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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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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동 [ynin] 쪽지 캡슐

2004-12-02 ㅣ No.75735

 

12월의 독립운동가 홍보자료

오의선(吳義善)

 

(1889. 12. 8 ~ 1931. 5. 6)



1. 선정배경

  경기 용인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보성전문학교와 동경 명치대학에서 신학문을 수학하여 신구학문을 겸전한 근대지성으로 1919년 동경 2․8독립선언에 참여하고,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초기 임시정부의 기틀을 닦고, 북경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겨 무장독립운동세력의 통일에 노력하며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고, 귀국한 뒤에는 시대일보 기자로 활약하면서 사회주의독립운동가로 변신하여 옥중에 갇힌 혁명 동지와 그 가족들을 돕기 위해 조직된 국제혁명자후원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지속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신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선정


2. 주요공적

 ○ 1919  2․8독립선언 참여

 ○ 1920  임시의정원 의원 선임

 ○ 1921 - 1930 군자금 모집, 국제혁명자후원회 활동

 ○ 1931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기념 행사 계획


1. 기념행사


  ㅇ 12월의 독립운동가 기념사진전

- 기  간 : 2004. 12. 1∼12. 31

- 장  소 : 서대문 역사관, 독립기념관

- 주  관 : 광복회(☎02-780-9662), 독립기념관(☎041-560-0114)

- 내  용 : 오의선 선생의 인물사진과 공적관련 사진 전시


  ㅇ 12월의 독립운동가 오의선 선생 학술강연

- 기  간 : 2004. 12월중

- 주  관 : 순국선열유족회(☎02-365-4387)

- 내  용 : 오의선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2. 언론홍보 기타

  ㅇ 국가보훈처 인터넷 서비스

  - 명    칭 : 이달의 독립운동가

  - 주    소 : http:․․www.mpva.go.kr


  ㅇ 포스터 제작·배부

  - 발 간 처 : 국가보훈처

  - 배포내용 : 포스터(1만매 )


  ㅇ 일간지, 정기간행물 특집기사 게재 홍보

  - 중앙일간지, 정기간행물 등 보도자료 배포

  - 전국 시·군·구 소식지 게재

「12월의 독립운동가」공적개요

오 의 선(吳義善) 선생

(1889. 12. 8~1931. 5. 6)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오의선 선생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89년 경기도 용인에서 부친 오인묵과 모친 구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가풍에 따라 한학을 배우며 인격을 도야하였고, 보성전문학교와 일본 명치대학에 유학하여 신학문을 수학하였다. 그리하여 전통 한학의 토대 위에서 신학문을 습득함으로써 신구학문을 겸비한 근대 지성으로 성장하였다.


일본 명치대학에 유학하던 시기 재일 조선인유학생학우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동경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선포한 2․8독립선언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민족 독립의식을 표출하여 갔다. 동경유학생들의 독립선언식 참여를 독려하고, 독립선언서를 널리 배포함으로써 2․8독립운동의 열기를 고조시켰던 것이다.


2․8독립선언 직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경기도 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동참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세칙제정위원, 청원법률심사위원, 예산결산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활약하면서 초기 임시의정원의 골격을 세우고 임시정부를 민족의 대표기관이자 독립운동 지도기관으로 만드는데 힘썼다.


이후 1921년 북경으로 옮겨가 무장투쟁론자인 박용만계열의 인물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서북간도 및 노령지역의 무장독립운동세력의 통일에 노력하고,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다. 국내에 동지를 파견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배후 지도하다가 몸소 국내로 들어와 활동하였다.


국내로 잠입한 뒤 시대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새로운 민족혁명 이념으로 전파된 사회주의에 공감하여 사회주의운동가로 변신하였다. 더욱이 네 차례의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사회주의운동가들이 대거 피체되어 옥고를 치르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투옥된 동지들과 그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국제혁명자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나아가 국제혁명자후원회의 국내 책임자가 되어 감옥에 갇힌 혁명동지들과 그 가족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그러다가 1931년 3월 향리인 용인에서 일경에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심한 고문으로 같은 해 5월 6일 옥중에서 42살의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12월 한 달간 전시하는 한편, 순국선열유족회에서도 이 달의 독립운동가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오 의 선(吳義善) 선생

(1889. 12. 8 ~ 1931. 5. 6)


                                채 영 국(국민대학교 연구교수)



1. 출생과 성장


선생은 경기도 용인군 원산면 죽릉리에서 1889년 12월 8일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부친 오인묵(吳寅黙)과 모친 구(具)씨 사이의 2남이었다.

