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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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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5주일 2006년 5월 14일 요한 15, 1-8, 1요한 3, 18-24.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십니다...그대들은 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구약성서에는 이스라엘이 포도나무입니다. 이사야는 하느님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다.”(5,2)고 말하고, 예레미아는 하느님이 “특종 포도나무를 진종으로 골라 심었다.”(2,21)고 말합니다. 시편은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지켜 주소서.”(80,15)라고 기도합니다. 따라서 예수님 시대에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곧 하느님의 백성을 지칭하는 단어로 잘 알려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포도나무이시고, 하느님은 그 나무를 손질하는 농부이시며, 신앙인들은 포도나무 가지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심으신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하느님의 손질을 거쳐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 가지인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살도록 배웠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자라면서 우리 자신을 위해 계획하고, 그것을 실천하며 사는 법을 터득하였습니다. 그것을 잘하면 성공한 인생이라 일컫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우리가 속하는 집단을 위해 우리는 계획하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어디를 갈 때는 목적지까지의 계획을 세우고, 합당한 교통수단을 택해서 거기에 도달합니다. 물건을 구매할 때도, 계획한 상점에 가서 계획한 물품을 구입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 자신과 우리의 집단을 위해 계획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며 삽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아무런 계획 없이 접근해야 발견할 수 있는 대상도 있습니다.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그 작품의 세계 안에 그냥 빠져들고 심취합니다. 우리는 그 작품에서 받은 감동으로 우리 자신이 달라져서 그 자리를 떠납니다. 문학작품을 읽거나, 음악을 감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계획 없이 접근합니다. 감상과 감동은 우리 계획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가 만난 대상이 우리 안에 나타나게 하는 결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도, 우리 자신이 만든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열어주는 세계에 빠져들고 감동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접할 때도 같은 자세가 요구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계획을 포기하고, 복음이 전하는 이야기들이 열어주는 세계 안에 빠져들어야 합니다. 복음서에서 교훈을 얻어 우리를 위해 유익하게 활용하겠다는 계획으로 접근하면, 우리는 우리가 계획하면서 예상했던 교훈만 복음서에서 얻을 것입니다. 이 때 복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린 새로운 세계에로 우리를 인도하지 못합니다. 우리 계획대로 한 수를 배웠다는 성취감은 있을지라도, 복음서가 열어주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보지는 못합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새로운 세계를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오늘 복음은 나무 가지가 나무에서 수액(樹液)을 받아 나무의 생명을 살듯이, 우리도 예수님과 연결되어 그분의 생명을 배워서 살라고 초대합니다. 우리 자신만을 챙기면서 사는 생명에서 탈피하여, 예수님이 보여주신 생명을 받아 살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이 사신 생명이 하느님 나라의 생명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시게 하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에서 발생하는 삶의 특징은 다른 사람의 불행에 마음 아파하는 모습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셨다, 가련히 여기셨다, 측은히 여기셨다’고 자주 말합니다. 베드로는 설교에서 예수님이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 주셨다.”(사도 10,38)는 말로 그분의 생애를 요약합니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겨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가련히 여겨 마귀를 쫓으며, 측은히 여겨 죄인으로 지탄받는 사람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당신 앞에 나타난 사람들의 불행을 퇴치하는 선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당신이 성공하기 위한 계획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기득권층의 총애를 받아 종교지도자로서 출세의 길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전통 따라 관행 따라 무난하게 살아서 그들의 칭찬을 받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에게 소중한 것은 그분이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하느님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에 대해 그분은 전혀 양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그분의 확신은 유대교 사회에서 외면당하였지만, 그분은 그것을 한(恨)으로 가슴에 품지도 않으셨습니다. 자비와 사랑은 한이라는 응어리를 남기지 않습니다. 그분은 불쌍히 여기고 가련히 여기시는 하느님 생명의 진실에 감동하고 심취하셨습니다. 그 점에서 그분은 여니 인간과 다르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위한 끊임없는 계획에 골몰하여 삽니다. 예수님은 아무 계획 없이 하느님 생명의 진실을 따라 사신 분입니다. 신앙인의 기도는 자기 자신을 열어서 그 진실을 받아들이고, 그 진실이 자기 행동의 주체가 되게 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에서 들은 요한 제1서는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보다 더 크시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당신 행동의 주체로 삼아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신 예수님에게서 큰마음을 배워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자기 자신의 일에 골몰한 마음보다 더 크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육신으로 태어나 살다가 그것을 대자연에 돌려주고 어디론가 가는 생명입니다. 어차피 잃어야 하는 세상이고, 내어 주어야 하는 몸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자비로운 마음과 그 실천만이 하느님 안에 살아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우리가 계획하여 획득하는 명예와 재물은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 잘린 가지’의 운명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배워 하느님 생명의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계획들을 다시 평가하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보다 더 크신’ 하느님의 마음을 배워 실천하며 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었던,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는’ 아버지의 생명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록 작은 실천으로라도 그 세계 안으로 한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농부이신 하느님이 자를 것은 자르고, 키울 것은 키워,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열매를 맺어 하느님의 진실이 우리 안에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 번호 | 제목 | 등록일 | 작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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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405 | 역대기하29:1~36(히즈키야)|3| | 2006-05-13 | 최명희 |
| 99404 | 영성체 후 묵상 (5월13일)|5| | 2006-05-13 | 정정애 |
| 99403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1| | 2006-05-13 | 강점수 |
| 99402 | * 역사는 재평가 되는 것이다.|3| | 2006-05-13 | 이정원 |
| 99392 | 홍보합니다. - 성경쓰러 오세요.|2| | 2006-05-13 | 이순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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