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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악마의 유혹을 조심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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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웅 [yjungw] 쪽지 캡슐

2004-11-26 ㅣ No.75394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악마는  헛소리하는  몽상가를 내세워  사람을 혼란케 하기도  하며  인간의 내면을
장악하여  헛된  지식과  망상을 불어  넣어  주며  이웃의   영혼을  파괴하는
몽상가들을  끌여  들여  악의 도구가  되곤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드러나게  큰소리 내며 헛소리하는  망상가들만  악의 종이라  말하지만
실상  그  이면엔  자신의 악을 숨기기  위한  위장술이  숨어져  있으며  이는  악마의
교활한  수법의  하나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넘어 가는  전술입니다

악마는  인간의  능력밖의  존재로  인간의  나약한  지식으로  악마를  대적하는 것은
악마에게  재물이 되는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에 보면  악마을  식별한다고  외치는 사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악의  작용으로
거짓과 위선의 작품이며  실상  자신이  악의  노예가 되지만 자신은 전혀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겐  거짓되게  유혹하고 그른곳으로  인도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횡행하는 한 정신을 바짝 차려야 만이 누가 진실이며  악의  작용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으로 그들을  무참히 깨뜨려도  악령은  그런 영혼의  양심을  막아  더욱  고집되고
악날하고 거짓되게 하며 위선과  교만으로 물들게  하여 또 다른  영혼들을 악으로
떨어 뜨리며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음란과 온갖 저주되어야 할것에 마음을 두고 인도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영적 식별은  가톨릭 영성방송, 영성자료에 나와 있는 것으로 무엇이 진정 식별인지
알게 해줍니다  거짓된  위선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고  교회가 가르치는 참된
가르침 안에서  식별해야  합니다

 

영적 식별

 

식별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과 우리의 구세주로 인식하는 기술이다. 식별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의사소통하는 기술이고 서로를 이해하는 기술이다. 식별은 두단계의 과정을 존중해야 한다. 1) 첫 번째 단계는 정화의 단계이며, 이것은 하느님 안에 있는 자신을 인식하고, 우리 인간의 역사 안에 있는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2) 두 번째 단계는 식별이 습관(habitus)으로 되는 단계로서, 항구한 자세가 형성되는 단계이다.
식별은 조금씩 주님과 일치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과정의 수고를 거치면서, 어느 스승 곁에서 배워야 한다.

 

1. 식별은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

 

하느님과 인간간의 관계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 인간 안에 있는 천상 사랑의 이러한 현존은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해주고, 이러한 사랑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가까이 나아가게 해주며, 하느님은 우리 인간 실재와 전혀 무관한 상태로 남지 않도록 해준다.
인간과 주님사이에 어떤 참된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하는데, 이 커뮤니케이션은 자유를 보장하면서 인간의 생각과 느낌을 이용하여 이루어진다.
식별은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자유의 경험으로, 창조하는 가능성으로 체험하게 해준다. 식별에서 인간은 자기 존재의 창조주(건설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체험한다.

영적 식별은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차이점을 보기 위하여 우리의 내적 혼돈을 살펴보는 것이다. 식별은 우리의 것에서 하느님의 것을 구별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관계의 구체화된 것으로서의 사랑
사랑은 자유로운 헌신, 자유로운 관계를 뜻한다. 자유로운 관계가 없다면, 사랑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하느님 안에는 자유로운 사랑이 있다. 하느님이 사랑이신 덕분으로 우리는 그분의 인식에 이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관계를 의미하고, 즉 커뮤니케이션을 뜻하며, 그러니까 서로 교류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과의 자유로운 관계 속에서 사적인 방식으로 당신을 나타내신다(커뮤니케이션하신다). 하느님은 인간이 당신을 알고싶어할 때, 인간에게 당신을 드러내신다.
그러한 앎은 하느님과 비슷한 삶으로 인도해준다.
하느님의 앎은 다음과 같이 살아가는 기술을 전달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인간은 사랑의 방식으로, 즉 친교 안에서 자신의 삶을 소모할 때 하느님과 비슷하게 되는 것이다.

