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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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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수 [sooyaka] 쪽지 캡슐

2006-03-25 ㅣ No.97214

사순 제4주일      2006년 3월 26일


요한 3, 14-21.


오늘 복음은 니코데모와 대화중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한 부분입니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이며 유대 최고회의 의원이고, 그 시대 유대아의 저명 인사였습니다.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니코데모는 유대아의 지도급 인사로서는 드물게 예수님에게 호감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 그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복음이 전하는 그 대화 내용은 그 당시의 속기록이나 녹취록이 있어서 옮긴 것이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수십 년이 흐른 다음, 요한복음서를 집필하는 공동체가 제자들로부터 전해들은 바를 기억하면서, 그들이 믿고 있던 바를 그들의 방식으로 기록하여 남긴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서 안에서 읽어야 하는 역사적 사실은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오늘 복음은 이 말씀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세의 구리 뱀에 비유한 초기교회의 말씀입니다. 구리 뱀 이야기는 구약성서 민수기(21,4-9)에 나오는 고사(故事)입니다. 옛날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헤매고 다닐 때, 불뱀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물었습니다. 물린 사람들은 죽어갔습니다. 모세가 구리로 뱀을 만들어 높이 달았더니, 그 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모두 치유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서는 이 고사를 언급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구원인 배경으로는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그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신 결과 십자가에서 당신 스스로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헌신의 결과로 발생한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듣고, 우리도 같은 사랑을 실천하여 우리 자신만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치유되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하느님은 심판하시지 않지만, 사람이 하느님의 빛을 외면하고 악한 일을 저지르며 어둠 안에 머물러서 심판을 자초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고, 그분 안에 하느님의 진리를 읽어내어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빛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느님이 구원이십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서론에서 이미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빛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건만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1,4-5). 같은 말이 오늘 복음에도 반복됩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분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생명을 빛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진리를 사는 놁을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이 가르치고 실천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배워야 하는 진리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밖에 알지 못하는 어둠을 버리고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빛을 따라 살겠다는 신앙인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자유와 무관하게 주어지는 혜택이 아닙니다. 구원은 맹신(盲信)이나 광신(狂信)에 대한 보상도 아니고, 인간의 희생적 신심(信心)행위에 대한 포상도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빛으로 더 넓은 세상을 받아들여 더 큰 자유를 누리며 사는 데에 있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머물러 있으면...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조명하는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을 자유롭게 합니다. 신앙은 비굴한 순종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기 일신의 영달에 도움이 될 하느님 혹은 사람에게 빌붙어서 그 덕분으로 한 자리 얻어서 뽐내며 사는 처세술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도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복음서는 그 사랑이 그리스도 신앙인의 정체성이라고 말합니다.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사랑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하느님 자녀의 당당한 몸짓입니다.


흔히 신앙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교리를 믿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 분인데 한 분이라는 삼위일체 교리의 모순된 말을 믿고, 동정녀가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라 생각합니다. 흔히 지킬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금육과 금식을 비롯해서 주일 미사참례 의무와 고해성사 의무 등 교회가 만든 계명들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총을 얻는 방법을 잘 강구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전 대사와 한 대사를 얻고, 여러 신심 행위에 충실히 참여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들은 신앙의 핵심을 잃고 지엽적인 것에 매달리는 행동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합리적 사고를 버리는 행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교리를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지켜야 할 것을 강요하는 율사들에게 예수님은 비판적이셨습니다.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렸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루가 11,52). 신앙은 은총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닙니다. 신앙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사람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섬겨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섬기고자 하면 나를 따르시오.”(요한 12,26). 예수님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배워야 하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으면,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높아지는 곳에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어둠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어둠을 더 사랑했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만든 교회의 제도와 법들이 과연 예수님을 따르게 하는 것인지 반성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아직도 유럽 중세의 어둠 안에서 만들어져서 교회 안에 자리 잡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높은 사람이 되었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복장과 호칭들이 있습니다. 유럽 중세적 어둠의 산물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어둠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감춰버리는 어둠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의 박수와 갈채에 영합하기 위해 어둠은 더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어둠 안에는 인간의 허세와 대중의 비굴함은 보여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빛과 예수님이 실천하신 진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요한 제1서(4,8)는 말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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