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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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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수 [sooyaka] 쪽지 캡슐

2006-04-29 ㅣ No.98788

부활 제3주일    2006년 4월 30일 


루가 24, 35-48.


오늘 복음은 루가복음서가 전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들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제자들은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착각하였다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며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유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고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발현하신 이야기는 각 복음서가 한두 가지씩 전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발현 정황이 하나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각 복음서가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사람 앞에서 확인되는 양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듯이, 부활하신 예수님도 사람들이 확인하고 인식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부활하여 발현하셨다는 이야기들을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 실망하여 고향 갈릴래아의 생업으로 돌아갔던 제자들입니다. 부활하신 분의 발현이 없었다면, 그들이 다시 모여들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확신을 갖는 어떤 계기가 그들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발족한 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믿고 있던 바를 전하기 위해 기록한 문서입니다. 각 공동체가 자기들의 신앙을 이야기 양식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것은 현대 우리의 방식과는 다릅니다. 현대인은 과거 사실을 정확하게 재생하여 보도하려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은 자기들이 믿는 바를 이야기로 만들어 전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서들 안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이야기의 세부 사항들이 아니라, 초기교회의 믿음입니다. 그 이야기들 안에서 초기 공동체의 믿음을 읽고 우리도 그 믿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발현 이야기에서도 우리가 알아들을 것은 부활하신 분에 대한 초기 교회의 믿음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믿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먼저 부활하신 분을 확인하는 과정에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라 ‘살과 뼈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 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본격적인 부활 신앙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회상하면서 그분의 살과 뼈의 이야기인 그분의 지상 삶에서 하느님의 생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믿은 데서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삶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제자들에게 기쁜 일이었지만, 믿어지지 않고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어떤 망설임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에는 어떤 의심과 망설임이 항상 있습니다. 의심도 망설임도 없는 믿음은 독선, 아집, 광신입니다. 그런 것은 주변 사람들을 불안하고 불편하게 만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새로운 발견은 곧 새로운 인식과 실천으로 이어졌습니다. 먼저 신앙에 대한 초기 교회의 인식이 달라집니다.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입을 빌려 하는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을 기준으로 과거 이스라엘의 신앙 문서들을 새롭게 읽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모세의 깨달음과 하느님을 선포하고 목숨을 잃은 예언자들의 노선에 충실하셨던 분입니다. 부활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다가 목숨을 잃은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죽음을 넘어서도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모세의 이름으로 주어진 율법은 무작정 지키기만 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우리 삶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데에 필요한 생활 지침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의 문자에 충실하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었습니다. 하느님은 율법을 문자대로 지킬 것만 요구하시는 분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습니다. 예언서들은 그 잘못 된 생각으로 하느님을 잃어 가는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을 깨닫게 하고자 부르짖은 이들이 남긴 문서였습니다. 하느님은 사람과 함께 계시고, 그 함께 계심은 인간을 위한 축복이라고 외치는 문서였습니다. 하느님을 빙자하여 인간이 행세하는 데에 반발한 예언자들입니다. 시편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여러 상황에서 체험하고 그 체험을 노래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구약성서의 문서들 중 이 세 가지를 언급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초기 신앙인들의 깨달음에 결정적 역할을 한 문서들이기 때문입니다.


초기 교회의 이 새로운 인식은 새로운 실천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복음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민족에게 전파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라고 요약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천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영접하고 그분의 생명을 사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분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느님을 잃고 율법에 얽매여 살던 사람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먼저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용서는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곳에 반드시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생명을 미워하고 죽입니다. 그 마음은 하느님의 것일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용서라고 표현하는 것은 예수님이 믿고 가르치신 하느님은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하느님을 시야에서 잃지 않고, 그분이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신앙은 용서하고 살리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되어야 하는’ 회개는 그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는 일입니다. 회개를 고행 혹은 보속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하신 하느님, 용서하고 축복하시는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그분에게로 시선을 돌려 그분의 선하심과 그분의 은혜로우심을 실천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부활이 그리스도인에게 기쁨인 것은 단죄하고 벌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용서하고 축복하시는 하느님이 우리를 살리신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용서하고 축복하시는 그 하느님을 배워 실천하여 그 일의 증인이 되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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