어려서부터 가풍에 따라 한학(漢學)을 배우며 학문과 인격을 닦았다. 남달리 영민한 두뇌와 학습능력을 가진 선생은 10여 세가 되면서 근동에서 신동으로 소문나기 시작했다. 학문을 배워 깨달은 바가 많아지고, 주변뿐만 아니라 더 넓은 사회를 보게 된 선생은 외세의 침탈로 조국이 심하게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생이 그와 같은 생각을 갖게 되었을 때 조국은 이미 일제의 침략으로 국토와 인민이 유린당하고 있던 시기였다. 선생은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이 무엇 때문인가를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것은 국가의 구성원인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힘과 지식이 모자라기 때문에 나라 전체가 힘이 없고, 결국엔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선생은 일제의 침략에 맞설 훌륭한 신지식을 갖는 것만이 우리 민족의 유일한 살길이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선생은 집안 어른들을 설득하여 서울로 올라와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러면서 같은 뜻을 가진 친구들을 동지로 규합하여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토론하고 가슴에 새겼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조국의 현실에 직접 뛰어 들어 활동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아직 자신의 힘으로는 일제를 물리치고 조국을 해방시키기에는 역부족임을 깨달았다. 조국을 구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힘을 더욱 연마하고 축적시켜야 함을 느꼈던 것이다. 따라서 선생은 동지들과 상의한 끝에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이를 단행하였다.

도일한 선생은 동경(東京)에 있는 명치대학(明治大學)에 입학하였다. 적국(敵國)의 수도 동경에서 그것도 그들이 만든 대학의 대학생이 되어 일본제국주의를 정면에서 바라보고 조국의 현실을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나아가 선생은 애국의 열정이 넘치는 여러 동료 유학생들을 만나 끊임없이 의논하고 조국의 장래를 설계하였다.

선생과 동료 유학생들이 이같이 노력하고 있을 때, 미국 대통령 윌슨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지침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였다. 국제정세를 다른 어떤 계층보다도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던 유학생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재일 유학생들은 1918년 겨울부터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가면서 항일운동의 방책을 상의하던 끝에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당시 동경 유학생들이 만든 중심적인 조직체인 학우회(學友會) 주최로 웅변대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대회에서 몇 사람이 민족자결이란 주제로 열변을 토로하면서 유학생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그 반향을 통해 앞으로의 추진방향을 설정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계획에 의해 1918년 12월 하순, 동경의 YMCA 강당에서 웅변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수많은 유학생들이 몰려 대성황을 이루었고, 연사로 나온 이종근(李琮根)․김상덕(金尙德)․윤창석(尹昌錫) 등은 민족자결주의의 원칙 하에 우리 민족도 반드시 광복을 이루어 자주국가를 세우자고 호소하였다. 이를 위해 우리 유학생들이 희생적 정신으로 앞장서자고 열변을 토하였다. 예정된 연사들의 강연이 끝났으나 열기로 고조된 학생들은 돌아가지 않고 밤 깊도록 앞으로의 일들을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백관수(白寬洙)․김도연(金度演)․송계백(宋繼白)․최근우(崔謹愚) 등을 추진위원으로 선출하고 산회하였다.

이들 추진위원들은 한 달여 동안 준비를 하여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YMCA 강당에서 2․8독립선언을 선포하였다. 이때 백관수는 선언서를 낭독하고 김도연은 결의문을 읽었다. 이어 서춘이 단상에 올라 연설을 하려고 할 즈음 일제의 경찰이 해산을 요구하며 강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독립 열기로 들뜬 학생들이 반항하며 일경들과 격투를 벌였지만, 결국 많은 학생들이 붙잡혀 갔고 주동자였던 최팔용(崔八鏞)․윤창석․이종근․서춘 등은 금고 등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도 2․8독립선언에 앞장서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각 대학에 흩어져 있는 유학생들에게 대회장까지 나오도록 연락하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열기를 고조시켰다. 이 같은 적극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다행히 일경에 검거되지 않았다. 이후 선생은 학업을 포기하고 다른 여러 동지들과 함께 애국지사들이 많이 모여 있는 상해로 건너갔다. 이처럼 재일 유학생으로 2․8독립선언을 전후하여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와세다(早稻田) 대학 출신 : 신익희(申翼熙)․신석우(申錫雨)․장덕수(張德秀)․나용균(羅容均)․윤창만(尹昌萬)