믿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 성령을 믿는 것은 성부와 성자, 성령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미 삶의 한 형태를 이룬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아는 것은 일종의 회개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이 내 안에 침투해 들어오도록 허용할 때만,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사랑에 의해 성장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앎은, 구원 행위에서 체험되고 이해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면, 환상에 불과하다. 그분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토대 위에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1고린 4).

나를 위한 구원의 수용으로서의 식별
식별은, 하느님께서 어떻게 나에게 말을 건네시고, 나를 구원하시며, 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구현하시고, 어떻게 성령이 나를 위한 구원이 되는지를 배우게 해주는 영적 삶의 기술이다.
식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 손을 자유로이 내맡기는 자유로운 하느님께의 헌신을 체험하는 기술이다.
식별은, 내 안에 있는 실재들, 피조물들 안에 있는 실재들, 내 주변에 있는 실재들, 나의 개인적 역사 안에 있는 실재들, 보편적인 역사 안에 있는 실재들이 나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달하기 시작하는 기술이다.
식별은, 내가 거짓과 환상을 피하고, 실재들의 참된 의미를 판독할 줄 알게되는 기술이다.
식별은, 하느님과 대화하는 기술이다.

사랑에 관한 환상을 피하기 위하여
식별은 하느님을 관상할 줄 알고 볼 줄 아는 것을 전제로 하는 기술이다.
관상적인 사람은 성령의 빛난 눈으로 자신의 이성을 통하여 보는 사람이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의 사랑과 일치하고, 또 그러한 사랑은 파스카 안에서 실현된다는 것을 볼 줄 알게 된다. 사람은, 모든 좋은 것, 선한 것, 귀한 것, 옳은 것들이 시련과 장애, 저항을 통하여 파스카의 차원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성령의 길은 결코 성주간의 성목요일에서,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을 뛰어넘으면서 부활주일로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참된 관상과 커다란 식별기술이 필요하다.
식별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또한 하느님께의 자유로운 헌신의 마음으로 사물을 사용하며, 그분의 뜻에 맞추어나가게 해주는 것을 체험하게 해주기에, 여러 가지의 왜곡, 근본주의, 열광주의에서 우리를 보호해 준다.
실제로 근본주의 자체는 중요하나,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한도 내에서만 그러하다.

성소를 발견하기 위하여
사람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말을 건네셨고, 존재하도록 불러주셨기에 존재한다. 성소는 사람에게 향한 말씀이다. 사람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과의 대화를 위해서 주어진 시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의 성소는 바로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 삶이다. 사랑으로 그분은 창조하셨고, 인간을 구원하시어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성소는 사랑 안에서 인간이 최대로 구현된 것이다.
그러면 식별은, 식별의 기술을 통하여 사람은 자신에게 향한 말을 이해하고, 이러한 말 안에서 말씀에 응답하기 위하여 통과해야 하는 길을 여는 기술이다.
식별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성소인 사랑을 완수하기 위해 마련하신 시간을 성화할 수 있도록 사람을 도와준다.
성소는 그러니까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서 출발하여 이루어지는 관계 성장의 과정이다. 지속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고, 하느님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것이며, 어떻게 하느님께서 나와 타인 안에서 형성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러한 작업에 나를 내맡길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2. 식별은 무엇인가?

 

무엇으로 알게 되는가?
하느님은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이용하여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또 사람은 성령 안에서 이 사랑에 참여하기 때문에, 성령은 가장 친밀한 실재로서 활동하신다. 성령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생각들 혹은 성령으로부터 타오른 느낌들은 자신의 충만한 실현을 하도록 사람을 움직인다.

