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속에서 고희(古稀)를 맞으신 사돈 어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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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살고 있는 남문리 진흥아파트로 지난 1월 이사온 후로는 시내를 가로질러야 하는 백화산 등산보다는 주로 들길 걷기 운동을 한다. 전에 동문리에서 살 때는 주로 백화산을 오르고, 백화산 너머 냉천골 길이며 상옥리 흥주사 길 등을 택해 걷기 운동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진흥아파트의 동쪽으로는 평천리와 천수만 들판길, 서쪽으로는 장산리, 남쪽으로는 남산리 송암리 반곡리 길을 번갈아 걸으며 색다른 묘미를 느끼곤 한다.
실은 다 그렇고 그런 길이지만, 고향에서 살면서도 일찍이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길에 대한 호기심은 늘 신선하고도 즐겁다. 처음 걸어보는 길, 언젠가 무심히 차를 몰고 지나갔던 길, 청소년 시절의 추억이 어려 있는 길을 걸을 때의 감미로운 기분은 갑자기 눈물을 머금게도 한다. 정녕 감미로운 슬픔도 함께 하는 그 묘한 흥겨움이 나는 정말 좋다.

▲ 어느 날 또 한번 '장명수' 바다를 가고 오는 20리 길 걷기 운동에 함께 한 가족들
ⓒ 지요하
고향 산천의 수많은 길들 중에서도 나는 '장명수'라는 이름의 바다로 가는 남산리 길을 제일 좋아한다. 물론 가장 많이 걷는 길이기도 하다. 태안 읍내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인 장명수는, 그리고 장명수로 가는 남산리 길은 내 소년 시절의 추억이 담뿍 어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혼자 시오리 길을 걸어 장명수로 망둥이를 잡으러 가곤 했었다.
내가 낚시를 해서 잡아오는 망둥이로 손수 찌개를 끓여 막걸리 안주를 하시며 아버지는 어린아들 칭찬을 많이 하셨다. 아버지의 칭찬에 나는 신이 나서 더욱 열심히 장명수로 망둥이 낚시를 가곤 했다.
다분히 식도락가 기질이 있으셨던 아버님은 말미잘 요리를 해보실 요량으로 한 번은 나와 내 바로 아래 누이를 데리고 손수 말미잘을 잡기 위해 장명수를 가신 적이 있었다. 말미잘은 눈에 띄지 않았다. 장명수 바다에는 없는 말미잘을 찾아서 아버지와 우리 어린 남매는 참으로 오래 바닷길을 걸었다. 바다에서 말미잘을 빼고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보았다.
그러다가 끝내 허탕을 치고 그 먼길을 돌아올 때의 허탈감과 피곤함은 가장 선명한 기억으로 남았다. 전설 같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한 그 아련한 추억은 오늘도 내가 장명수를 갈 때마다 다시금 그리움의 실체로 다가오곤 한다. 저 아스라한 바다, 드넓은 갯벌 위에서 너울거리는 그리움의 실체는 또 한번 공연히 눈물을 머금게도 하고….

▲ '장명수'에서 돌아오는 길에 규빈이가 다리 아프다고 해서 잠시 업어주었다. 규빈이는 올해 3학년이니, 엄마 잃은 어린 조카녀석을 업어주는 일도 올해가 마지막일 것 같다.
ⓒ 지요하
요즘은 장명수로 가는 남산리 길이 더욱 아름답고도 풍요롭다. 흙냄새, 물냄새, 풀냄새, 두엄냄새에다가 짭잘한 갯내음까지 있다. 또 한해의 농사철이 시작되어서 '약동'의 기운이 논둑길마다 함빡 차 있는 듯하다.
