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일본 사람들의 이면도 생각해 보거라"
고1 시절에 일본을 여행한 아들 녀석의 여행기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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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컴퓨터의 '최근 문서'들 중에 고1 아들 녀석이 쓴 글 하나가 있다. 제목이 '테마 여행 후기'로 돼 있다. 분량은 200자 원고지로 15매 정도 되는 글이다.
아들 녀석은 지난 9일부터 13일까지 4박 5일간의 일정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여행에서 돌아온 13일 저녁에 집에 왔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에 아들 녀석은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썼다. 다음날인 14일은 주일이어서 오전에 함께 성당에 가자고 했더니, "오후에 학교 기숙사로 돌아가서 밤 9시 30분 미사에 참례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더니 오전 동안 15매 분량의 일본 여행기를 쓴 것이다.
아들 녀석이 기숙사에 몸을 맡기고 공부하는 논산의 D고는 1학년 전체 학생들을 네 파트로 나누어 '테마 여행'을 실시했다. 일본의 '오사카/나라/교토', 일본의 '큐슈 지방', 중국의 '북경/만리장성', 그리고 '제주도'가 그 대상지였다.

▲ 아들 녀석이 일본에서 찍어 온 수십 장의 사진들 중에서 아들 모습이 담긴 유일한 사진. 가운데 아이가 내 아들 지한결이다.
ⓒ 지요하
아들 녀석은 처음부터 일본의 '오사카/나라/교토'를 선택했다. 제주도는 두 번이나 갔다 온 곳이었고, 중국의 북경과 만리장성도 지난 2004년 여름에 가족과 함께 갔다 온 곳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큐슈 지역은 올 여름에 우리 가족(모두 10∼12명 정도)이 가기로 예정된 곳이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어디를 선택할지 고심을 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자신은 행복한 편이라고 했다. 지난 2002년 필리핀, 2003년 백두산, 2004년 북경, 1999년과 2005년 제주도를 갔다 온 자신을 주위 친구들이 부러워한다고 했다.
그리고 녀석은 이번 일본 여행이 비행기를 타지 않고 배로 가고 오기에 더욱 호기심이 생긴다고 했다. 처음으로 큰배를 타보는 여행이라서 특별한 경험이 될 것 같다며 즐거워했다. 녀석의 그런 말을 들으며, 내가 아비 노릇을 제법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군대 시절 베트남 전장에서 헬리콥터를 타 본 경험은 제외하고, 사십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처음 비행기를 타 봤다. 이런 아비에 비해 아들 녀석은 초등학교 2년 시절에 비행기를 경험했고, 벌써 외국 나들이도 여러 번을 했으니 아비보다는 훨씬 좋은 팔자였다. 물론 당연히 그래야 할 일이었다.
(나는 넉넉지 못한 형편에서도 가족이 함께 하는 여행에 무척 신경을 쓴다. 가족의 범위도 넓게 잡는다. 그래서 차도 승용차가 아닌 12인승 승합차를 갖고 있다. 내 승합차를 이용하여 비교적 자주 '가족 나들이'를 즐기며 산다. 머리를 써서 최소한의 비용으로 가끔씩 가까운 외국 나들이도 한다. 가족들이 내게 감사하는 사항이다.)
아들 녀석의 이번 여행비용은 52만2000원이 들었다. 모두 121명이 함께 간다고 했다. 자랑 같지만 녀석의 여행비용 중에서 절반 정도는 녀석이 학교에서 받은 장학금으로 충당했다. 녀석이 일찍부터 효도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즐거운 기분으로 '통장 정리'를 할 수 있었다.

▲ 수십 장의 사진 중에서 골라본 것인데, 어느 곳에서 무엇을 찍은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 지요하
아들 녀석은 15일 월요일 새벽에 아빠가 차로 학교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것을 "아빠 고생을 덜어 드리고 싶다"는 말과 함께 사양을 하고 전날인 14일 오후에 버스를 타고 논산으로 돌아갔다. 우리 고장인 태안이나 서산에서는 논산까지 가는 버스가 없기에 일단 천안이나 공주로 가서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녀석은 천안 경유 쪽을 택했다. 아빠의 고생을 덜어 드리겠다며 장시간 고생을 무릅쓰고 버스를 이용하는 녀석을 보면서, 걱정과 미안함 속에서도 흐뭇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들 녀석이 내 컴퓨터로 써 놓은 일본 여행기를 읽는 기분은 삼삼했다. 녀석에게 조금은 문재(文才) 있음을 느낀다. 느낌이나 생각의 갈피도 분명하고, 글꼴이 전체적으로 제법 정연하다. 녀석의 글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얼마 전 가족 친지들에게 '가족 메일'을 띄우면서 녀석의 글을 첨부하기도 했다. 마누라에게서 '팔불출'이란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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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오후 마누라와 함께 논산에 가서 일본에서 돌아온 아들 녀석을 태우고 집으로 올 때의 일을 즐겁게 기억한다. 녀석은 차안에서 일본 얘기를 많이 했다. 갑자기 수다쟁이가 되어 있었다. 신나게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그때의 이야기 중에도 나온 말이지만 아들 녀석이 쓴 여행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또 가이드 선생님께서 해주신 설명을 듣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패전 후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마라'라는 식의 교육을 어렸을 때부터 받았다는 것이나, 일본은 자기와 관계된 일이 아니면 무관심하기 때문에 정작 일본 사람 대부분은 독도나 역사에 대해 모른다는 것 등은 나에게 일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였다.】
나는 잠자코 아들 녀석의 얘기를 귀담아 듣기만 하다가, 가이드 선생님에게서 들었다는 그 말이 나왔을 때는 내 생각을 녀석에게 말해 주었다.
"아빠는 아직 일본 사람들을 실생활 속에서 접해 보지 못했지만, 일본 사람들의 질서 의식과 친절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항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또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일본 사람들의 습관에 대해서도 많이 들었고, 그것을 좋게 보고 또 부러워하기도 해. 하지만 그것이 일본 사람들의 전체적이고 확실한 모습은 아니야. 일본 사람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 이면, 또는 그들의 이중성을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야."
그리고 나는 운전을 하면서 아들 녀석에게 일본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로서는 일본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왜구(倭寇)'였다. 우리와 일본과의 역사적 관계를 떠올리면 무엇보다도 왜구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왜구를 떠올리면 일본인들의 노략질 근성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왜구들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친 시기에 우리나라를 거의 해마다 침입했다. 고려 고종 10년(1223년)부터 조선 세종 3년(1421년)까지 약 200년에 걸쳐 무려 415번이나 침입하여 살육과 노략질을 자행했다.