명치대학 출신 : 오의선․윤현진(尹顯振)․손두환(孫斗煥)․홍진의(洪震義)․이규결(李奎決)․이봉수(李鳳洙)

중앙(中央)대학 출신 : 이춘숙(李春塾)․류경환(柳璟煥)

정칙(正則)영어학교 출신 : 윤보선(尹潽善)․고의봉(高義鳳)․황계환(黃桂煥)․정근모(鄭根模)

일본대학 출신 : 정남모(鄭南模)․서성달(徐成達)


2.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의 활동


상해에 도착한 선생은 당대 기라성 같은 애국지사들을 모두 만날 수 있었다. 김구(金九)를 비롯하여 이동휘(李東輝)․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조소앙(趙素昻) 등과의 만남은 선생의 조국애를 한껏 깊게 하였다. 선생은 이들 선배들의 뒤를 따라 광복운동의 선상에 선다면 조국은 기필코 독립되리라고 굳게 믿었다. 따라서 선생은 지금까지 배운 지식을 조국광복을 위해 모두 쏟아 부으리라 결심하였다.

이 시기 국내에서는 3․1운동이 폭발하였고, 그 물결은 질풍노도처럼 한민족 전체에 퍼져 만주(滿洲)․노령(露領)․미주(美洲) 할 것 없이 한인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독립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많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같은 해 4월 경기도 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최초 의원이 된 것이다. 이 시기 선생과 함께 경기도 의원에 선출된 사람은 조완구(趙琬九)․이기룡(李起龍)․최창식(崔昌植)․신익희․최근우(崔謹愚) 등이었다. 이들 경기도 의원들 이외에도 의정원 의원은 충청도․경상도를 비롯한 전국 8도와 해외 교민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 중국․노령․미주 등까지 포함해 11개 지역에서 51명의 의원을 선출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제4차 회의가 개회되기 시작한 4월 30일까지 각 지역에서 선출된 의원수는 정원 보다 16명이 적은 35명이었다.

임시의정원은 비록 정원에는 차지 않았지만 4월 30일부터 개회된 제4차 회의부터 본격적인 의정활동을 시작하였다. 4차 회의는 5월 13일까지 진행되어 회기가 14일간이나 되었다. 회기 초반 의원들은 임시의정원법 제21조에 의해 의장에 손정도(孫貞道), 부의장에 신규식(申圭植)을 선출하였다. 이 회기 동안 선생은 김동형(金東瀅)․이춘숙 등과 함께 의정원 세칙제정(細則制定) 위원에 선임되었다. 이와 함께 의정원에 올라온 법률을 심사하는 청원법률 심사위원도 함께 맡게 되었다. 선생이 맡은 두 업무는 임시의정원의 골격을 세우는데 가장 중요한 것들로 임시정부 설립 초기 선생이 의정원에서 얼마나 중심적 역할을 하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4차 회의 기간 중 의원들은 여러 안건을 심의하였는데, 그 가운데 주요한 몇 건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1919년 3월 1일부터 진행된 역사를 편찬할 것 ② 임시정부 선언서를 5개 지역에 발송할 것 ③ 정치고문 1명과 신문고문 1명을 둘 것 ④ 재원(財源)이 많이 부족하므로, 인두세(人頭稅)를 1인당 50전씩 징집할 것과 수시로 애국금을 모금할 것 ⑤ 안전한 곳에 교통부를 4개 설치할 것 ⑥ 군무부는 동포들에게 독립사업에 대해 각성을 시킬 것 등이었다.