그리고 산기슭에는 개나리, 진달래, 벚꽃, 목련 따위 봄꽃들이 만발하여 계절의 화사함을 가슴 가득 실감시켜 준다. 또 밭둑이며 논둑길마다 토종 민들레와 제비꽃이며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옹기종기 피어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처럼 생명의 약동이며, 봄꽃들의 대향연이 남산리 들길에도 가득하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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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바다 장명수를 가고 오는 남산리 길에서도 역시 많은 농가들을 보게 된다. 수많은 농가들 중에서도 나는 너르면서도 호젓한 들판의 동쪽 한켠, 작은 야산 기슭에 있는 한 집에 자주 눈을 주곤 한다. 곧은 길을 버리고 일부러 그 집 가까이로 걸음을 하기도 한다.
그 집을 바라볼 때마다 성호를 긋기도 하고, 때로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그 집을 볼 때마다 '애틋함'을 느끼는 탓이다. 정말 애틋함이다. 애틋함의 실체를 느끼고 접한다는 생각에 더욱 애틋하고 또 애틋하다.
그 집은 지난해 12월 서른 아홉 젊은 나이로 세상을 하직한 내 가운데 제수씨의 친정이다. 내 제수씨가 나고 자란 집이다. 6남매 중의 셋째로 태어난 제수씨가 살림이 어렵던 시절 조금은 '가운데의 설움'도 느끼며 온갖 풀내음과 흙내음 속에서 자라난 집이다.

▲ 태안 읍내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 '장명수'를 가고 오는 길에서 쉽게 보게 되는 가운데 제수씨의 친정집
ⓒ 지요하
제수씨 덕분에 나도 그 집을 여러 번 가곤 했었다. 제수씨 결혼 이후로 그 집에서는 세 번의 혼사가 있었다. 10년 전에는 바깥 사돈 어른의 조촐한 회갑연도 있었다. 넉살이 좋은 편인 나는 어느 달밤에 사돈 댁엘 가서 바깥 마당의 들마루에 앉아 동생의 동서들과 술잔을 기울인 적도 있었다.
한 번은 제수씨를 내 차에 태우고 가서 친정 부모들이 애써 지은 농작물들을 이것저것 욕심껏 차에 싣는 제수씨를 보며 "딸 덕분에 비행기를 탄다는 세상에, 이 댁 딸은 완전히 도둑이로군요"라는 농담을 하면서 크게 웃은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장명수를 갈 때 이상한 두려움을 안았었다. 남산리 길을 걸으며 사돈 댁을 보게 될 것이 정말 이상한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길을 버리고 다른 길로만 다닐까 생각했었다. 장명수를 가는 데는 사돈 댁을 가까이 보며 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지만, 사돈 댁이 전혀 보이지 않는 다른 길들도 있기 까닭이었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 길을 버릴 수 없었다. 그 길을 걸으며 사돈 댁을 보는 일에서 '애틋함'을 느낀 다음부터는, 그 애틋함을 다시 느끼기 위해서도 자주 그 길을 걷게 되었다. 또 나는 그 길을 걸으며 그 집을 보며 세상 떠난 제수씨와 제수씨의 친정 부모들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 집으로 걸음을 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두 번은 그 집에서 아무도 볼 수 있었다. 집이 텅 비어 있어서 더욱 이상한 쓸쓸함마저 느껴야 했다. 아무도 없는 집의 마루에 잠시 앉아 있다가 나올 때는 이상한 섭섭함으로 발걸음이 좀더 무거워지는 듯했다.
한 번은 멀찍이에서 사돈 댁을 보니 바깥 마당에 두 내외 분이 나와 계시는 것이 보였다.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내 평생에 가장 빠른 걸음일지 모르게, 정말 나는 듯이 걸어 두 분께 다가가니 두 분은 반색을 하시는 중에도 안 사돈님은 왈칵 눈물을 지으셨다.
나는 진흥아파트로 이사온 후로는 장명수 길을 많이 걷는다는 말씀을 드렸다. 장명수를 가고 올 때마다 사장(査丈)님 댁을 보게 되고, 사장님 댁을 볼 적마다 성호를 그으며 두 내외분을 위해 기도한다는 말씀도 드렸다. 또 사장님 댁을 보게 되는 것 때문에 장명수를 자주 가게 되는 것 같다는 말씀도 드렸다.