하느님은 생각과 느낌을 이용하여 말씀하신다
생각과 느낌은 실제로 세상과 주변환경에서, 우리 자신에서, 사탄에서, 마찬가지로 성령에서 나온다.
우리는 여러 가지 생각, 모두 좋은 생각을 할 수 있으나, 그 모두를 따를 수는 없다. 문제는 복음적 생각을 가지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생각들 중에서 어느 생각에 삶을 투신해야 하고, 따라야 하는 것도 문제이다.
어떤 생각들을 따르면 자연히 다른 생각들은 그 자체로 배제되겠금 되어 있다. 따라서 생각이 단순히 삶에 좋은 것이 아니라, 나에게, 나의 삶에 좋은 것이도록 해야 한다.
생각과 느낌의 상호작용은 하느님께의 개인 헌신 상태를 볼 수 있도록 해준다. 느낌은 나의 헌신 혹은 나의 무관심을 드러내며, 나의 동기를 드러내준다.
생각은 아주 추상적일 수 있으며 현실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 있다. 한편 느낌은 보다 쉽게 사람의 구체적인 현실을 나타내주며, 또한 자신의 기억까지도 드러내주고, 그러니까 보다 수월하게 생각들을 읽을 수 있도록 해준다.
하느님은 항상 구체적인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모든 이러한 실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느낌을 가지고 있다. 느낌은 단지 하나의 반응일 뿐이다. 이러한 우리의 내외적인 실재와 접촉을 가질 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반응이다. 느낌은 우리 내적 존재의 호흡이다. 이것은 우리의 통제범위 밖에서 일어나며 자체 법칙에 의해서 생겨나고 가라앉고 하는 것이다. 대부분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을 통하여, 늘 겪는 경험을 통하여,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느낌들이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존재에 대해 책임은 없다. 비록 지금 우리가 의식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과 가진 관계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
부정적인 느낌은 특히 우리를 당황케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그 부정적인 느낌에 대해서 완전하게 되기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또 그것으로 인해 우리를 결코 단죄하지 않으신다. 한편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에 대해서 겸손하게 인정하면서 그분께 우리를 열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판단하기 전에 그분이 우리를 판단하도록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은 우리 안에서 죽음을 만들어내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고 믿는 것을 포기할 줄 아는 것을 뜻한다.

느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 우리는 보통 긴장과 원의 등을 느끼게 마련이다. 한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서, 우리가 겪는 느낌은 이미 우리의 원의와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표출인 것이다. 이럴 경우에는 느낌을 유일한 표징의 가치로서 절대화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항상 다른 무엇이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흔히 부정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는 데, 가령 갑작스레 우울의 느낌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경우는 대개 느낌을 자극하여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보고자 하는 결심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 좋다. 두려움과 불안감과 마찬가지로 우울은 중요한 감정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제안 앞에 놓여있는 우리의 모든 인간성을 밝혀 드러내 주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먼저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정은 우리가 내맡겨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평가하여 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봉헌은 완전한 비움 후에야 가능하다고 하면서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께 응답을 드릴 때, 우리는 안정의 욕구과 이중적인 감정들, 두려움 등과 함께 있는 그대로 응답하였으며, 이러한 모든 것들도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손 안에 내어놓는 것의 한부분을 차지한다.
유혹은 우리의 나약함에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유혹의 특별한 실례는 자신의 상황을 결정적으로 고정적인 것으로 보면서 선택을 앞두고 직면해야 했던 우울감에서 다시는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확신하며 자신을 폐쇄하는 사람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의 지속적인 선택은 잃어버린 것의 슬픔에 머물면서 자신을 닫아버리거나 혹은 타자의 상이함과 그분의 제안에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개방하는 것 사이에 있다. '자신을 거부하는 것'은 나와 다른 생각과 뜻을 가진 이에게, 즉 하느님과 타인에게 긍정적으로 자리를 내어놓는 것을 뜻한다.
 
