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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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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수 [sooyaka] 쪽지 캡슐

2006-05-27 ㅣ No.99896

주님 승천 대축일     2006년 5월 28일


마르 16, 15-20.   사도 1, 1-11.


오늘은 예수님이 하느님에게로 가셨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분의 생존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 안에 계속 살아 계시다는 뜻입니다. 사실 부활과 승천은 별개의 두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과 승천을 분리해서 기억하는 것은 그 시대의 우주관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우주가 3층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과 우리가 사는 세상 그리고 죽은 이들이 가는 땅속 죽음의 나라, 이렇게 세 층으로 된 우주였습니다. 그런 우주관을 전제로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돌아가셔서 땅속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 편에 앉으셨다고”고 말합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곧 승천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가 들은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승천하셨다고 말합니다. 루가복음서의 저자가 그 후편으로 사도행전을 집필하였습니다. 저자는 루가복음서의 말미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시고 그들을 베다니아로 데리고 나가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부활 40일 후 예루살렘에서 승천하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같은 저자가 같은 사실에 대해 이렇게 다른 기록을 남겼을 때는 승천의 일시와 장소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사흗날에 부활하셨다는 말은 돌아가시고 72시간 후 부활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사흘은 결정적인 날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정하신 결정적인 날에 부활하셨다는 뜻입니다. 성서에서 40일은 사람이 자세를 결정적으로 바꾸는데 필요한 세월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가르친 것으로 사도행전이 말하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 도망쳤던 제자들이 그분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전향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르치기 시작하기까지는 어떤 기간을 필요로 하였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르코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발현하여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고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 편에 앉으셨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느님에게 가셔서 그분과 함께 계신다는 제자들의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이야기들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듣는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인류는 하늘과 더불어 살아왔습니다. 하늘에 빌고, 하늘을 우러러 반성하고, 푸르고 넓은 하늘을 보면서 답답한 가슴을 달래며 살았습니다. 오늘 대도시에 사는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볼 여유도 없이, 우리 삶의 일상쳇바퀴에 갇혀서 삽니다. 넓고 푸른 하늘, 밤이면 별이 쏟아지는 하늘이 우리 삶에서 사라진 그만큼, 하느님에 대한 감수성도 우리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우리 삶에 숙연함을 주는 체험이 사라졌습니다. 넘쳐나는 인간 생산품에 시선을 빼앗기고, 정보매체들이 전하는 정보의 홍수에 빠져서, 우리는 모두 분주하게 또 고달프게 살아갑니다. 하늘을 우러러 생각할 겨를도 없고,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여유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런 삶이 인간 운명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승천 축일은 하늘이 우리 삶에 의미하는 바가 있듯이, 우리가 묻혀서 사는 일들보다 더 소중한 것이 우리 삶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넓고 푸른 하늘,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하는 하늘,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하늘입니다. 그런 하늘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도 우리에게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넓고 신선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줍니다. 예수님은 절망과 실의에 빠진 병자들을 고쳐서 삶의 현장으로 되돌려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버려진 이들을 용서하여 하느님의 넓으신 자비를 체험하게 하여, 흔연하고 기쁜 마음으로 새롭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물질이 풍요로워야 행복하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사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나는 새를 보라.’ ‘들의 백합꽃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진 것에 얽매이지 말고 푸른 하늘과 같은 하느님의 시야 안에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늘을 우러러는 마음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재판하고 사형 언도를 내린 유대인 최고 회의와, 그 언도를 확인하고 집행한 빌라도는 이 세상의 승리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패자로 죽어가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사는 사람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도 않고 그들의 박수갈채를 탐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실패의 공간에서도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덤의 공간을 넘어 하늘을 우러러 사는 신앙인들이 나타나면서 그들 안에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은 무덤으로 끝나는 것 같이 보였지만 그것을 넘어 사람들 안에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묵은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고린 5,17). 그리스도 안에 새로움을 체험한 바울로 사도의 외침입니다. 할 일을 다 하고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루가 17,10)라고 고백하는 마음의 허허한 공간에 하느님이 열어주시는 새로움이 있습니다. 그 새로움이 예수님의 승천입니다. 지키고 바치면서 강자에게 붙어살 듯이, 하느님 앞에서도 지키고 바쳐 자기 한 사람 잘 되어 보겠다던 우리의 ‘묵은 것’은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애완동물이 아닙니다. 비록 지금 가난하고 울어도 하늘을 우러러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삶을 배우고 실천하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높은 자리를 탐하라는 승천이 아닙니다. 하늘이 있고 그것을 우러러는 마음이 있는 곳에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느님의 진리는 우리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하느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 안에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그분이 살아 계시는 마음 안에 하느님이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성당 안에만 계시지도 않고, 예수님과 하느님을 빙자하여 높다고 행세하는 사람들과도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푸르고 넓은 하늘 아래, 비록 문화는 달라도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모든 사람들 안에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우리 삶의 허무한 공간을 넘어서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우리에게 하늘과 예수님은 겹쳐서 보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에 빌듯이 예수님께 빌고, 하늘을 우러러보듯이 예수님을 우러러 봅니다. 예수님은 답답한 우리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분으로 살아 계십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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