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써둔 글을 정리하다가 지난 가을에 쓴 글이 눈에 띄어 여기 옮겨 봅니다.
그래도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런 사람마저도 없는 사람에 비하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인적이 드문 간이역에 무작정 내려서
망연히 빈 의자에 앉아 언제 올지도 모르는 기차를 기다리는
그 사람보다는 행복한 일 아니겠나?
사방을 둘러봐도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왜 기차에서 내렸을까?
뭘 하려고 내렸을까?
어디로 갈까 해도 발길 향할 곳조차 없는데
낯선 이를 째려보고 컹컹 짖어대는 저 눔의 잡종 누렁이
어쩜, 어느 날 저만 남겨두고 간이역을 떠나버린
옛날 주인을 기다리며 또 기다리며
외로워서 우는 소리일지도 모르지....
평화가 그리워 떠난 길이었다.
철저히 혼자이고 싶어서 떠난 길이었다.
세상에 혼자 왔듯이 갈 때도 혼자 갈 것이라 생각하니
성지를 찾는 순례자처럼 정처 없이 길을 떠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햇빛이 부서지는 역 구내 화단에는
엉긴 피 빛으로 커다란 닭 벼슬 같은 맨드라미가 피고
숫처녀 가슴처럼 볼록한 봉숭아꽃 씨방이
시한폭탄 소리를 내면서 이제 곧 터질 것만 같은데
건드려 달라고 건드려 달라고 외치는
저 처절한 소리는 누가 듣는가?
매정스러워 보일지라도 그냥 둬라.
있는 그대로 제발 그대로 놔둬라.
제가 알아 터질 때 되면 터지고
죽을 때 되면 죽을 것을....
역 마당을 걸어서 나오니 가을볕에 내 놓은
빨간 고추 멍석이며 나락 멍석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돌아갈 기차가 오려면 아직도 족히 3시간은 있어야 하는데
언제 온다는 기별조차 없는 것 같은 건망증은 왜 일까?
갈 곳이 없는 외로운 사람의 기다림이란 그리움일 것이다.
차표 파는 직원이 멀찍이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서둘러 고개를 돌린다.
보긴 뭘 보세요? 내가 뭐 죽으러 온 사람처럼 보이나요?
그래요. 나 죽으려고 왔어요.
내 욕심을 죽이고 내 욕정도 죽이고
뱀 대가리처럼 들고 나오는 내 교만도 죽이고
고백소에 들어 가 하느님 앞에서도 사기를 친
가증스런 내 위선을 죽이려고 왔어요.
왜요? 여기 죽으러 오면 안 되나요? 차표 한 장 가지고는 모자라나요?
저승 떠나보낼 차표 한 장이 더 있어야 하나요?
산불조심이란 팻말을 보고 산으로 갔다.
사람의 발길이 닿은 길은 가급적 멀리 피해 벗어나
아무도 보이지 않는 숲 속으로 들어가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보이는 건 나무요 풀 뿐 이다.
유황 냄새가 진한 분화구 근처처럼 새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이제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감는다.
곧 나를 죽일 시간이다.
교만, 간린, 미색, 탐욕, 분노. 질투......온갖 죄종으로 너는 이제 사형이다.
무엇이 너를 죽음의 골짜기로 깊숙이 들게 했나?
재물이었나? 권력이었나? 명예였나?
그게 무슨 소용이 있었기에 너를 죽음으로 끌고 왔니?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간다고 그토록 남 앞에서 입을 잘 나불거리면서
정작 본인은 어찌 그리 움켜쥐려고만 버둥거렸니?
나 둬라. 그냥 나둬라. 네가 주인이 아닌 것은 네 것이 아니니라.
네 것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뭐 그리 남의 것에 겅걸을 맸느냐?
나한테 경배해라. 너의 주인은 오직 나 하나이니라.
내가 주는 대로 받아라. 빵을 달라는데 돌을 쥐어 줄 내가 아니다.
다시는 나를 속일 생각은 말아라. 고백소에서만은 진실해라.
남의 머리가 되려거든 먼저 그들의 종이 되어라.
이제 더 가지려 들지 말고 이웃에게 베풀어라.
아집도 버리고 교만도 버려라.
내가 너를 택했노라. 네가 날 택한 것이 아니니라.
돌아가라. 돌아가라.
아직은 네게 희망이 있다.
버릴 것만 버리면 너는 그래도 아직은 쓸모가 조금은 있다.
가을의 숲 그늘에 서서히 냉기가 들 무렵 나는 숲을 나왔다.
10월 중순의 청량한 바람이 나를 깨끗이 씻어주는 듯 했다.
덕지덕지 묻은 때를 다 씻은 기분으로 터벅터벅 길을 내려왔다.
사위가 적막하고 인적마저 느껴지지 않는 흙길을 걸어서...
시장기 때문일까 산비탈 무 밭에 파란 허리를 내민
하얀 무가 왜 그리 먹고 싶든지....훔쳐먹고 싶었다.
벌써 죄를 짓는다. 남의 밭에 무를 훔칠 생각이 나니 말이다.
아직도 1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간이역에 정차할 통일호가 온다는데.....
2005.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