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0월 26일 <뉴스앤조이>에 "부교역자는 조사와 방불하다"라는 글을 썼다. 그러나 더는 부교역자는 조사와 방불하지 않았다. 이는 부교역자가 조사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광성교회 부목사들이 노조에 가입함으로써 더는 담임목사와 부목사가 주종의 관계가 아니라 사용자와 노동조합원의 관계로 되어버렸다.
부목사 8인이 노조를 선택한 이유는?
이제는 법적으로 사용자가 노동자를 함부로 하거나 해고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담임목사이고 당회이고 노회이고 그들을 해임할 권한이 없어진 것이다. 그들은 이제 국법의 보호 하에 있게 된 것이다. 광성교회의 평생직장이 가능해진 것이다. 나아가서 함부로 사용자가 부교역자에게 인권침해를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제는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부당한 행위를 하면 국법에 처벌을 받게 되는 관계로 변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 기독교계에서 충격적인 일이다.
그간 기독노조는 교회의 관심이 되어왔고 우려 반 기대 반 속에 세인들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계에 기독노조가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인가? 아니면 부정적으로 영향을 끼칠 것인가? 전에는 교회의 직원들만이 노조에 가입을 했는데 이제는 목회자까지 가입하게 되는 세계 초유의 사태를 가져오고 말았다.
이 사태에 대해서 총회와 노회는 달갑지 않은 모습으로 생각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지만 일단 국가법과 교회법과의 관계성 정립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현재 기독노조가 어떠니, 저떠니 해도 기독노조는 국가(노동부)의 인준을 받은 합법적인 노조단체다. 이제 노조원에 대해서 인권을 침해하거나 부당한 이익을 주면 노동법에 걸리게 되어있다. 심하면 입건까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성직자의 노동자 시대가 열린 것이다. 법적으로 얘기하면 종교법으로 보호를 받던 이들이 종교법의 한계를 느껴 국가법으로 이동한 것이다.
현재 총회 헌법에는 법적으로 노회를 가입하라는 것도 가입하지 말라는 것도 없다. 단지 정서상으로만 부정적으로 생각할 따름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감정만 갖고서는 이 일을 해결할 수가 없다. 상대는 종교법이거나 흔히 관행상 있을 수 있는 관습법이 아니라 국가에서 정식으로 인정하고 있는 노동법을 갖고 다가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더는 교단의 종교법이 아니라 노동조합 조합원으로 노동법의 보호를 받는 입장이 된 것이다. 총회나 노회, 당회 차원에서도 부당해고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종교법과 실정법의 관계는 다윗과 골리앗의 관계라는 것이 여실히 증명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목사들 8인이 노조에 가입한 것 자체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왜 가입했는지, 즉 종교법을 벗어나 국가법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그 이면의 것을 파악해 보자. 노조에 가입한 행위에 대해서 정서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왈가왈부하는 것 보다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광성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수많은 교회에 해당될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인권의 침해를 당한 부교역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는 문을 열어놓은 것이다. 노조에 대한 사회 여론의 부정성이 있음에도 그들이 노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행위는 더는 종교법이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없다는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성명서를 통해 그들의 노조가입 동기를 살펴보자.
첫째, 그들의 인권 침해다. 광성교회 부목사들은 불법과 부도덕성을 행하는 현 담임목사에 대해서 지지행동을 하지 않았고, 담임목사의 말에 소극적 행동만 일삼았다. 그러다 보니 담임목사나 담임목사를 지지하는 교인들한테 많은 인권침해를 당했다. 교역자로서 때에 따라서 교회 버스 운전기사한테 맞기도 했고, 늘 비아냥거림을 경험했고, 심한 욕설과 소문에 시달리기도 했다.
심지어 여자 목사는 성도들로부터 xx년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리고 전직 총회장의 아들인 M목사는 성도들한테 뺨을 얻어맞기도 했다. N목사는 4시간 동안 사표수리를 이유로 당회에 감금당하기도 하고 교구장이라는 지위를 빼앗기고 기도원으로 출근을 하는 불합리성이 벌어지기도 했다.
둘째, 담임목사의 불법행위다. 현 담임목사는 당회결의 없이 제직회를 통해서 1억 1천만 원을 회계사 비용으로 외부에 유출했고, 금년 5월 9일 이후 당회를 전혀 열지 않는 것이다. 12월 5일에는 혼란한 가운데서도 '스크린 제직회'를 열어 날치기로 안건을 통과시키려 했다. 그리고 12월 17, 20일 양일간에 걸쳐서 8인의 부목사 축출과 노회 탈퇴 서명을 받은 것이다.
노회가 빨리 간섭하지를 않고 남의 집 불구경하는 듯 너무 서서히 움직이자, 부목사들은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기에 여러 번 담임목사에게 불법을 행하지 말 것을 용기 있게 외쳤지만 그는 막무가내였고 일방적으로만 밀고 나갔기에 어쩔 수 없이 노조에 호소한 것이다.
