하도록 독려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점이 성공의 지름길이었다고 그의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시초부터 난항을 거듭하자 박대통령은 5개년계획에 책정된 사업 하나 하나의 진도를 챙기기 시작했고 급기야 청와대 비서실에 경제개발 5개년계획 상황실을 마련하여 사업별 세부진도를 기록시켜 틈 날 때마다 체크했다는 것. 진도가 느린 사업에 대해서는 수시로 관계장관에게 전화로 문의, 독려했으며 매월의 경제동향보고 청취 때는 물론 매분기의 정부사업 심사분석회의 때에 더 집중적으로 점검했다.

박대통령은 순수 민간사업도 하나하나 계획대로 준공되어야만 나라 전체의 경제개발이 이루어진다면서 각 부처는 민간사업일지라도 이것을 준 국가사업으로 간주해서 총력을 기울여 지원하라고 독려했다.

정부의 직․간접 지불보증하에 외국차관을 도입한 사업의 부실은 국민 부담으로 직결되며 국제금융시장에서의 우리나라 신용도를 손상시켜 추후의 차관도입에 지장을 준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당시 민간기업이 외국차관을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가 지불보증을 서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출이 호조를 보이자 축소 조정되었던 당초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목표를 초과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원래 경제성장률 7.1%로 계획하였던 것을 5%로 하향 조정하였지만 결과적으로 8.5%라는 실적을 올려 목표를 초과 달성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수출은 두 배 가까운 실적을 올렸다.

수출 연평균 26.3% 증가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마무리 된 66년 말 수출은 2억5천만 달러를 달성하고 연말 외환보유액도 2억4천만 달러에 달했다.

이러한 1차 연도 계획의 성공에 힘입어 2차 5개년 계획에 석유화학공업과 종합제철이 핵심적 사업으로 결정되었으며 1973년 중화학공업 선언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수출은 64년부터 92년까지 연평균 26.3%가 증가, 같은 기간 중 대만의 20.9%보다 높은 증가세를 유지해 왔다. 64년에 1억 달러에 불과했던 수출이 71년에 10억달러, 77년에 1백억 달러, 81년에 2백억달러, 85년에 3백억 달러, 88년에 6백억 달러를 돌파하는 수직상승세를 이루어 드디어 지난해 1천억 달러를 돌파했다.

한창 수출주도 정책을 펼쳐나가던 어느 날이었다. 박대통령은 수행원들과 공장을 순시하러 나갔다. 10대 소녀가 대통령이 옆에와 있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박대통령이 갑자기 그 소녀의 손을 덥썩 잡으며 소원이 뭐냐고 물었다. 소녀는 너무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통령이 재차 소원이 뭐냐고 묻자 그 소녀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또래 아이들처럼 교복 한번 입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산업체 부설학교를 지어 어떤 학교와도 구별되지 않는 졸업장을 주라고 엄명했다. 교육부에서는 야간에 체육도 못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난색을 표했다가 대통령으로부터 재차 엄명을 받고 학교를 설립, 소녀들에게 공부할 기회를 주었다.

60년대를 흔히 여자들이 꾸려나간 시대라고 말한다. 지금은 중년부인이 되었을 당시 공장에서 일한 소녀들에서부터 최고지도자에 이르기까지 수출증대에 불탔던 시대. 그때가 있었기에 오늘의 발판이 공고히 마련된 것이다.

1960년은 유엔이 개발연대로 설정한 해였다. 당시 영국 외무부가 작성한 분석자료에 우리나라 실정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한국이란 나라는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분단국으로서 별다른 가망이 없는 곳이다. 국민성은 게으르고 문맹률은 높으며 정치적 미숙에다 경제적 빈곤이 겹친 나라, 게다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군사적 불안 등 온갖 부정적 요인을 안고 있어서 가망이 없다」

국민의 피와 땀, 위대한 정책 덕분

한국전쟁을 취재했던 영국기자는 「쓰레기통에서 장미꽃 피기를 기다리는 격」이라고 당시 한국 실상을 혹평했다.

그러나 한국개발연구원과 하버드대학교 국제개발연구소가 공동 저술한 「한국경제․사회의 근대화」라는 책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1961년 연간 7%의 성장을 목표로 하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되었다. 60년대 초반의 경제동향에 비추어 볼 때 이 성장목표는 어처구니없이 높다고 여겨졌으나 결국에는 초과 달성되었다. 과거에 미국 고문관들이 거의 희망이 없는 나라라고 판단했던 한국이 경제사상 유례가 많지 않은 고도성장기의 문턱에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1964년과 65년에 경제 자유화 계획(시장자유화 정책)이 도입되고 1964년~67년 수입대체 지향형 경제를 수출 지향형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고도성장의 기반을 공고히 했다. 한국경제의 역량은 개발정책 수립에 있어서 보다도 그 시행에 있어서 더욱 뚜렷하게 발휘된다. 뮈르달의 정의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정책을 실천에 옮길 능력을 가진 양성국가인 것이다」

「온갖 부정적 요인을 갖고 있어 가망이 없는 나라」에서 장미꽃이 피어난 것은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린 온 국민의 저력과 결정적 순간의 위대한 선택, 수출주도형 정책의 채택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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