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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부활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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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헌 [dhsong] 쪽지 캡슐

2006-04-15 ㅣ No.98141

 

그녀는 부활했을까?


1.

그 여자를 처음 만난 것은 어느 초여름, 허름하고 초라한 공장에서였다.

그 곳은 허름한 처마와 블록 담을 잇대어 덮은 슬레이트 지붕에 천막을 덧씌워 만든 어둡고 좁은 공간에 낡은 계측기 몇 대를 겨우 갖추어 놓은, 공장이라 하기에는 너무 민망하여 차라리 창고라 하는 편이 솔직할 만한 곳이었다. 추위나 더위에 대한 대비는 물론이고, 찌든 기름때를 씻어 낼 수도꼭지 하나 없는 곳이었다. 타는 갈증을 씻어낼 방책도 마땅히 없었다. 한 겨울의 추위야 아무리 맵다 해도 두어 벌 작업복을 덧껴입으면 될 일이지만, 여름날 무더위에는 속수무책인 곳이었다.

바람 한 올 들 틈 없는 그 움막(!)의 찜통더위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체통 따위를 찾을 겨를도 없었다. 긴 여름을 나는 그곳에서 늘 짧은 반바지에 끌신 하나로 보내야 했고, 어른 키 높이로 겹겹이 쌓아놓은 플라스틱 상자더미로 벗은 몸을 가린 채, 20촉 흐릿한 형광등 불빛에 의지하여 갓 연마공정을 거쳐 나온 뜨거운 쇠구슬 따위를 골라내고 포장하여 실어내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일과였다. 나는 그런 일터에서 그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를 처음 만난 그날도 그랬다.

여느 날처럼 하반신만 겨우 가린 채 땀으로 샤워를 하며 작업에 몰두하고 있을 때 누군가 거적문을 젖히고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싱겁게 기웃거리는 이웃의 귀찮은 발걸음에 일일이 마음 쓸 겨를이 없었으므로 나는 내 일에만 매달려 있었다.

새삼스런 기척에 눈을 들었을 때, 쌓아올린 상자더미 사이의 좁은 틈으로 낯선 어둠에 아직 눈을 익히지 못한 여자 둘이 들어와 서 있었다. 오십대로 보이는 여자 하나가 얇은 책자 한권을 들고 서 있었고, 그 당당한 등 뒤로 아직은 삽 십대로 보이는 그녀가 곧 숨어버리기라도 할 듯 움츠려 서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었다.



2.

나는 그들을 박대하지 않는다. 성가실 때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나는 무례하지도 당돌하지도 않은 그들 방문자를 구태여 피하지도 않는다. 사무실에 앉아 일할 때처럼 편안히 차나 음료를 대접하지는 못했지만 그때도 그랬다. 나는 젖은 땀수건으로 먼지를 털어내어 그들에게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일손이 바빠 일일이 응대할 겨를이 없음을 변명하는 대신 그들의 이야기를 성실하게 들어 줄 내 귀를 내 주었다. 그들은 말했고, 나는 들었다. 그들은 성경을 이야기했고, 죄에 물든 세상을 이야기했었다. 둘이 한 조가 된 그들의 방문은 여러 차례 더 이어졌다. 거의 한주일 간격으로 그들은 왔었고, 더러는 한 주를 걸러 찾아오기도 했었다. 주로 그들은 말하고, 나는 듣는 식이었다.

 

한 가지 제안을 했었다. 이야기를 시작하고 마칠 때에 함께 기도를 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들은 그들 방식의 기도를 하고 나는 내 방식대로 함께 기도를 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들은 반색하며 좋아 했었다. 뒷골목 허름한 공장에서 이루어지는 이 기묘한 기도모임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만남이 이어지고 얼굴이 익어지면서 차츰 나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쪽이 하는 이야기에 조금씩, 몇 마디씩 붙여가며 이야기했었다. 그쪽은 죄와 고통이 가득한 이 지상생활을 이야기 했고, 드디어는 오고야 말 심판과 종말을 이야기했다. 함께 올 하늘나라와 부활의 기쁨도 이야기했었다.

나는 죄와 고통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을 이야기했었다. 찜통 더위속의 그 고된 작업과 가난하고 고단한 삶 가운데에서도 내가 누리는 희망과 기쁨과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이미 오신 그분 나라에 대하여도 이야기 했다. 그분 나라는 내 안에서 아직은 겨우 겨자씨만큼도 안 되는 아주 작은 것이지만 희망과 기쁨으로 살아가는 내 하루하루의 삶에서 조금씩 커져 나갈 것이라는 희망도 이야기했었다.

 

그들은 성경을 앞세워 설복하려 애썼다. 나는 성경 안에서, 그리고 성경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듣고 배운 바를 이야기 했고 나는 믿고 따라 사는 것을 이야기 했다.

서로의 이야기에서 만나는 점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몇 달을 두고 이어진 그 대화에서 불편이나 충돌은 없었다.  그쪽은 대화가 껄끄러워지면 파트너를 바꾸곤 했으므로 때때로 이야기가 끊기거나 겹치기는 했지만, 서로가 서로의 처지를 존중했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를 생각했으므로  아프게 하거나 다치게 하는 일은 없었다.



3.

처음 그 움막 공장을 찾아왔던 그 젊은 여자의 이야기이다.


둘이서 조를 지어 그곳을 찾아오는 동안 그 여자는 이야기에 개입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녀로서는 대부분이 난해했을지도 모를,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에 때로는 방관자처럼 무심한 듯이, 그러나 대부분 조용하고 다소곳이 귀 기울여 주었다.