▲ 지난 3월에는 가족이 함께 사돈 댁을 가기도 하고...
ⓒ 지요하
정말 나는 그런 마음이다. 정말이지 사돈 댁을 보게 되는 것 때문에, 또 그 애틋함 때문에 자주 그 길을 따라 장명수를 가는지도 모른다. 나는 늘 그런 마음으로 살고 싶다. 비록 제수씨는 이 세상에 없어도 사돈 댁과 우리 집의 각별한 인연을 잘 유지하고 되새기며 살고 싶다.
제수씨가 이 세상에 없다고 해서 사돈 댁과 우리 집의 인연이 끊어진 것은 절대로 아니다. 내 두 조카녀석은 사돈 댁 두 내외 분의 엄연한 외손주들이다. 내 조카녀석들이 외삼촌 외숙모라 부르고, 이모 이모부라 부르는 사람들과의 인연도 엄밀하다. 나는 모든 사돈들과의 인연을 정말 알뜰히 되새기며 살고 싶다. 장명수로 가는 남산리 길을 자주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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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떠난 내 가운데 제수씨의 친정 아버님, 강윤식 사장 어르신께서 지난 15일(음 3, 18) 칠순 생신을 맞으셨다. 그러니까 출가한 둘째 여식을 잃으신 날로부터 겨우 115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젊은 자식을 앞세우고 나서 그 이듬해, 그것도 100일이 겨우 지난 시기에 고희를 맞으시는 사장 어른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나는 사장 어른의 칠순 소식을 들었을 때 맨 먼저 그런 생각을 했다. 참으로 온 가족과 함께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맞아야 할 칠순 생신에 더더욱 자식 앞세운 슬픔을 한 가슴 안을 수밖에 없게 된 사장 어른의 처지를 생각하니 다시금 한숨이 나오고 눈물이 핑 돌았다.
사장 어른님과 안사돈님은 고희연을 극구 반대하셨다고 했다. 자식 앞세운 이가 무슨 염치로 칠순 잔치를 하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빈자리'의 슬픔 속에서도 아버님께 고희연을 열어 드리고자 하는 자식들의 마음도 완강했다. 자식들의 간곡한 요청에 사장 어른 내외 분은 칠순 생신 하루 전에서야 겨우 허락을 했다.
참으로 어렵사리 가지게 된 고희연이었다. 근처 음식점을 빌려 저녁에 고희연을 마련했다. 토요일이니 점심때 고희연 자리를 갖는 것이 더 좋을 텐데 굳이 저녁때를 택한 데에는 토요일에도 출근하여 온 종일 일을 하는 둘째 사위에 대한 배려도 있을 터였다.
어머니와 나는 동생에게 아내가 있건 없건 사위 노릇을 충실히 잘해 주기를 당부하고 때로는 종용을 하기도 하는 처지였다. 동생이 장인 어른의 칠순 날만큼은 출근을 하지 않거나 출근을 하더라도 오후 일찍 퇴근해 오기를 바라고 또 권유를 했다. 장인의 칠순 날만큼은 아이들을 데리고 일찍 남산리에 가서 처가 식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참으로 좋은 모습일 터였다.

▲ 사돈 어른의 조촐한 고희연 자리에 나란히 앉은 장인과 사위. 서로 딸을 잃고 아내를 잃은 처지라서인지 다소 어색한 듯한 모습이 다시금 마음 아프게 하고...
