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
<1>
요즘 아이들은 대체로 자기 생일에 민감한 것 같다. 자기 생일을 잘 기억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미리 생일잔치 계획을 세우는 아이들도 있는 것 같다. 생일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던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조금은 부럽기도 하다.
생일이 뭔지도 모르고 자란 세대이면서도 우리 부부 역시 아이들 생일에 비교적 신경을 많이 써주었지 싶다. 어른들 생일보다 아이들 생일을 더 많이 챙겼지 않나 싶다. 아이들의 생일을 챙겨 줄 때마다 부모 없는 아이들의 처지를 생각해야 하는 묘한 부담도 지니면서….
아이들이 자라서 부모 슬하를 떠나 살고 있는 지금에도 집에서 아이들 생일을 챙겨주는 일은 좀더 연장이 되었다. 내 아이들이 빠져 나간 자리를 두 조카녀석이 메우고 있는 상황이니 조카녀석들의 생일을 챙겨주는 일도 내 몫이 되었다.
하기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엄마가 살아 있을 때도 나는 조카녀석들의 생일까지 신경을 쓰며 살았다. 가까이에 있는 조카녀석을 뿐만이 아니라, 멀리에서 사는 피붙이들과 겨레붙이들과 인연붙이들의 생일을 내 나름대로 챙겨주며 살아왔다.
우리 집의 달력에는 많은 사람의 생일이 표시되어 있다. 아내는 연초마다 일삼아서 그 작업을 한다. 달력장이 넘겨질 때마다 나는 그 달의 생일 표시들을 눈여겨보고, '가족메일'에 일괄적으로 생일 축하 메시지를 담기도 하고, 당일에 축하 전화를 해주기도 한다.
많은 피붙이, 겨레붙이, 인연붙이들의 생일을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다. 그 대신 달력에다 표시를 내놓으면 간단히 축하 전화 정도는 해줄 수 있다. 물론 달력장을 보는 일조차 깜빡 잊고 지나는 수가 있지만, 나중에라도 전화를 해주면 내 마음이 편하다. 축하 전화 한 통으로 상대방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은 현대 문명의 이기 덕이기도 하다.
<2>
내 아버님의 생신 풍경을 종종 떠올려보곤 한다. 내 아버님은 젊은 시절부터 생신 잔치를 하시곤 했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부터 아버님 생신날마다 아침 일찍 동네의 여러 어른들을 초대하는 일을 맡아 했으니, 아버님은 삼십대 시절부터 생신 잔치를 하지 않으셨나 싶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음식을 장만한 다음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를 비롯하여 동네의 여러 어른들을 오시게 해서 아침을 나누는 것이었는데, 모든 것이 풍족치 않았던 그 시절에는 제법 큰 잔치인 셈이었다.
나는 아버님 생신날 새벽마다 아버지가 일러준 집들을 다니며 연통을 하느라고 마라톤을 해야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일러준 '말'을 정확히 전하느라고 적이 애를 써야 했다.
우리 집의 음식 맛을 기억하는 동네 어른들은 나로부터 연통을 받을 때마다 적이 기뻐하시곤 했다. 모두들 아버지가 '형님'이라고 호칭하는 분들이었는데, 아버지는 동네 어른들을 잘 모시기 위해 신경을 많이 쓰시는 것 같았다.
동네 어른들은 내 아버지의 생일 음식을 자시러 오시면서도 아무런 부담을 갖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생일잔치 초대에 빈손으로 가고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님의 생신 잔치는 세월과 함께 동네 어른들이 한 분 한 분 세상을 뜨시면서 규모가 축소되는 듯했다. 동네 어른들이 앉았던 자리에는 점차 나이가 들어가는 조카님들과 사위들과 주변의 '신앙 가족'들이 앉게 되었다.
생각하면 아버님 생신날마다 우리 집에 와서 아침을 드시던 동네 어른들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그 분들 모두, 또 내 아버님도 이미 예전에 고인이 되셨다는 그 당연한 사실이 이상한 슬픔을 갖게 한다.
참석하는 이들은 달라졌어도 아버님의 생신 잔치는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특히 누님이 아버님의 생신 잔치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누님은 출가한 다음해부터 아버님 생신을 챙기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님 생신에는 꼭 친정엘 왔고, 잔치 비용을 도맡아 대곤 했다.
