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95년 <대전가톨릭문우회> 문집 제2호 『당신 안에 하나』에 실린 글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쓴 때가 벌써 10년이 넘었군요.
엊그제 올린 <아내가 주인인 새 집의 '등기권리증'을 받고>라는 글을 쓰던 중 문득 10년 전에 쓴 <선친께서 벌어주시는 돈>이라는 글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오랜만에 그 글을 찾아서 읽어보니 감개무량함 같은 것이 느껴지면서 여러 형제 자매님들께 소개를 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 홈페이지 (http://jiyoha.netian.com) '가족' 난의 '선친 지동환님' 방에 올려져 있는 글이기도 합니다만, 11년 전의 글을 오늘 '굿 뉴스' 자게에 올립니다.
저의 최근 글 <아내가 주인인 새 집의 '등기권리증'을 받고>를 읽으신 분들께는, 그 외에도 여러 형제 자매님들의 신앙 생활에 조금은 참고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글이 좀 길어서 세 번으로 나누어 소개하며, 제 구차한 '신앙 고백'을 너그럽게 관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친께서 벌어주시는 돈 ①
<1>
지난 86년에 작고하신 나의 선친(池東煥·안셀모)께서 이 세상에 남겨놓으신 동화 작품은 모두 26편이다. 작품들 모두에 고루 집필하신 때가 명기되지 않은 것이 아쉽긴 하지만, 자녀들이 국민학교에 다니던 청년 시절부터 노년에까지 긴 세월 무명에 개의치 않고 줄기차게 써오신 작품들이다. 청장년 시절에는 생업의 고초 속에서 틈틈이 글을 지으셨으나 생업을 놓으신 노년에 이르러서, 특히 병고의 문턱에 다다르기 전 이삼 년 동안 집중적으로 대단한 의욕을 발휘하셨다.
그러나 선친께서는 생전에 활자화된 당신의 작품을 읽어보시는 기쁨을 별로 누리시지 못하였다. 83년 <흙빛문학>창간호에 1편, 84년 <흙빛문학>2집에 1편, <소년>지 11월호에 1편(추천 작품), 85년 사보 <매일유업>에 1편, <흙빛문학>3집에 2편, 이렇게 도합 6편만을 겨우 보셨을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 <흙빛문학>3집의 두 편은 이승에서의 모든 미련을 스스로 정리하시던 무렵 병고의 자리에서 읽으셨다.
또한 선친께서 작품 발표의 실질적 결과물인 '고료'라는 명색의 돈을 손에 쥐어보신 것은 단 한 번뿐이다. 82년 <주부생활>에 수필을 하나 발표해서 고료를 받은 적이 있긴 하지만, 동화 작품 발표로 고료를 손에 쥐어본 것은 사보 <매일유업>에 발표한 작품 한 편 뿐이다.
내 기억에서 사라질 수 없는 것이지만, 선친께서는 당신의 글이 만들어낸 돈―고료라는 명색의 많지도 않은 금액을 받아 당신의 아내에게 주실 때의 기쁨이 참으로 크셨던 것 같다. 겸연쩍어 하면서도 의기양양해 하시던 그 천진한 표정은 지금도 나로 하여금 아릿한 아픔과 함께 웃음을 머금게 한다.
선친께서는 청장년 시절 '신춘문예'에 몇 번 도전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단칸방의 밥상 위에서 밤새워 쓴 작품을 보내 놓고 은근히 당선을 기대한 나머지 초조히 발표를 기다리시던 (당시에 내 어린 깜냥으로도 눈치를 챘던) 그 모습들이 선연히 떠오른다.
그러나 원고지 사용법도 모르는 채로 쓰신 아버님의 동화들은 최종심에도 한번 오르지 못하고 번번이 낙선을 했는데, 아들이 자라서 고등학생 때부터 신춘문예에 도전하는 것을 아신 후로는 일체 투고라는 것을 하시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버님은, 투고를 목적하지도 않고, 당장의 발표라는 건 가망 사항이 아닌데도 작품 쓰는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지 않으셨다. 아버님의 그런 정신은 오늘날 나에게 큰 경이감과 다행스러움, 고마움을 안겨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립고 즐거운 기억은 선친께서 우리 어린 남매들에게 당신의 동화들을 발표해 주시고 글짓기를 '장려'해 주신 일이다. 선친께서는 당신이 애써 지으신 동화를 가지고 발표회를 여시곤 했는데, 으레 내 바로 밑의 누이동생이 등잔불 밑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낭독을 하곤 했다.
생각하면 참 그리운 풍경이다. 그때마다 으레 등잔불 옆에서 바느질을 하신 어머니는 아버님의 동화 내용보다 어린 딸의 글읽는 소리가 더 좋으신 눈치였고, 나는 곧잘 하품을 하다가 낭독이 끝나기도 전에 잠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글'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그때 처음 알았다. 세상의 모든 책들이 그냥 저절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지어낸 글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 깨달음은, 그리고 아버님의 동화로부터 자연적으로 느끼게 된 이야기의 기승전결은 나에게 곧바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면서 나도 글을 지어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국민학생 시절(학년은 기억나지 않지만) 제법 기승전결을 갖춘 긴 글을 하나 지어서 아버님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아버님의 어린 자식들에 대한 글짓기 장려는 매우 독특하고 낭만적인 것이었다. 비록 밤에 좁은 단칸방에서 이루어진 일이지만, 백일장 형식으로 제목을 주어 글을 짓게 한 다음 심사를 하고 모두에게 상을 주는 일이었다. 상품이라야 '눈깔사탕'이나 '손가락과자'였지만, 그렇게 상품으로 타먹은 과자 맛은 지금 생각해도 단순한 과자 맛이 아니었던 것 같다.