ⓒ 지요하
하지만 동생은 형인 나와 성격이 많이 다르다. 내성적인 데다가 고정적인 자기 일 외로는 매사에 소극적이고 붙임성도 없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형과는 성격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평소 답답함을 많이 느낀 제수씨는 언젠가 "아무래도 형님이 좋은 것은 다 가져가신 것 같아요"라는 말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저 일밖에 모르는 동생은 장인 칠순 날도 아침 일찍 출근을 했다. 비정규직 기술 근로자인 동생의 출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훗날 퇴직금을 타게 되는 정규직도 아닌 동생으로서는 사실 매일같이 출근을 하는 것이 상책일 터였다. 하루를 쉬면 일당 15만원의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처지였다. 한푼이라도 벌어서 모아야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칠 터였다.
그런 동생은 그 날도 저녁 7시가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 바람에 우리 가족 모두는 남산리 사장 어른의 고희연 자리에 제일 늦게 참석한 꼴이었다. 여간 죄송하고 미안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고희을 맞으신 사장 어른과 모든 사돈 댁 가족들은 우리 가족을 진심으로 반기며 환대했다. 그러나 손을 맞잡은 어머니와 사빈님은 서로 눈물도 교환하는 모습이었다. 사돈 지간이면서도 서로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있음을 다시금 실감해야 했다. 사돈 댁에서는 선천적 질환인 제수씨의 뇌혈관 기형과 관련하는 미안한 마음을, 또 우리 집은 제수씨의 그것을 뇌출혈 전조 증상에도 불구하고 조기에 발견하여 처리하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보낸 데에 따르는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으니….
고희를 맞으신 사장 어른은 양복 차림이 아니었다. 고희연 자리에도 잠바 차림으로 나오신 사장 어른은 가슴에 꽃도 달고 있지 않았다. 밭에서 일하다가 오신 듯한 모습이기도 했다. 평생을 농부로 살아오신 순박한 얼굴에는 애써 자제하는 슬픔이 어려 있음을 나는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 씻을 수 없는 슬픔 때문에 사돈 어른이 고희연을 극구 반대하셨음에도 자식들이 뜻을 모아 끝내는 조촐하게나마 고희연을 열었다. 고희연 자리에 늦게 참석한 내 부탁을 받아들여 가족들이 함께 포즈를 취해 준 것도 고맙다.
ⓒ 지요하
제수씨가 살아 있다면 참으로 다른 풍경일 터였다. 제수씨는 오래 전부터 친정 아버지의 칠순을 대비하는 일을 해왔다. 모든 형제들로부터 매월 5만원씩 받아 적금 붓는 일을 했고 총무 역할을 했다. 친정 아버지의 칠순 때 양친 부모를 비행기 태워 외국 여행을 시켜 드릴 계획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제수씨의 타계와 함께 중지가 되고 말았다.
사돈 댁 가족들은 하나같이 동생 가족에게 신경을 많이 썼다. 동생과 두 아이에게 와서 말을 걸고 음식 그릇을 옮겨 놓아주고 하는 손길들에는 조금이라도 위안을 주고 싶어하는 진심이 어려 있었다.
나는 사장 어른께 드리는 축하와 위로의 말씀을 기도로 대신했다. 저녁을 들기 전에 바로 앞에 앉으신 사장 어른과 '식사 전 기도'를 함께 했다. 슬픔 속에서 고희를 맞으신 사장 어른께서 그 슬픔을 잘 이겨내시며 만수무강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했다. 그 기도가 가장 중요한 일임을 스스로 가슴에 되새기면서….
'부활성야'를 지내기 위해 일찍 성당에 가야 하는 일 때문에 오후 8시 30분쯤 일어서니 동생도 따라 일어섰다. 동생은 남아서 처가붙이들과 오래 어울리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강요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빠와는 달리 엄마를 닮아 붙임성이 좋은 규빈이는 외갓집에 가서 자겠다고 했고, 녀석의 그런 태도가 내게 묘한 다행스러움을 안겨주었다.
사돈 댁 모든 가족들의 배웅 속에서 천천히 차를 움직이며 나는 다시 한번 그들 모두와 하늘나라의 제수씨를 위해 성호를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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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18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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