자세로서의 식별
모든 훌륭한 영성가들은 앎의 맛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확하게도 이것이 식별의 목적지이다. 영적 앎을 동반하는 맛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실한 맛을 얻고, 그분에게서 유래되고 그분에 이르게 해주는 생각들을 얻게될 때, 우리는 식별의 자세에 이르른 것이다.
기도에서 행하는 영적 훈련으로서의 식별과, 습관(habitus)으로서, 항구한 자세로서, 기도의 자세로서 습득한 식별 자세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식별자세는 모든 기도 훈련이 지향하는 목적지이다.
식별 자세는 하느님께, 성령께 항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상태이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커뮤니케이션하신다는 겻을 보장해주는 표지이다. 또한 그분께 나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이미 나의 근본적인 회개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 내가 행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삶의 방식이다.
식별 자세는 항구하게 개방적인 관계로 살아가는 것이며, 중요한 것은 주님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임을 알게 해준다.
식별 자세는 폐쇄적인 삶에 머물도록 하지 않는다. 자신의 논리 안에 폐쇄되어 머물지 않으며, 내 삶의 중심은 더 이상 내가 아니고 주님이시며, 주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유래하고, 주님을 향해 모든 것이 나아간다는 것을 알고 인정한다.
식별 자세는 그러니까 믿음을 기도적인 마음가짐으로 표현한 것이다.
식별은 계산이 아니며, 연역적인 논리가 아니고, 수단과 목적을 균형잡게 해주는 기술이 아니며, 토론이 아니라, 기도이며, 자신의 생각과 원의를 거부하며 항구하게 마음을 들어올리는 것이며, 모든 것이 나에게 달려있는 것처럼 노력하나 모든 것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있을 줄 안다.
식별 과정을 크게 보장해주는 느낌은 겸손이다. 그러나 겸손은 오로지 사랑 안에만 존재하고, 사랑의 항구한 차원이며, 사랑밖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식별 훈련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 하느님의 사랑은 계속해서 항구한 자세, 기도의 자세, 식별의 자세를 형성하도록 해주며, 겸손을 습득하도록 해준다. 겸손은 무엇보다도 온유함, 즉 말씀하시도록 기다릴 줄 아는 자세를 말한다.

식별의 두가지 단계
첫 번째 단계의 정화는 하느님 안에서의 참된 자아인식을 지향하고 또 자신의 역사 안에서, 자신의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인식을 지향하고 있다. 두 번째 단계는 식별이 습관적(habitus)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있다.
의심이나 혹은 착각을 허용하지 않는 참된 하느님 체험은 죄의 용서이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 그래서 식별의 첫 번째 단계는 한층 더 자아인식과 하느님 인식으로 가도록 사람을 움직인다.  이러한 인식은 필연적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한다. 하느님 인식은 얼마만큼 자기자신을 용서받은 죄인임을 깨닫는냐에 달려있다. 하느님 인식은 자아인식에 달려있는 것이다.
용서의 체험, 사랑이신 하느님의 완전한 체험은 분별능력이 자리잡을 수 있는 토대가 되는 맛이 된다.
추억은 영적 생활을 도와주는 길이 된다. 단순히 과거의 기억이나 향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기억, 하느님 섭리에 대한 기억을 말한다. 그러니까 단순히 자신의 죄를 기억하는 것, 자신의 결점, 자신의 부족함을 기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어떻게 나의 모든 실재를 당신 사랑 안에서 기억하고 계셨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불 줄 알아야 하며, 식별을 통하여 대화와 개방의 기본적인 자세를 배워야 하며, 죄를 끌어안고 혼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하고,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계획으로 자신을 위험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어느 누구도 의사이신 그리스도가 아니면 죄인을 치유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위로자이신 성령이 아니면 상처받은 죄인을 위로할 수 없다.

식별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식별하는 법을 배울려면 무엇보다도 관계를 배워야 하며, 건전한 관계로 들어가야 한다.
식별에는 한가지 위험이 있으니, 무엇이 되어야 하고 어떻게 되어야 하며, 무엇을 행해야 하고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고 스스로 자족자만하는 것이다. 식별을 마치 일종의 기술로 생각할 위험, 일종의 하느님을 알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할 위험, 하느님의 뜻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생각할 위험이 있다.
영적 면담은 아무 친구에게나 여는 개방을 뜻하지 않으며, 영적 생활에 대해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영적 눈으로 당신을 바라볼 수 있는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당신 안에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어떻게 구원역사에 당신의 삶을 열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구원을 타인에게 전할 수 있는지를 사랑 안에서 실현할 줄 아는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다.