▲ 옛날 왜구 침입의 아픔도 간직하고 있는 태안읍 백화산 '백화산성'의 일부 모습.
ⓒ 지요하
우리 고장(충남 태안)도 왜구와의 악연이 깊다. 우리 고장은 황해로 돌출된 반도의 지리적 특성 때문에 특히 왜구의 피해가 컸다. 고려 공민왕 22년(1373년)에는 왜구의 침입이 워낙 심하여 태안군수가 아전 2명만을 데리고 간신히 서산으로 피신을 했다. 그러나 1883년에는 왜구가 서산까지 침입을 하자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이번에는 예산으로 달아났다.
태안의 성곽인 백화산성도 무너지고,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왜구의 노략질과 분탕질로 태안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비참할 정도로 황폐화된 태안은 그 후 43년(1373∼1416년 조선 태종 16년) 동안 '폐군(廢郡)'되는 아픈 역사를 갖게 되고 말았다.
고장의 역사를 알고 고장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는 일본을 대하자면 정말이지 왜구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36년 동안 지배를 받았던 그 치욕의 역사를 잊을 수 없다. 그 뼈아픈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일제의 침탈을 생각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총 한방도 쏘아보지 못하고 고스란히 나라를 빼앗긴 일이다. 세계 역사상 총 한방도 쏘아보지 못하고 나라를 빼앗긴 예가 우리말고 또 있을까.
또 하나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민족 배반자들을 철저히 단죄하지 못한 일이다. 그리하여 그 후유증이 해방 이후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민족 정기를 훼방하며 이런저런 분야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 민족 배반자들을 철저히 단죄하지 못한 것은 총 한방도 쏘아보지 못하고 나라를 빼앗긴 것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 묘한 일맥상통은 참으로 쓰디쓴 비애를 머금게 한다.
일본인들은 교활한 근성을 발휘하고 교묘한 방법을 치밀하게 동원하여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웃 나라의 국권을 빼앗고 36년 동안이나 지배를 했다. 그들은 그 역사적 사실을 (자신들의 그 성취를) 누구보다도 잘 기억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총 한방 쏘아보지 못하고 나라를 빼앗긴 우리나라가 해방 이후에는 민족 배반자들을 철저히 단죄하지 못한 사실, 우리의 한계와 약점도 잘 파악하고 있다.

▲ 역시 어느 곳에서 무엇을 담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 지요하
그들은 이웃 나라를 침탈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이 저질렀던 갖가지 만행을 전혀 반성하지도 않는다. 교전 한번 없이 이웃 나라의 국권을 접수하고, 합방을 이룬 사실과 관련하여 (그 사실을 다각도로 참조, 활용하며) 오히려 시혜(施惠) 의식을 갖는다. 그들은 시혜 의식을 갖는 정도가 아니라 '즐기는' 수준이다.
분명한 가해자임에도, 그 가해를 오히려 시혜로 인식하며, 그 왜곡을 또한 즐기는 일본인들에게서 우리는 그 중층의 심리 구조를 똑바로 보아야 한다. 그들의 양면성과 이중성을 명확히 분별하고 경계를 해야 한다.
일본인들의 질서 의식과 친절, 그리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습관이 참으로 확실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이웃 나라의 국권을 강탈하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던 과거의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일본은 반성과 사죄를 확실하게 해야 한다.
정략이 생리화된 지도자들과 그 정략에 순치되기 쉬운 일반 국민을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는 말도 있을 수 있겠으나, 일본 국민들은 과거 역사를 바르게 보려는 의지와 눈을 가져야 한다.
일본인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웃 나라의 국권을 강탈했던 과거의 경험, 그 축적된 가해 경험과 치밀하고도 끈질긴 교활성을 바탕으로 오늘도 한국의 '독도'에 접근하고 있다. 독도를 '문제화'하려는 그들의 방식 속에는 우리보다 훨씬 치밀하고 다각적인 '카드'가 마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독도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않는 한 그들은 이웃 나라를 침탈한 부끄러운 과거를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셈이 된다. 또 과거의 온갖 만행에 대해 가해자라는 인식을 갖고 반성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질서 의식과 친절, 그리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습관은 양면성과 이중성의 혐의를 더욱 크고 짙게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 녀석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없지 않을 테지만, 나는 운전을 하면서도 아들 녀석에게 열렬하게 위에 기술한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아들 녀석은 진지한 기색으로 들었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아들 녀석의 일본 여행기에 아빠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은 전혀 소개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지만, 섭섭해하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까지 담기는 분량적으로도 다소 버거웠을 것이다. 녀석이 아빠의 얘기를 잘 기억해 줄 것으로 믿는다. 하여 일본을 다분히 긍정적으로 보는 눈에 좀더 탄력을 갖게 될 것으로 믿고 기대한다.
2006-05-25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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