특히 이 회의에서는 임시정부의 재정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는데, 선생은 홍진․김동형 등과 발언권을 얻어 재원 마련에 대한 구체적 안을 발표하였다. 발표된 내용을 종합 정리해 보면, 내외에 공채(公債)를 발부하고 국민을 상대로 의연금을 걷고 세금을 징수하자고 하였다. 이를 위해 재정통일기관을 설치할 것이며 이 기관에서 각지에 특파원을 파송하여 수합하고자 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재정방침은 선생을 비롯한 의원들이 4차 회의에서 내놓은 안에 몇 가지가 첨삭되어 발표되기는 하였으나 결국은 이들의 안이 주축이 되어 1920년 3월에 확립되었다. 4차 회의 이후 임시정부가 실시한 재정방침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재원 마련

① 의연금 및 애국금 ② 인구세 ③ 소득세 ④ 국채 ⑤ 내외 공채 ⑥ 외국차관

⑦ 실업을 통한 수입


(2) 재원 확보 방법

① 자금수합원의 활동 ② 재정 관계 법규 정비와 징수 규정 공포 ③ 1920년 3월 1일부터 의연금 및 애국금 수합원제를 폐지하고 지방자치단체(연통부․거류민단 등)에 위임함 ④ 1920년 4월 6일부터 국내는 연통부, 국외는 재무관을 임명하여 담당케 함 ⑤ 미주에서는 초기에는 대한인국민회, 뒤에는 구미위원부가 담당함.


(3) 예산 및 결산 방법

① 1920년 3월 2일 국무총리 이동휘는 예산에 대한 것은 행정부에 일임해 달라고 시정연설에서 주장하였으나 이에 대한 확실한 결정은 없었음 ② 1919년 7월 14일 의정원 제5회 회의에서 첫 결산 보고가 있었으나 이 때는 대략적인 것만 밝히고 있음 ③ 예산 결산은 독립운동의 비밀이 외부에 누설된다는 이유에서 의정원 외에는 공개되지 않다가 1928년부터 공개되기 시작하였음.


임시의정원 제5차 회의는 1919년 7월 7일부터 19일까지 법조계의 장안리(長安里)에 있는 거류민단 사무소에서 개최되었다. 제5차 회의가 개최되었을 때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많은 의원들이 해임되거나 또는 결석하는 의원도 많았다. 물론 의원 개개인의 사정에 의한 부득이한 이유에서 그렇게 된 것이었으나, 선생은 의정원 회의만은 만사를 제쳐두고 참석하여 그 기틀을 세우는데 앞장섰다. 따라서 의원들은 열성적인 선생을 예산결산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하였다. 이 위원회의 이사(理事)는 유치근(兪致根), 위원은 백남규(白南奎) 등이었다. 이와 함께 선생은 김병조(金秉祚)․정인과(鄭仁果)․최창식(崔昌植)․이춘숙 등과 함께 국제연맹에 한국독립을 청원하기 위한 의안 작성 특별위원회인 국제연맹청원안제정위원회(國際聯盟請願案制定委員會)의 위원으로도 임명되었다. 이것 역시 선생이 의정원 초기 실무적인 업무에 심혈을 경주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5차 회의 회기 중에 결의된 주요 안건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임시정부의 위치는 상해에 둔다. 단, 정부의 의사 및 상해 거류민의 여론에 따라 수시 자유롭게 위치를 변경할 수 있다. ② 임시의정원과 노령국민의회를 합병하여 의회를 조직한다. ③ 정부의 제안에 따라 2천만 원 공채를 발행한다는 것 등이었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이 같이 적극적 활약하는 한편, 선생은 1919년 7월 1일 상해의 장빈로 애인리(長濱路愛仁里) 38호에서 조직된 대한적십자회의 상임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이 단체의 목적은 전시 및 천재지변에 의해 사상자가 나오면 이를 구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라를 잃고 일상적인 생활 자체가 구국의 전선에 서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한민족으로 적십자회를 조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 어디서 일제 침략자의 공격을 받고 불행을 당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선생은 직접 국내에서 애국금을 모집하는 일에도 관여하기도 하였다. 즉 1921년경 선생은 북경(北京)으로 무대를 옮겨 이곳에서 박용만(朴容萬)의 추종자인 김복(金復)을 만나 활동하였다. 군사전문가인 박용만은 이 시기 북경에서 독립운동 세력의 군사적 통일을 목적으로 한 군사통일회의를 준비하여 1921년 4월 개최하였다. 박용만은 조국의 독립은 군사적 실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므로 서북간도(西北間島) 및 노령의 모든 무장세력을 하나로 통합하여 그 힘으로 일제를 몰아내고자 하는 생각을 가진 무장투쟁론자(武裝鬪爭論者)였다. 상해에서 활동하던 선생이 북경으로 와 박용만의 추종자들과 항일활동을 도모했다는 것은 이 시기 선생도 무장투쟁론자로 변신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선생과 김복은 북경에 흥화실업은행(興華實業銀行)이라는 금융기관을 만들어 놓고 표면적으로는 이 은행의 주식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냈다. 그러나 실지 이들은 흥화실업은행을 매개로 동지들을 포섭하여 국내로 파견시켜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일을 하였다. 이들의 이런 계획은 최윤동(崔胤東)이라는 행동대원에 의해 국내에서 추진되었다. 대구 출신인 최윤동은 중국의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임시정부의 애국금 모금 행동대원으로 가담한 인물이었다.