두 개의 고전적인 식별방법
한 생각과 인간의 인식능력의 나머지 부분 사이에 있는 연관성을 확인하는 단순한 방법은 반복이다.
어떤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반복하면, 자신 안에 하나의 반응이 일어남을 감지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좋아하게 되면서, 한층 더 마음에 열의가 생기고 창의력이 솟구쳐 올라오거나, 혹은 점점 더 지겨워지고 이질적인 것이 되며, 급기야는 귀찮음을 느낄 정도까지 이르게 된다. 이 반복법을 통하여 생각의 진위성을 살펴볼 수 있다.
생각을 훈련하는 또 다른 고전적인 방법은, 피해야 할 생각은 외부로부터 나온다는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받아들이는 생각, 아주 맹렬하게 다가오고 성급하게 서두르면서 최우선적인 것으로 고려하게 만드는 생각은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럴 때 교회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라고 권한다. "너는 어디서 왔는가? 주님께서 머물고 계시는 내 마음 속에서 나왔는가? 그러니까 너는 우리의 것인가? 아니면 외부에서 왔고 어느 누가 너를 데려왔는가? 누가 너를 인도해 주었는가? 무엇을 원하는냐?" 이러한 질문을 하면 생각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금방 보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질문도 해보는 것도 좋다. "왜 이렇게 서두르는가? 나는 지금 너에 대해 관심가질 시간이 없구나." 혹은 "너는 내게 급하게 서두르고 이것을 실천해보도록 나를 재촉하지만, 성인들은, 성령이든 악마이든 내가 성인이 되기를 원하지만, 그런데 악마만이 당장 내가 성인이 되기를 바란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무엇이 죄가 되는냐고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을 때, 스승은 '서두름'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만큼 서두름은 우리를 망쳐놓는다.
자유롭게 헌신하는 것을 방해놓고, 관계에 대해 살아있는 양심을 유지하는 것을 방해놓는 생각은, 이질적인 생각(un pensiero estraneo)이다. "서둘러야 한다.", "너는 해야 한다.", "옳지 않다.", "반박해야 한다.", "방어해야 한다." 등이 그것이다.
성령은 "너는 해야 한다."라는 명령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사람이 생각에 귀기울이지 않을 때, 그 생각이 성령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다시 돌아오시고, 주님은 겸손하시기 때문에 우리 문 앞에 서서 우리 문을 두드리신다. 생각이 유혹자의 것이라면, 모욕을 주는데,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생각에 귀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걱정,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 어떤 이에게 줄려는 폭력적인 응답,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 거울 앞에 가서 이러한 생각을 앞에 두고 크게 한번 웃으라고 영성가는 권한다. 그러한 생각들을 비웃는다고 해서 우리 삶에 크게 나빠질 것이 없다는 것이고,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생각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죄에 빠지거나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릴 것이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전혀 중요한 것이 없고,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않을 그러한 허구에 불과하다ㄴ.

 

3. 첫 번째 단계의 식별의 역동성

 

죄의식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첫 번째 단계의 식별은 정화의 단계이다. 정화는 앎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그것은 자아인식과 하느님 인식의 단계이다. 이 인식이 참된 것이기 위해서는 용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세부적인 유혹너머
첫 번째 단계의 식별은, 근본적인 하느님 인식으로 인도하며, 그분 앞에 굴복하도록 인도하고, 참된 중심이 자신이었고 하느님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해주는 생각들을 모을 줄 아는 데 있다.
인간이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선택하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기억할 것이고, 그분에게로 이끌어줄 것이며, 모든 것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있는 자기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식별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통하여, 죄를 인정하기에 이르기까지 성령의 움직임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식별은 동시에 인간의 적인 악령이 제시한 덫을 피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원수인 악령은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으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애를 쓰고, 그래서 사람이 홀로 남아있고, 자기자신 위에만 서있게 하며, 아니면 하느님을 믿고 있고 그분을 따르고 있다고 착각하게 하도록 온갖 애를 다쓴다.
모든 죄의 근원인 자신 뜻의 집착을 사람에게서 제거하는 데까지 도달해야 한다.

식별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1) 가벼운 기쁨
아주 매력적이고 확신하는 기쁨은 그 자체로서 유혹의 씨앗이 있으며, 성령이 역사하신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커다란 흥분을 일으키며 강렬하게 나타나는 데, 다소 요란스럽고 기쁨의 기간이 오래 가지 못한다. 거의 항상 그 기원은 외부에서 온 무엇이다.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열의로 차있는 기쁨이다. 단기간의 기쁨이고, 아주 잽싸게 사라지며, 자주 급작스럽게 사라지는 경우가 많고, 기쁨이 사라지면 내면은 커다란 공허만 자리잡게 된다.
이러한 기쁨 상태에 있을 때, 자신을 알지 못하고, 거짓으로 자신을 보게되며, 과대평가한다.
이제는 거의 사라져버린 이러한 기쁨이 남겨놓은 공허로 인해 무언가를 할려고 하는 욕구를 느끼게 되고, 내면세계로부터 머물지 않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게 된다.

