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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은 네덜란드 출생으로 심리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사제가 되었으며 노틀담, 예일,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경력을 쌓은 영성 신학자이다. 그는 명문대학 종신 교수직을 마다하고 토론토 라쉬공동체로 들어가 1986~1996년까지 10여 년 간 정신지체장애인들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본받아 사랑을 가르치며 실천했던 인물이다.
그는 "참되고 완전한 자유는 하강이동(下降移動), 곧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데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성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위대한 역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내려와서 우리 가운데서 종으로 살았습니다. 신의 길이란 실로 내려가는 길입니다"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삶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보게 된다.
첫째로 예수님은 하향지향적인 삶을 사셨다. 그는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 높은 보좌에 계셨지만 그 곳에서 낮고 천한 세상으로 내려오셨다. 이것이 소위 성육신, 즉 도성인신의 신비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된 예이다. 예수님의 하강이동이 낮고 천한 죄인들을 만나 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셨다.
그런데 오늘의 세태는 어떠한가? 세인들은 차치하고라도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위를 향하여 올라가려고만 한다. 예수 믿는 목적이 자신들의 성취만을 위함이고 기도의 제목도 여기에 집중되는 듯 하다.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의 기복적 신앙 양태는 상향지향적 삶의 전형적 모습이 아닌가 싶다.
둘째로 예수님의 삶의 모습은 자기를 비우는, 즉 무소유의 존재 양태로 사셨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은 자신이 친히 가난하게 사셨다. 대주재 되시는 주님께서 모든 권세도 내어놓으시고 친히 종이 되셨다. 그리고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서 아무 것도 갖지 않으셨다.
에리히 프롬이 말한 대로 사람은 존재양태로 살아야 하는데 많은 사람이 소유양태로 살고 있다. 얼마나 소유해야 만족한가? 얼마나 권력을 가지고 지배해야 만족한가? 얼마나 향락을 누려야 만족한가? 그 결과는 권력의 노예, 물질의 노예, 향락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지 않은가?
셋째로, 예수님의 삶의 모습은 내면 지향적인 삶이었다. 즉 예수님은 밖으로의 이동보다는 '안으로의 이동'에 힘쓰는 생활이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사막에서 행하셨던 40일 금식기도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새벽 미명에 기도하심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십자가의 쓴 잔을 마실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대화는 예수님의 영성을 깊게 하셨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침묵하는 가운데 내 자신의 모습을 올바로 보고, 늘 하나님과 대화하며 그의 음성을 듣고 깊은 영성을 가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타자를 위한 존재로 사셨다는 것이다. 바로 자애(自愛)가 아니라 타애(他愛)의 모습인 것이다. 이기적 삶이 아니라 이타적 삶을 사신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 구원을 위해 온전한 대속물로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다. 예수님이야말로 희생과 봉사의 삶을 온전히 사신 분이시다.
현대사회의 비극이 어디 있는가?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이든, 모두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데 있다. 그 결과 이 세상은 오늘도 갈등과 분쟁, 전쟁으로 치닫고 있다. 특히 한국사회를 보면 모두 거리로 뛰쳐나와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외쳐대고 있다.
한국교회 강단 위에서는 설교자들이 열심히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설교하고 있다. 강단 아래서는 말씀을 열심히 듣고 은혜를 받는다. 그런데 듣는 자들이나 설교자들의 생활하는 실제 모습은 예수님의 삶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아서 안타까울 뿐이다. 예수님의 참 제자 됨은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요, 이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라 믿는다.
개신교 역사 1백 년을 조금 넘긴 우리나라에는 수만 명의 성도들을 자랑하는 대형 교회들이 있다. 현재 세계의 20대 교회 중에 절반 이상을 한국 교회가 차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기독교 역사에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적 같은 단기간의 급성장에 온 세계 교회는 놀라며 지금 한국 교회를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교회의 성장과 기독교인의 신앙 성장이 서로 정비례 관계가 되지 못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뼈아픈 현실이다. 나라 안의 온갖 부정과 비리 사건의 핵심에는 기독교인들이 꼭 포함되어 있으며 이제는 교회조차도 부정과 비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여 세간의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찌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가 이처럼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단순한 대답일지 모르지만 작금의 안타까운 현실은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교회는 성도와 세상을 섬기는 것이 그 존재 가치의 본연일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사람으로 내려오셨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을 섬겨주신 모습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심지어 예수께서는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그의 살과 피까지 인류를 위하여 내어주시는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교회는 당연히 예수의 본을 받아 성도와 세상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성장 이데올로기의 망상에 사로잡힌 교회는 더 이상 성도와 세상을 섬기는 본연의 자리를 지킬 수 없었다. 오히려 성도를 교회 성장의 전략적 도구로 생각하여 성도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위한 성도의 공식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또한 세상을 섬기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주목을 받아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한국교회는 섬김을 받으려는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철저한 자기갱신을 통하여 성도와 세상을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만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고백한다면 반드시 주님처럼 낮은 자리로 내려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자기를 버리고 이웃을 섬기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교회에도 어느덧 세상의 경쟁논리가 스며들어 큰 교회, 유명한 목회자, 부유하고 많이 배운 교인을 자랑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것을 버리고 이웃을 섬긴다는 것은 용기 있는 선택이 수반되어야 하는 결단의 행동이다. 그 결단은 주님처럼 죽는 결단일 것이다.
그렇다. 한국교회가 죽는 결단을 하지 않으면 부활은 없을 것이다. 주님이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죽으심으로 부활의 영광을 체험하셨듯이 한국교회도 스스로의 살과 피를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자기갱신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우리 민족의 소금과 빛으로 희망을 주는 교회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시는 성육신의 계절을 맞이하여 한국교회는 교회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한국교회는 이 민족에게 희망을 줄 수 없다. 아기 예수의 성육신의 사건을 한국교회는 온몸으로 드러내야할 때이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꺼져가는 심지를 돋우고 빛을 발해야 할 것이다.
은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