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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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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하 [domini0727] 쪽지 캡슐

2006-05-07 ㅣ No.99134

 

전에 써둔 글을 정리하다가 지난 가을에 쓴 글이 눈에 띄어 여기 옮겨 봅니다.




그래도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런 사람마저도 없는 사람에 비하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인적이 드문 간이역에 무작정 내려서

망연히  빈 의자에 앉아 언제 올지도 모르는 기차를 기다리는

그 사람보다는 행복한 일 아니겠나?


사방을 둘러봐도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왜 기차에서 내렸을까?

뭘 하려고 내렸을까?

어디로 갈까 해도 발길 향할 곳조차 없는데

낯선 이를 째려보고 컹컹 짖어대는 저 눔의 잡종 누렁이

어쩜, 어느 날 저만 남겨두고  간이역을 떠나버린

옛날 주인을 기다리며 또 기다리며 

외로워서 우는 소리일지도 모르지....


평화가 그리워 떠난 길이었다.

철저히 혼자이고 싶어서 떠난 길이었다.

세상에 혼자 왔듯이 갈 때도 혼자 갈 것이라 생각하니

성지를 찾는 순례자처럼 정처 없이 길을 떠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햇빛이 부서지는 역 구내 화단에는

엉긴 피 빛으로 커다란 닭 벼슬 같은 맨드라미가 피고

숫처녀 가슴처럼 볼록한 봉숭아꽃 씨방이

시한폭탄 소리를 내면서 이제 곧 터질 것만 같은데

건드려 달라고 건드려 달라고 외치는

저 처절한 소리는 누가 듣는가?

매정스러워 보일지라도 그냥 둬라.

있는 그대로 제발 그대로 놔둬라.

제가 알아 터질 때 되면 터지고

죽을 때 되면 죽을 것을....   

 

역 마당을 걸어서 나오니 가을볕에 내 놓은

빨간 고추 멍석이며 나락 멍석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돌아갈 기차가 오려면 아직도 족히 3시간은 있어야 하는데

언제 온다는 기별조차 없는 것 같은 건망증은 왜 일까?

갈 곳이 없는 외로운 사람의 기다림이란 그리움일 것이다.

차표 파는 직원이 멀찍이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서둘러 고개를 돌린다.


보긴 뭘 보세요? 내가 뭐 죽으러 온 사람처럼 보이나요?

그래요. 나 죽으려고 왔어요.

내 욕심을 죽이고 내 욕정도 죽이고

뱀 대가리처럼 들고 나오는 내 교만도 죽이고

고백소에 들어 가 하느님 앞에서도 사기를 친

가증스런 내 위선을 죽이려고 왔어요.

왜요? 여기 죽으러 오면 안 되나요? 차표 한 장 가지고는 모자라나요?

저승 떠나보낼 차표 한 장이 더 있어야 하나요?


산불조심이란 팻말을 보고 산으로 갔다.

사람의 발길이 닿은 길은 가급적 멀리 피해 벗어나

아무도 보이지 않는 숲 속으로 들어가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보이는 건 나무요 풀 뿐 이다.

유황 냄새가 진한 분화구 근처처럼 새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이제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감는다.

곧 나를 죽일 시간이다.


교만, 간린, 미색, 탐욕, 분노. 질투......온갖 죄종으로 너는 이제 사형이다.

무엇이 너를 죽음의 골짜기로 깊숙이 들게 했나?

재물이었나? 권력이었나? 명예였나?

그게 무슨 소용이 있었기에 너를 죽음으로 끌고 왔니?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간다고 그토록 남 앞에서 입을 잘 나불거리면서

정작 본인은 어찌 그리 움켜쥐려고만 버둥거렸니?

 

나 둬라. 그냥 나둬라. 네가 주인이 아닌 것은 네 것이 아니니라.

네 것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뭐 그리 남의 것에 겅걸을 맸느냐?

나한테 경배해라. 너의 주인은 오직 나 하나이니라.

내가 주는 대로 받아라. 빵을 달라는데 돌을 쥐어 줄 내가 아니다.

다시는 나를 속일 생각은 말아라. 고백소에서만은 진실해라.

남의 머리가 되려거든 먼저 그들의 종이 되어라.

이제 더 가지려 들지 말고 이웃에게 베풀어라.

아집도 버리고 교만도 버려라.

 

내가 너를 택했노라. 네가 날 택한 것이 아니니라.

돌아가라. 돌아가라.

아직은 네게 희망이 있다.

버릴 것만 버리면 너는 그래도 아직은 쓸모가 조금은 있다.

 

가을의 숲 그늘에 서서히 냉기가 들 무렵 나는 숲을 나왔다.

10월 중순의 청량한 바람이 나를 깨끗이 씻어주는 듯 했다.

덕지덕지 묻은 때를 다 씻은 기분으로 터벅터벅 길을 내려왔다.

사위가 적막하고 인적마저 느껴지지 않는 흙길을 걸어서...

 

시장기 때문일까 산비탈 무 밭에 파란 허리를 내민

하얀 무가 왜 그리 먹고 싶든지....훔쳐먹고 싶었다.

벌써 죄를 짓는다. 남의 밭에 무를 훔칠 생각이 나니 말이다.

아직도 1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간이역에 정차할 통일호가 온다는데.....

 

                          2005.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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