2) 조용한 기쁨
땅에서 샘솟는 물처럼 사람 안에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정확하게 이 기쁨의 기원을 알지 못하고, 외부의 그 무엇과 연결시키기가 아주 어려운데, 그것은 체감하고 있는 기쁨이 외부의 그 무엇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주 복합적이고 평화로운 기쁨이며, 품위있게, 천천히, 단순하게 흐르는 기쁨이다.
모든 것을 빛나게 해주고, 선명하게, 아름답게 해주며, 어둠과 악을 제거해주며 사물을 투명하게 해주는 특징이 있다. 관상하게 해주고 관상으로 이끌어주는 기쁨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느님의 기억은 쉽게된다.
이 기쁨은 급하게 그것을 표현하도록 사람을 재촉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들과 친교 안에 있음을 느끼게 해주기에, 자주 그것을 말하도록 자극하지 않으며 적어도 요란스럽지 않다. 기쁨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을 표현할 필요성을 더 적게 느낀다. 영적생활에 더욱 성숙할수록 그것을 드러낼 필요성을 저 적게 느낀다.
이 기쁨은 타인을 더욱 존경하도록 해주며, 또한 자기자신도 존중하게 만든다. 현실주의적이며, 낙관주의적이다. 모든 시련을 겪으나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자세가 준비되어 있다. 이 기쁨이 사라지더라도 혼자있다고 느끼지 않는데, 그것은 기쁨이 우리에게 속해 있음을 알고, 단지 사라졌을 뿐이라는 것이며, 우리 안에 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당신을 기쁨으로 인도하고 그리고 기쁨은 당신에게 속해있다. 이 기쁨은 성령이 우리에게 더 자주 말할 수 있는 환경이다.

근본적인 규칙
어떻게 느껴지고 무엇을 느끼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러한 느낌과 생각이 어디서 나왔고, 어디로 인도하는지가 중요하다. 불편함, 우울, 불안 등은 성령의 활동에서 나올 수 있다.
우리의 영적생활이 더러는 좋지 못한 상태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성령의 활동에서 멀어져가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실 수 있는 말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람은, 즐거운 것과 행복한 것 사이의 차이점, 만족한 것과 평화로운 것 사이의 차이점, 흥분하는 것과 기뻐하는 것 사이의 차이점을 체험할 때 분별을 시작할 수 있다.
사람이 진지하게 하느님을 향하여 설 때, 성령은 영적 위로로 느낌을 양육시켜 준다. 이 위로는, 중심에 내가 아니라, 타자의 현존, 하느님의 현존이 자리잡고, 실제적인 관계 안에서 상호종속하는 가운데서 현존을 인식하기 시작할 때부터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봐야 한다. 그러면 어디서 생각과 느낌이 나타났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생각과 느낌으로 하느님을 향해가고, 더욱 성숙한 개방을 지향하고 있으며, 보다 실천적인 사랑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점점 더 내 안에 파묻히고 있는지, 더욱 더 나를 확실하게 안전하게 할려고 하는지, 보다 더 나를 방어할려고 하는지, 나의 뜻에 따라 나를 실현할려고 하고 있지 않은지? 나를 향하고 있는가? 하느님을 향하고 있는가?