셋째, 노회의 늑장 대응이다. 노회는 노회의 입장이 있겠지만, 이번 광성교회의 사태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다. 제직회의 불법 집회나, 5월 9일 이후에 당회가 한 번도 열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고나, 임시당회장 파송과 같은 액션을 전혀 취하지 않은 것이다. 그저 스스로 수습되기만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단지 수습위원 2명만 선임한 상태에서 어떤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보고차원에서만 머물 뿐이었다. 명년 1월 11에 있게 될 임시노회에서 새로운 액션을 취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부교역자들은 노회의 늑장 대응에 더는 기다릴 수만은 없던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그들은 다른 사적, 공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심각한 인권침해와 담임목사의 불법행위, 교구장 박탈을 통한 해임의 불안, 담임목사의 노회 탈퇴를 위한 서명작업, 노회의 늑장 대응 등의 이유로 자신과 교회를 구하고자 노조에 가입한 것이다.
그들은 가십과 더불어 정신적 고문인 인권침해를 수십 차례 받은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고, 제직회를 불법으로 열고, 당회는 불법으로 열지 않고 경호원을 세우면서까지 당회원의 당회실 출입을 저지하며, 장로교 원칙을 거스리는 담임목사의 막가파적 행동을 수차례 목격하고 고발한 용기있는 장본인이며, 성경의 원리를 따라 그것에 대해 끓는 양심을 갖고 몸부림을 치면서 직접 실천하고자 했던 당사자들이다.
그러면 우리는 기독노조 가입한 목회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가? 먼저 부정적으로 생각해보자. 조사와 방불한 그들이 감히 왕이신 담임목사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담임목사나 노회 어르신네들이 보기에는 반역죄이고 하극상이다. 부목사들은 그저 위임목사를 받들고 보좌해야 하는 조사이기 때문에 떠나는 그날까지 담임목사의 말에 따라 수종 들 듯 움직여야 하는 종의 신분에 불과한 것이다. 위임목사를 보좌하지 못했기에 헌법을 어긴 것이다. 그러잖아도 전국이 노조 때문에 골치가 아픈데 목회자까지 노조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부도덕한 일인가?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그들은 더는 신분상 조사이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들은 당당히 민주주의 국가에서 담임목사처럼 말씀과 성례전을 행사할 수 있는 거룩한 성직을 가진 자들로서, 자신들의 권리를 갖고 아무리 담임목사의 말일지라도 불법은 지지하지 않으며, 용기를 갖고 억눌린 인권침해에 당하고만 있지 않고, 천부인권설에 따라 하나님이 주신 인권을 다시금 확인하고, 무방비적 해임을 당하고만 있지 않으며, 어르신네들의 '불법 부목사'라는 닉네임을 고려치 않고 끝까지 담임 목사위에 있는 진리를 추구해서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없이 바른 길을 가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들을 배척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입장을 이해할 것인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향유를 부을 것인가?
그들의 행동은 남들이 보기에 급진적이지만 그들은 그들의 운명과 함께 해야 할 처자가 있고, 대교회 목사출신이라는 낙관적인 미래가 보장되어 있음에도, 기도한 끝에 조금 배고프지만 용기 있게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성명서에도 나와 있듯이, "자신들의 권익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순진한 사람들이다. 훈수를 두자면 노조라는 것 자체가 자신들의 권익을 생각하기 때문에 가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돌을 던지기보다는 그들이 당한 모욕적인 인권침해와 개도 안 내쫓는 동지섣달 엄동설한에, 담임목사로부터 오는 보직 해임에 대한 불안과 염려, 브레이크 없는 담임목사의 불법행위에 대한 용기 있는 의분, 검찰로부터 무혐의 처리된 원로 목사의 명예를 세워드리기 위한 장유유서의 정신을 온몸에 실천하고자 했던, 그들의 입장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들이 조금 급진적이고 괘씸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편견과 오해의 옥합을 깨어버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충정심에서 그들을 향한 이해와 사랑, 용서와 대견함의 값비싼 향유를 붓는 여유로움이 있어야 한다. 우리 시대의 정의롭고 용기 있는 약자는 보호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부교역자들의 인권침해, 물꼬 트는 결단
그것은 노조에 가입한 것보다 그들의 인권과 용기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지는 나아가서 한국의 교회개혁 부분 중 부교역자들의 심각한 인권침해의 극복에 물꼬를 틀 수 있는 귀한 결단이기도 한 것이다. 그들의 행위가 긍정적 기능으로 승화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리고 조금 서툴지만 노조를 가입하는 무리수를 써서라도 교회의 노회탈퇴를 막으려는 그들의 행위는 장로교 목사로서 가상한 것이다. 장로교회는 노회가 있기에 의미가 있다.
현재 그들은 말씀과 성례전을 위해서 담임목사와 함께 부름 받은 목회자이지만 교구장까지 박탈당할 위기에 처한 날갯죽지가 부러진 힘없는 사람들이다(일부는 이미 교구장직을 박탈당했음). 노회가 개입하지 않고 잠잠한 상황에서, 즉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환경에서 그들은 교회와 자신들을 위해서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방비책이 기독노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노조에 가입해 본 적도 없고 기초적인 노조의 기능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면 노조의 탈퇴가능성도 비친 사람들이다. 이러한 상황에 우리까지 그들에게 돌을 던진다면 그들은 스데반처럼 힘없이 죽어갈 것이다. 그러면 약자가 설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그들은 스데반이 맞은 불신과 편견, 오해, 괘씸함의 돌세례보다는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그리스도에게 부은, 모카 커피보다 더 진한 향기를 가진 사랑과 이해, 동정의 귀한 향유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황규학 목사/교회법연구원, 에큐메니칼 연구소, PCU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