언젠가 한번은 손님들을 치르고 난 다음 가족끼리 앉아서 아침을 먹을 때 내가 어머니께 물은 말이 있다. 왜 그렇게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의 생신 잔치에 신경을 쓰고 공을 들였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는 조실부모를 헌 양반 아녀? 여섯 살 때 아버지 여의고 아홉 살 때 어머니마저 여의고 불쌍허게 사신 분 아녀? 당연히 생일이라는 게 뭔지두 모르고 살았을 테구…. 조실부모허구 불쌍허게 자란 양반이라는 걸 생각허니께 자연히 생일을 잘 챙겨주고 싶어서, 해마다 생신날 잔치를 허게 된 겨. 그리고 아버지 생일이 음력 오월 단오날이다 보니께, 누구나 쉽게 기억할 수 있는 날이어서, 잔치를 한번 하고 보니께 해마다 안할 수가 없더라구."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머니께 감사하는 마음도 가슴에 아로새길 수 있었다.
<3>
같은 고장에서 사시는 세 분의 사촌 형님 중에서 작은 형님은 몇 년 전까지 해마다 생신 잔치를 하셨다. 생신날 아침에 인근의 친척들을 초대해서 아침 식사를 함께 하곤 했다. 형수님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작은 형님의 생신 잔치는 순전히 형수님의 의지로 시작된 일이었고, 또 형수님의 수고로 가능한 일이었다.
작은 형수님은 내 아버님을 존경했다. 내 아버님을 본받고자 했고, 아울러 아버님에게 하신 어머니의 행실을 본받고자 했다. 작은 아버님 생전에 해마다 생신 잔치를 하신 것을 잘 기억하는 나머지 작은 형수님은 그 본을 따르고자 했다.
작은 형님 내외분이 쉽게 천주교 신자도 된 것도 실은 작은 아버지를 본받고자 하는 마음이 최초 동기일 터였다.
작은 형님의 생신에 여러 친척들이 모여 아침식사를 함께 하는 풍경은 옛날 내 아버님의 생신 잔치를 떠올리게도 해서 나는 더욱 고마운 마음이었다. 작은 형님의 피붙이들과 겨레붙이들이 일년에 한번 형님 댁에 모여 아침을 나누는 것은 정녕 아끼고 싶고, 나도 본받고 싶은 일이었다.
그런데 2년 전부터 작은 형님의 생신 잔치는 중단이 되고 말았다. 2003년 여름 큰아들을 앞세운 탓이었다. 내 당질이 서른여섯 나이로 병을 얻어 세상을 뜬 탓에 작은 형님은 큰 상심을 안고 사시는 처지가 되었다.
자식을 앞세운 처지에서 무슨 염치로 생일을 먹느냐는 생각이실 터였다. 당신 생신에는 아들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고 다시 슬픔도 커질 일이었다. 충분히 이해가 되고 연민도 갖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도 없지 않다. 비록 자식을 앞세운 처지이지만, 형님께서 당당하게 생신을 지내셨으면 싶다. 자식 앞세운 일로 말미암아 형님이 노년에 생신마저 잃고 사시는 게 아닌가 싶고,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한량없다.
<4>
엊그제 22일(음 2.23)은 내 생일이었다. 50대 고개 마루에서 맞는 생일이니 각별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내 생일은 대체로 '사순절' 안에 위치한다. 천주교 신자인 내게 사순절은 극기와 절제를 하는 시기이다. 그런 사순절 안에 생일이 위치하곤 해서 스스로 내 생일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왔다.
내 생일이 더러 사순절 밖에 위치하는 때도 있다. 그런 때는 저녁에 가족과 외식을 하기도 한다. 적게나마 그런 기억들이 있다.
올해도 내 생일은 사순절 안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예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어머니와 마누라가 내 생일을 챙겨주어 아침에 미역국이야 끓여 먹었지만, 올해는 좀더 쓸쓸한 기분으로 생일을 지내야 했다. 다시 한번 세상 떠난 가운데 제수씨 생각을 하며….
제수씨가 살아 있다면 아침에 축하 전화도 오고, 제수씨가 미리 미사예물을 봉헌하여 가족이 함께 감사미사도 지냈을 터였다. 또 어느 해처럼 제수씨가 마련한 음식으로 동생 집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올해는 제수씨가 떠나고 없는 그 빈자리가 시아주버니인 내 생일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제수씨가 없는 바람에 사순절 안의 내 생일은 더욱 쓸쓸한 양상이 되고 말았다. 괜히 서글픈 심회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노년으로 가면서 내 생일이 마냥 쓸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순절 안에 위치하는 때는 여전히 극기와 절제를 우선해야 하겠지만 사순절 밖에 위치하는 때는 가족 행사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엄마를 대신하여 우리 부부가 더욱 정성으로 생일을 챙겨주어야 하는 조카녀석들이 큰아빠의 너울가지 아래에서 명랑하고 씩씩하게 구김살 없이 자라고 있으니, 언젠가는 그 녀석들이 큰아빠의 생신을 저희들 엄마처럼 잘 챙겨주는 날도 있을 것이다.
2006-03-24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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