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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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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수 [sooyaka] 쪽지 캡슐

2006-04-22 ㅣ No.98442

부활 제2주일  2006년 4월 23일.


요한 20, 19-31; 사도 4, 32-35; 1요한 5,1-6.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신 이야기와 토마스 사도가 신앙 고백한 이야기였습니다. 제자들은 어떤 집에 모여 있습니다. 때는 안식일 다음 날 저녁입니다. 안식일 다음 날이면 오늘의 주일입니다. 제자들은 모여서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때 가르치신 것과 하신 일을 함께 회상하고,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날 함께 하신 최후만찬을 기념하여 성찬을 거행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성찬 중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첫 번의 발현에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여드레 후 같은 장소와 시간에 토마스를 포함하여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여드레 후는 일주일 후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의 발현도 같은 주일 성찬집회 때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토마스는 예수님에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초기 신앙 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하던 신앙 고백 양식 중 가장 단순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보았고, 그분의 삶을 배워서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을 주셨고, 그 성령은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는 곳에 살아 계신다는 말입니다. 죄의 용서가 제자들의 임의에 맡겨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은, 긍정적으로 한번 말하고, 부정적으로 다시 한 번 더 말하는 유다인들의 화법에서 온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은 하느님이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창세기(2,7)에 보면 하느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진흙으로 만든 사람의 모상에다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숨을 받아 새롭게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절망하고, 도망갔었지만,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기까지 하면서 보여 주신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용서와 사랑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른 예수님이 실천하신 것이고, 이제는 예수님의 숨결을 받아 그분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사는 제자들이 실천하며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들은 요한 제1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자녀를 사랑합니다.’ 하느님 안에 자기 삶의 기원이 있다고 믿는 하느님의 자녀는 같은 하느님의 자녀인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유럽 중세 초기에 유럽으로 흘러 들어와 정착한 야만인들을 대상으로 발생한 신앙 언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소수의 사람들이 이주해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옛날 로마제국 국경 밖에 살면서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던 민족들이 제국의 군사력이 쇠퇴하자 제국영토 안으로 몰려들어와 유럽 땅에 정착한 것입니다. 중학교 서양사 교과서가 야만인들의 침입이라고 부르는 사건입니다. 그들은 이주 후 로마제국의 문명과 더불어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행위에 대해 책임질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추장이 시키는 대로 따르며 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면서, 교회는 먼저 각자가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진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각자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일에 대해 보상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 시기에 발생한 개인 고백을 수반한 고해성사 제도였습니다. 죄를 성찰하고 고백하여 자기 죄를 인정하고, 신부로부터 보속을 받아 행해서 자기 책임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까지 교회 안에 실천되고 있는 개인 고백 고해성사의 유래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문맹이고, 자기 잘못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던 시기에 도입된 관행입니다. 오늘 현대인은 자기가 잘못 한 것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은 기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고백을 동반하는 고해성사를 강요하면, 하느님이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은폐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과거에 필요해서 만들어진 고해성사에 관한 규정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복음보다 높이 평가하며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초기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해한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다가 목숨까지 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숨결을 받아 사는 사람은 죄의 용서를 선포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은폐하면, 예수님의 숨결 따라 새롭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하느님의 자녀들을 또한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고해소에 앉은 신부에게 유보된 특권이 아닙니다. 용서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 안에 살라계신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복음 위에 군림하는 교회가 아니라, 복음을 배워 실천해야 하는 교회입니다.


오늘 복음에 토마스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기원 후 100년 경 이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교회는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그 시대 교회의 실태를 반영합니다. 예수님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당시의 신앙인들은 모두 예수님을 보지 않고 믿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으로 믿고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한 사람 잘 되기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숨결로 사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에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오로지 섬기는 사람만 있습니다. 예수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살아 계셔서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입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마르 10,43),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숨결로 살아 실천되는 교회 공동체라야 합니다. 용서와 사랑은 인류 역사가 모르던 일이 아닙니다. 용서와 사랑은 인류와 더불어 살아왔습니다. 용서가 없고 사랑이 없었던 인류역사는 없었습니다. 그 용서와 사랑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신 예수님입니다. 겨자씨와 같이 작은 현재 우리의 실천이지만, 장차 하느님 안에 겨자나무와 같은 큰 결과를 기대하는 신앙인들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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