선생은 북경에서 최윤동을 만나 자신들의 계획을 설명하고 국내에서 애국금을 모금하여 보내주도록 요청하였다. 그런데 최윤동은 선생을 만나기 전 같은 경상도 출신으로 임시정부에 관여하고 있던 김응섭(金應燮)과 협의해 국내 각 지역에 폭탄을 운반해 두었다가 일시에 거사를 단행할 대규모 폭파․암살 투쟁계획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따라서 최윤동은 선생과의 군자금 모금계획, 김응섭과의 대규모 폭파․암살 투쟁계획 등 두 가지 계획을 가지고 국내로 잠입하였다.

최윤동은 고향인 대구로 가 자신의 집을 본거지로 하여 각지를 돌아다니며 동지를 포섭해 군자금 모금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서울 인사동에 살고 있는 이수영(李遂榮)을 동지로 포섭하여 노기용 등과 전북 정읍의 보천교(普天敎) 본부를 습격해 군자금을 모금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고종사촌 동생인 백동희(白東熙)를 동지로 포섭해 대구의 쌀 중매상을 습격해 군자금을 수합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아울러 최윤동은 김응섭의 부하 김의삼(金義三)이 가져온 폭탄 3개를 숨겨 놓았다가 김지섭(金祉燮)에게 건네주기도 하였다. 김지섭은 1924년 1월 일본 황궁으로 들어가는 이중교(二重橋)에 폭탄을 투척했던 의열투쟁가이다. 그 의거에 최윤동에게 받은 폭탄이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활동을 펴던 최윤동은 1923년 11월 27일 일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최윤동이 피체됨에 따라 활동 전모가 밝혀지게 되었고, 그가 국내에서 활동하게 된 배후에 선생이 있다는 사실도 밝혀지게 되었던 것이다.


3. 국내에서의 활동과 순국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선생이 어느 시기에 국내로 들어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국내로 들어 온 선생이 ≪시대일보≫의 기자를 했다는 것은 밝혀진 사실이다. 1922년 9월 최남선(崔南善)과 진학문(秦學文)은 타블로이드판 주간잡지 ≪동명≫을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표지에 시사주보임을 밝히고 매호마다 ‘조선민족아 일치합시다. 민족적 자조(自助)에 일치합시다’라는 표어를 내걸어 한민족을 각성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은 ≪동명≫ 잡지를 1923년 6월 3일자로 중단시키고 7월 17일부터 일간지로 허가를 받아 이듬해인 1924년 3월 31일 ≪시대일보≫를 창간하였다. ≪시대일보≫ 창간 당시 구성원은 사장에 최남선, 편집국장에 진학문, 정치부장에 안재홍(安在鴻), 사회부장에 염상섭(廉尙燮) 등이었다. 이 신문은 이미 발간되어 있던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와는 달리 1면을 정치면으로 하지 않고, 사회면으로 만들었다.