<2>
선친께서 남겨놓으신 동화들은 길이가 대개 비교적 긴 편이다. 120매에 달하는 작품도 하나 있고, 단편동화의 보편적 길이인 2, 30매 짜리들보다는 40매에서 70매 사이의 작품들이 더 많다.
나는 선친 사후에 선친의 동화 작품들을 하나하나 세심히 챙기고 정리해서 여러 해 동안 여러 지면에 모두 발표했다. 발표 지면은 <흙빛문학>, <충남예술>, <천주교문학>, 지역잡지 <갯마을>, <대전가톨릭문우회> 작품집 등이었다.
그리고 나는 전체 원고 량으로 따져 절반에 해당하는 13편을 묶어 93년 9월 한 권의 동화집을 펴내었다. <도서출판·00>에서 '00어린이54' 번으로 펴낸『팥죽할머니와 늑대』가 그것이다.
<도서출판·00>에서 내 선친의 동화집을 펴내게 된 데에는 보다 각별한 사연이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91년 여름 나는 <민족문학작회의>사무국으로부터 한 통의 문건을 받았다. 이오덕 선생의 발제에 의하여 우리 나라의 어린이들과 중학생들을 위한 좋은 읽을 거리를 만들어주는 일을 하기로 하였으니 뜻이 있는 회원들은 장르에 구애 없이 동화나 소년소설을 한 편이나 두 편씩 써서 보내 달라는 전갈이었다. 시골 문사인 나는 우선 그게 이른바 '중앙'에서 하는 일이라는 데에 구미가 당겨 참여하기로 마음먹고, 일찌감치 동화 한 편을 지어(고등학생 시절에 써놓았던 것을 개작해서) 원고 마감 기일 안에 우송했다.
그런데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하는 일이 대체로 그렇듯이 그 사업 또한 지지부진, 감감소식이었다. 원고 수합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1년도 더 지난 92년 가을 경이었다. 나는 거의 잊고 있었던 그 일이 불현듯 생각나면서 선친과 연관하는 특별한 생각을 하나 하게 되었다. 선친의 유작품들이 아직 다 발표되지 않고 남아 있는 상황에서 내 동화 작품을 발표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선친의 유고 작품들을 모두 발표하여 햇빛을 보게 한 다음에 내 동화를 발표하는 것이 옳은 순서라는 자각이었다. 그런 자각으로 말미암아 나는 처음 한동안은 몹시 당황하였고, 죄책감을 가지기도 했다.
나는 다급한 마음으로 서둘러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알아보니, 최근에야 원고 수합이 끝나 모든 원고들이 <00>출판사로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00>로 전화를 걸었다. 때는 늦지 않았고 보람이 있었다. 편집 작업이 완료되어 인쇄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나는 <00>의 담당자에게 내 작품을 빼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내 말을 들은 <00>의 책임자는 선뜻 이해를 해 주었다. 깊이 공감하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그는 필요 없게 된 내 원고를 내게로 우송해 주었다.
원고를 받은 나는 우선 고마운 마음이 컸다. <00>로 전화를 걸어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전화를 건 김에 선친에 관한 말을 했다. 선친의 동화에 대해, 그 독특한 작품 세계를 열렬히 설명했다. 드디어 저쪽에서 우선 작품을 몇 개 보자는 말이 왔다.
나는 또 서둘러서 선친의 작품 몇 편을 복사해서 우송했다. 그러나 물론 저쪽에서는 즉시로 화답이 오지 않았다. 나는 지속적으로 공세를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꺼번에 작품을 모두 보내는 것보다는 여러 차례 나누어 보내는 것이 효과적일 것 같았다. 책도 보내고 사본도 보내고 했다.
해가 바뀌면서는 가을에 치르게 될 어머님의 칠순 잔치를 깊이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십 년 전 어머님의 회갑 때 잔치를 못해 드린 것을 몹시 죄스러워 하며 살아온 나로서는 가을의 칠순 잔치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별러오는 일이었다. 나는 가을의 어머님 칠순 잔치 때 아버님의 유고 작품집 출판기념도 겸하고, 오시는 손님들께 기념품으로 선친의 동화집을 한 권씩 증정할 계획을 아주 일찌감치 세워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출판사에서는 세월이 봄철에 이르도록 확답을 해 주지 않았다. 나는 초조하였지만 인내심을 버리지 않았다. 선친이 워낙 무명이셨던 분인 데다가 돌아가신 분이고 해서 출판사가 매력을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나는 마지막 카드를 내놓았다. 인세들 받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내가 세상에 계시지 않는 선친의 책을 만들어서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소.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아버님의 작품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묶고 싶을 뿐이고, 그 책을 아버님 묘소 앞에 놓고 절을 올리고 싶은 마음 뿐이요. 인세는 따지지 않을 테니 인세 부담을 갖지 말고 책만 만들어 주시오."
그리고 나는 인세를 포기하는 대신 다른 하나의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어머님의 칠순 잔치에 대한 소망을 설명하고 반드시 그 안에 책을 만들어줄 것과 책을 2백 권만 무료로 달라는 것이었다.
나의 이런 제의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출판사는 곧바로 확답을 보내왔고 신속하게 작업에 착수했다.
인세는 송두리째 날아갔지만 나는 아버님의 책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확실해진 것만으로도 더없이 기뻤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