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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경종 때 임금에게 ‘고발장’이 접수되었다. 노론 세력이 임금을 살해하려 했다는 고발이었다. 유교정치에서 임금의 살해음모만큼 큰 죄는 없었다.
즉시 ‘피바람’이 불었다. 이이명 등 ‘노론 4대신’이 처형당한 것이다. 이이명은 왕위를 찬탈하려 했다는 죄를 덮어쓰고 죽었다. 노론 진영은 구심점인 대신을 한꺼번에 잃고 말았다. 순식간에 쑥밭이 되었다. 정권은 소론에게 넘어갔다. 소론이 집권당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다. 경종이 사망한 것이다. 36세의 한창나이였다. 재위 4년 2개월 만이었다. 경종은 평소 몸이 약했다. 허약한 체질이었다. 집권당인 소론에게 경종의 죽음은 청천벽력이었다. 반면 노론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재기의 기회였다. 이들에게는 정권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임금의 사망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경종을 이어 영조가 즉위했다. 노론은 기다렸다는 듯 반격에 나섰다. 죽은 ‘4대신’의 ‘명예회복’을 추진했다. 그러면서 소론 세력 가운데 ‘원흉 5적’을 처형하라고 ‘역공’을 폈다. 영조는 노론의 지지로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노론으로서는 당연한 정치공세였다.
그렇지만 영조가 누군가. ‘탕평임금’이었다. 아무리 노론의 지지로 왕위에 올랐다고 해도 보복만을 일삼아서는 정국이 안정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노론에게 돌아온 정권을 다시 소론에게 넘겨주었다. 이것이 ‘정미환국’이었다.
그렇다고 소론 세상이 다시 온 것도 아니었다. 소론은 임금이 노론 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소론 정권은 노론과 ‘상생’하는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노론 한 사람을 기용하면 소론도 한 사람 기용하는 식으로 탕평책을 폈다. 이렇게 기용된 인물들을 ‘탕평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노론은 이것이 불만이었다. 노론 대사헌 조관빈이 상소했다. “전하께서 당을 없앤다고 하시더니 두 당 외에 또 한 당을 보태서 음과 양 외에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닌 것이 하나 나와 모두 셋이 되어 군자도 되지 못하고 소인도 되지 못합니다.” 영조는 하지만 줄다리기를 하면서 정국을 이끌어갔다.
영조 9년에는 흉년의 여파로 연초부터 뒤숭숭했다. 굶어죽는 백성이 속출했다. 민심이 흉흉했다. 영조는 민심을 다스리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노론에게는 흉년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노론의 관심사는 오로지 정권이었다. 경종 때 처형당한 ‘노론 4대신’의 신원(伸寃)을 영조에게 건의했다. 억울하게 죽은 원한을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4대신’ 가운데 그동안 2명은 신원이 되었고 이이명과 김창집이 아직 신원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노론에게는 굶주려서 죽어 가는 사람보다 이미 죽은 사람의 명예회복문제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지금 국가보안법 폐지문제를 놓고 싸우는 정치판을 보면 영조 당시를 떠올리게 하고 있다. 국민은 경기침체의 나락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데도 오로지 싸움뿐이다. 욕설이 난무하고 거친 몸싸움까지 벌어졌다는 보도다.
그나마 영조 당시에는 중심을 잡는 사람도 있었다. 임금인 영조가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에 격분, 노소론의 영수를 과감하게 퇴진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빈자리에 탕평파를 기용했던 것이다.
지금은 중심을 잡으려는 사람조차 없다. 있다고 해도 싸움판에서 대세에 밀리고 있다. 소수의견이 되고 있다. 이러다가는 산 사람 입에도 거미줄을 쳐야할지 모르겠다는 얘기가 나올까 걱정들이다. 말로만 외치는 ‘민생’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면피용’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 고작 연말연시 선물 주고받기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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