이후 ≪시대일보≫는 동아․조선과 함께 3대 민간지가 되었으며, 신선한 감각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발행 초반부터 심한 경영난으로 2개월 만에 판권을 보천교로 넘기려하다가 내분이 일어나기도 하는 등 겨우겨우 버티어 나가고 있었다. 결국 1925년 4월 초 사장이 홍명희(洪命熹), 편집국장이 한기악(韓基岳)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새로운 경영진도 경영난을 타개하지 못하고 1926년 8월 중순까지 발행된 뒤 휴간에 들어갔고, 이후 ≪시대일보≫라는 제호는 없어지고 말았다.

선생은 ≪시대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했으므로 1924년 3월에서 1926년 8월 사이 국내로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동명≫과 ≪시대일보≫를 경영하던 시기의 최남선은 변절의 모습을 보이지 않아 젊은이들에게 민족지도자로 숭앙 받았고, 그 자신 조국독립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는 않은 때였다. 거기에 안재홍이나 염상섭․홍명희․한기악과 같은 인물들이 합심 협력하며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때문에 ≪시대일보≫는 선생과 같이 민족적 색채가 강한 인물이 어느 정도나마 자신의 의지를 피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신문이었다. 이에 선생은 젊은 시절 중국의 상해와 북경 등에 망명하여 애국지사들을 통해 터득한 민족정신, 그리고 몸소 활동하면서 깨달은 조국 독립에 대한 염원을 동포들에게 알려 독립정신을 일깨우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대일보≫의 기자로 활동하면서도 선생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가며 여기저기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하고, 또 독립을 열망하는 젊은이들과 조국 독립의 방책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과도 교류를 갖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20년대 중반 국내에는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사회주의가 퍼져 혈기왕성한 애국청년들이 이를 신봉하고 있던 때였다. 때문에 사회주의 독립운동자들이 수없이 검거되었고, 특히 1925년부터 1926년에 걸친 1․2차 조선공산당으로 사회주의운동가들이 감옥으로 끌려들어 가고 있었다. 이들이 잡혀가면 그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생계 또한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에 끌려간 당사자나 그 가족을 돌봐줄 사람은 흔치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목격한 선생은 자신이 이를 맡아야 할 것으로 판단하고 국제공산당에 연결하여 국제혁명자후원회 간부가 되었다. 국제혁명자후원회란 혁명운동을 전개하다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국제공산당이 만든 후원단체였다. 국내에서는 1925년 11월부터 1928년 8월까지 4차례에 걸쳐 조선공산당원들이 대거 검거되었다. 검거 인원은 수백 명에 달하였다. 그 동안 일제를 상대로 싸우다 검거된 이들은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도 제대로 돌볼 수가 없어 도움이 절실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간파하고, 국무총리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주도적으로 이끌었고, 북간도 및 연해주에서 한국 독립운동을 주도해 온 이동휘가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서 “조선노력군중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는 모든 한민족이 적극적으로 국제혁명자후원회에 참가하여 혁명동지들을 돕자는 취지에서 개최된 것이었다. 이 대회가 열린 뒤 연해주의 한인들은 어장․탄광․목재소 등에까지 국제혁명자후원회 세포기관을 조직하여 수익금의 일부를 의연금으로 모금하였다. 그리하여 의연금으로 피체되어 감옥에 갇힌 혁명 동지들과 그 가족들을 도왔다. 선생도 이러한 취지에 맞추어 국제혁명자후원회의 국내 책임자가 되어 활동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활동을 펼친 선생에게 일제의 검거망이 미치지 않을 리 없었다. 결국 선생은 국내에서 동지들의 도움으로 일시 피신해 있기도 하고 만주로 망명해 있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1931년 3월 14일 고향인 용인에서 일경(日警)에 피체되어 징역 3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옥중에서 선생은 심한 고문으로 폐결핵과 복막염에 걸려 같은 해 5월 6일, 42살의 한창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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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740 이렇게 살라.|2| 2004-12-02 정창화
75739 (코미디)어느 개신교인의 천주교 전도법 ㅋㅋㅋ|1| 2004-12-02 김종민
75735 12월의 독립운동가 2004-12-02 양대동
75734 이런 지도자가 되라....|2| 2004-12-02 정재훈
75732 북 “남한의 대북 개혁·개방 주장은 망상” -허상만 쫏고있 었군 2004-12-02 양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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