그 여름, 어느 해거름에 그녀가 나를 찾아왔었다. 하루의 활동을 마친 귀가 길에 그녀가 찾아왔었다. 언제나처럼 지친 걸음이었지만 슬픈 듯 묘한 여느 날의 표정은 웬 일인지 걷혀 있었다.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기도해 주기를 청했었고, 내 짧은 기도가 끝난 후 그녀는 아마 이제 더는 찾아오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 전날에도 그녀가 왔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둘이서 왔었다. ‘우리’는 그날, 주로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비교적 길게 나누었다. 나는 먼저 이 지상생활의 지긋지긋한 고통과 슬픔을 참고 이겨내면 마침내 천상의 영광과 행복의 나라를 누릴 수 있다는 그쪽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을 해 주었다.

그 다음 나는 지상생활에서도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나는 이 苦海의 삶이 천상의 행복을 위한 준비라면, 이 삶도 단지 슬프고 우울하고 아픈 것만이 아니라 여기서도 행복과 기쁨을 함께 맛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이야기 했다. 이 가난하고 고단한 삶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평화로움과 넉넉함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와 내 이웃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도 이야기했다. 이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 半白의 삶도 늘 절망적이거나 슬픈 것만은 아니며, 이런 삶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하느님 안에서 감사하며 살아가는 내 이웃들의 삶 또한 그리 초라하거나 무의미한 것은 아니리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웃을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 때로는 부딪히고 상처주거나 다쳐 아파하기도 하지만 서로의 체온을 스쳐 느끼며, 이내 용서하고 보듬어 주고 화해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이 삶이 우리가 현세에서 누릴 수 있는 작은 부활, 작은 천국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도 했었다. 이 가난하고 고단한 삶은 어쩌면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가신 그분을 닮아 사는 것일지도 모르며, 이런 삶까지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이 행복한 삶이 바로 천상의 평화와 행복을 위한 준비가 아닐까 하는 어설픈 이야기도 했었다.


마침기도를 할 때, 나는 크게 십자 성호를 긋는 내 손짓을 움찔 따라 오는 그 여자의 작은 손놀림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십자성호였다. 나는 생각했다. ‘그녀의 손짓은 오래전에 잊었던 기도의 몸짓이었을까? 단순하고도 무심한 손짓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을까?’



작별을 알리는 해거름의 그 마지막 만남에서 그녀는 (내가 기대했던 대로) 잃었던 자신의 옛 신앙을 이야기해 주지는 않았다. 짧게, 그녀는 자신의 가족들이 그녀에게 ‘차라리’함께 성당에 나가기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그녀가 이야기해 준 것은 아니다. 다만 혼자 생각하고 걱정했다.

그녀는 어쩌면 잠시 길 잃은 보편교회의 어린 양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방황과 갈등 끝에 이제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양 무리를 찾아 따라나서는 몸짓을 시작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이제 돌아 온 그녀를 나는 따뜻하게 맞아주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녀가 교회를 떠난 이유가 되었을지 모를 사연들도 생각했다. 그녀는 이웃의 소홀함에 외로움을 느꼈을까? 교회의 무관심이 혹 그녀를 아프게 했을까? 기도의 무응답에 혹 좌절을 느꼈을까?



나는 내 주위에서 신앙을 잃은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만난다.

곤궁한 이들이 시련을 이기지 못하고 하느님을 원망하며 돌아서는 모습을 만나고,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운 이들이 제 능력에 대한 교만과 과신으로 하느님을 외면하는 모습을 만난다.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배우자를 교회에 빼앗겼다며 원망하는 이들을 만나고,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에게 마음 다쳐 아파하는 이들도 만난다. 봉사자나 이웃의 소홀함과 교만에 속상해하는 이를 만나고, 성직자나 수도자의 독선과 독단을 슬퍼하는 이들도 만난다. 열심했다가 속상한 이를 만나고 처음부터 소홀했던 이들도 만난다.



4.

부활절이다. 예수께서 죽음을 떨치고 일어나, 죽음을 없애고 부활하신 날이다. 만방이 함께 그분의 부활을 축하하고, 만민이 함께 기뻐하는 날이다.


나는 모두가 마음모아 축하하고 기뻐하는 이 부활이, 교회 안에서 늘상 함께 만나는 우리들만의 부활이 아니라 잊혀 진 사람, 외로운 사람들이 모두 함께 기뻐하며 누리는 부활이었으면 좋겠다. 잠시 신앙을 잃었던 이들이 돌아와 함께 기뻐하고, 아파하고 슬퍼하던 이들도 모두 그분께로 돌아와 함께 기뻐하며, 그분의 부활을 축하하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단지 그분의 부활을 축하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아픔을 이기고 미움을 이기는 우리들의 삶에서 나날이 일어나는 작은 부활들도 함께 기쁘게 들어 바치는 부활이었으면 더 좋겠다.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이들이 미움과 독선에서 벗어나 아무도 홀로 善함을 고집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하며, 용서하고 화해하는 부활이었으면 좋겠다. 모든 이들이 함께, 서로 힘들고 아프게 하고 슬프게 했던 소홀함을 되돌아보고 용서를 청하는 부활이었으면 더욱 좋겠다. 

하느님을 바로 알아 모시지 못한 이들도 이제는 함께 알고 누릴 수 있으면 좋겠고, 미처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들도 각자의 길에서 부활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나날의 삶에서 부활을 체험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오늘, 그녀는 부활했을까? 그녀도 그분의 부활을 축하하며, 삶 속에서 체험하는 자신의 부활을 그분 앞에 들어 바치고 있을까? 아프고 슬펐던 일을 뛰어넘고, 혹시라도 있었을 작은 서운함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기쁘고 행복한 부활에 그녀는 함께 들어 와 있을까?




“......나는 (현재의)부활이요 (현재의)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11,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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