자기자신을 향하고 있는 사람에게 미치는 악령의 활동
유혹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의 느낌에 먼저 손을 댄다. 감각적인 만족, 위로, 기쁨을 느끼게 유혹한다. 여기서 말하는 감각적인 욕구는 편안한 집, 푹신한 침대, 좋은 음식, 영예심, 박수갈채, 건강, 좋은 자가용, 권력, 곤란함과 시련을 피하고 잘 살고자 하는 욕구 등을 말한다.
그리고 유혹자는 이렇게 감정을 유혹하면서 이성에게는 그럴듯한 변명과 핑계를 만들어주면서 유혹한다. 성경과 규칙, 영성가들의 말을 빌려가면서 자기합리화 시키도록 미혹한다. 이렇게 이성과 감정이 일치되어 평화를 느끼면서 계속해서 잘못된 길로 향해가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자기자신을 향하고 있는 사람 안에서 성령의 활동
성령은 이성과 감정을 분리시켜, 불안과 불편을 자극시킨다. 성령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성에 먼저 활동하신다. 이성이 하느님을 향한 길에서 멀어져 가기 시작할 때, 사람은 상태가 안좋아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이성과 감정이 다른 대상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자신을 향하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 성령은 감정위에 활동을 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이미 감각적인 쾌락에 점유당해 있기 때문이다. 감정은 감각적인 쾌락 속에서 부풀려져 있는 것이다. 감각적인 쾌락에 만족해 있을 때, 영적인 것을 숙고할 수 있는 준비는 안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붕괴의 순간이 없이는 어떠한 회개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지금까지 누리던 쾌락을 스스로 놓쳐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성령께서 활동하시면 자연히 사람은 자연히 상태가 안 좋아지며, 갈등을 느끼고, 혼란스럽고, 불안한 것이다.
이 점을 잊어버리고 쾌락에 빠진 사람을 도울 때, 감정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면서 복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줄려고 덤벼드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럴 때는 자신의 이기적인 쾌락을 놓는 극기가 먼저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성적으로 복음의 논리, 복음적인 생각이 들 때, 얼른 그것에 경청하여 포착하여야 한다. 이성이 복음의 논리,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시작할 때, 감정은 아주 격렬하게 통곡을 하기 시작하며, 이제껏 누리고 있는 쾌락을 놓칠까봐 두려워 한다. 이럴 때 이성은 놀라서 감정의 울분에 귀기울여서 과거의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서 기분좋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피정, 영적 체험 등에 똑같이 적용시켜 설명할 수 있다. 말씀이 자신에게 와닿아 자극하기 시작할 때, 무엇으로 인해 자신 안에 이런 일이 생겼는지 깜짝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더러는 과거의 자신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령은 계속해서 이성 위에 활동하시면서 사람 안에 붕괴와 불안, 거의 양심가책을 느끼게 하면서 사람을 부추긴다. 이러한 고통이 계속되면 잠깐이라도 감정은 이미 복음을 향하고 있는 이성을 따라 복음을 향해 움직일 수 있다. 바로 이때 새로운 상황이 생겨나고, 이성과 감정이 똑같은 대상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평화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때의 평화는 전혀 새로운 것이다.
이러한 체험을 하고 나면 올바른 식별을 할 수 있다. 무엇이 참평화이고, 거짓평화인지를 가려낼 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전의 우울(슬픔)과는 다른 슬픔을 느낀다. 이제까지 잘못된 길을 걸어온 것에 대해 통곡하는 눈물인 것이고, 구원의 길로 가게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감사와 기쁨의 눈물인 것이다.

하느님을 향해있는 사람 안에서 성령의 활동
성령은 우리가 길을 바꾸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감정을 부양해주고 배려한다. 단순히 이상적인 차원에서 믿음을 가질 때, 사람은 쉽게 자신을 고양하고 심화시키지만, 마음의 느낌과는 동떨어져 있어서 믿음의 맛을 느끼지 못할 수가 있다. 이런 경우에 사람은 이중성을 느끼게 된다. 머리로는 엄격하게, 진솔하게 믿음의 가르침을 따르지만, 감정적으로는 세상의 감각을 따르는 것이다. 사람이 진지하게 하느님을 향해 있을 때, 성령은 영적 위로로 감정을 부양해준다. 이러한 위로는 감각적인 위로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위로는 나를 중심으로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에서, 실질적인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물론 이럴 때도 자신의 나약함을 느끼고 자신의 죄까지도 바라보지만 구원의 확신은 더욱 강하다.
그다음에 성령은 우리 이성 위에 활동하시는데, 원수가 사용하는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신다. 자신의 감정이 느끼고 있는 것에 대해 적절한 구실(해명)을 붙여주는 것이다. 동기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교회의 전통, 성인들의 생애는 아주 중요하다. 이러한 것을 통하여 하느님은 나의 지성을 강화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하여 이성과 감정은 똑같은 방향으로 헌신하고 똑같은 방향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을 향해있는 사람에게 미치는 악령의 활동
원수는 이성과 감정 사이를 갈라놓으려 애를 쓴다. 원수는 무엇보다도 이성 위에 활동하는데, 장애물을 만들어내거나 증대시키면서, 훼방물과 수고로움을 부풀리면서 거짓 합리화를 부추기는 것이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 미래에 나는 무엇을 할까? 등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하게 만든다. 하느님을 묵상하면서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꽉차게 유인한다. 의심으로 끝없이 밀어부친다. 미래에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거짓 합리화의 근거가 된다.
일반적으로 원수는 나의 이성의 관심을 처음에 가졌던 영적인 것에서 분리시켜 하나 혹은 두 개의 질문을 던지게 유인한다. 이것은 자주 갑작스레 일어나며, "이것봐라. 나는 이제껏 이것에 대해 전혀 생각치 못했는걸! 내가 속았구나! 이러한 모든 가능성을 확인한 적이 없어!"라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처음에는 이러한 생각들이 여기저기에서, 띄엄띄엄 기억 속에, 친지들 속에, 우연한 일 속에서 떠오르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나의 이성이 이 생각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사람은 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한다. 불안해지고, 혼란스럽고, 이제까지 느끼던 기쁨과 위로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 시점에서 원수는 안 좋은 상태를 악화시키려 노력할 것이며, 사람을 더욱 놀라게 한다. 그리하여 영적 상태에 견실하게 머물려면 더 커다란 고통과 불안을 겪으리라고 유혹한다. 그러면 사람은 더욱 위로와 평화, 새로운 기분좋은 상태를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유혹자는 이때 감각적인 위로를 제시하여 유인한다. 이성과 감정이 일치하는 순간이며, 잘못된 방향이지만, 사람은 이성과 감정이 똑같은 대상을 향하고 있으므로 평화를 느끼는 것이다.

용서에 이르기까지
충실하게 영적 생각과 느낌을 따르면서
참다운 겸손의 한 차원인 온유함의 자세를 습득하고 유지할 줄 알아야 한다. 영적 싸움을 받아들이고, 기도에서 자기중심주의적 자세를 배제하고 받아들일 줄 알며 인내할 줄 아는 관상자세를 견지하여야 한다.
자신의 힘에만 의지하거나 혹은 자신의 확고한 결심에만 의지하면서 영적 메마름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참된 치료는 주님과 관계를 밀착하면서 주님과 씨름을 할 때 이루어진다.

영적 메마름을 통하여
주님은 고독, 공허 속에 우리를 내버려둘 수 있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마음을 불태우고, 사랑의 선물을 통해서만 사랑의 맛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기 위한 것이며, 내가 그것을 상상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기초적 체험
첫 번째 단계의 식별은, 그리스도가 내게 오시도록 내맡김으로써, 그분이 나를 받아들이도록 내맡김으로써, 그분의 팔에 잠기고, 그분이 나의 목을 얼싸안도록 내맡기고, 상처받고 유혹에 열려있는 나의 육신을 끌고서, 마침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드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는 것으로 끝난다. "예수 그리스도님, 내 주님이시요 내 구세주이시여, 당신의 거룩한 뜻에 따라 나를 사용하소서."
사랑에 이르렀을 때, 사람은, 선을 원하실 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제적으로 소유하고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분의 뜻에 맞추어 자신을 봉헌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행위는, 사람이 창조하고, 건설하며, 자신까지도 실현하기를 원한다면, 필연적인 것이다.
자신을 포기하면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뜻을 죽일 때 자신의 참된 뜻을 실현하게 된다.

용서의 맛의 보호자
용서의 가장 확실한 기억, 그리고 사랑의 맛은 용서의 기억을 보호해주는 기도이며, 기도로 참회의 열매를 가슴 속에 고이 간직할 줄 알게 된다. 참회의 열매는 사랑을 재발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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