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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 한국 천주교회 창립 이벽성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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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봉균 [baeyoakim] 쪽지 캡슐

2006-05-28 ㅣ No.99939

한국 천주교회 창립 이벽성조 - 신희상
 
 
한국 천주교회 창립성조 이벽성조의 전기


                                                                                                  

                                                                                                            (퍼온 글)


1. 탄생과 어린시절


이벽 성조께서는 서기 1754년 갑술년, 영조왕 30년에 오늘의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에서, 경주 이씨 이부만공을 아버지로 청주 한씨를 어머니로,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 다. 이벽 성조의 집안은 고려 때부터 문관으로 유명한 익제 이제현의 후손으로서, 이벽 성조 의 증조부 때부터 무관으로 벼슬하였다. 그리하여, 이벽 성조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형님과 동생이 모두 장군으로서 높은 벼슬을 하였다. 이벽 성조께서 태어나실 때 이상한 서기가 마을에 서리므로, 마을 사람들이 이벽 성조를 비 범한 아기라고 부르게 되었으니, 그 아기의 눈은 맑고 밝게 빛났으며, 몸에서는 은은하게 고 매한 품기며 감돌았다. 더욱이 얼굴 생김이 아주 빼어나고 아름다워서, 여러 어린이들 사이 에서 출중한 품위를 나타내고, 가까이하는 모든 이로 하여금, 특출나게 마음과 정신을 빨아 들이는 듯한 고상한 인격을 느끼게 하였다. 이벽 성조께서는 어린 사절부터 매우 총명하고 침착하며 매사에 신중하면서도 뛰어났으므 로, 그 때에, 원로 대학자였던 성호 이익 선생께서 어린 이벽 성조를 보시고, \'이 어린이는 앞으로 커서 반드시 아주 큰그릇이 될 것\' 이라고 앞날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다섯 살 때에 이미 철이 나서 어른다웠고, 일곱 살 때는 경서에 달통하였다. 일찍이 여러 원 로 선비들과 학자들 앞에서 천학경서대의를 이야기하니, 듣던 학자와 선비들이 그 밝고 바 른 도리 설명에 탄복하며, 능히 반문하거나 답변치 못하고, 함부로 말하기를 꺼려하며, 온전 히 그 이론이 굴복 한 적도 있었다.


2. 학문수학과 천학연구 및 교우관계


그런데 집안이 대대로 무과에 급제하여 명성을 드날리며 벼슬하였으므로, 그 아버지 이부만 공은 공부와 인격이 뛰어난 둘째 아들, 이벽 성조께서 반드시 과거 급제하여, 가문을 크게 빛내줄 것으로 믿고, 그렇게 말하기가 일쑤였다. 나이가 들면서 이벽 성조께서는 당시 탁월 한 대학자 순암 안정복에게서 한동안 학문을 수학하였다. 그 당시 한국에는, 이미 약 반세기 전부터 천주교 도리에 관한 한서들이 중국을 통하여 들어와 있었으나, 이에 대하여 호기심 을 가지고 연구하는 학자들이 더러 있었을 뿐,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고, 또 대부분이 이를 학문적 지식의 대상으로만 여겨서, 좀 신기한 학설에 대한 공부로, 호기심을 채우는 정도이 었다. 그러나 이벽 성조께서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도리의 깊은 참뜻을 음미하 고, 종교적 신앙의 마음을 생동시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열아홉살 때, 권상복의 문집을 편찬하여 주는 동시에, 끝말을 쓰게 되었는데, \'천학 고\'라는 논문을 지어서 거기에 내게 되었다. 더욱이, 중국에 와서 많은 서적을 낸, 서양의 마 태오 릿치의 저서들을 읽고 깨달아서, 그 천학도리를 항상 깊이 묵상하였다. 또 어떤 때, 친 구들이 놀러 찾아오면, 술마시기나 잡담을 피하고, 천지만물의 깊은 의미와 도리를 풀어 이 야기해주고, 쉽게 알 수 있도록, 명쾌한 해설을 해주곤 하였다. 그 시절에 이벽 성조께서는, \'하늘에 오르는 길(상천도)\'이라는 글을 간결히 시문으로 지어서, 부근에 있는 봉선사라는 절 의 춘파대라는 사당에 기증하여 걸게 하였다. 스물 다섯 살 때, 성호 이익 선생의 학문을 계승하고자 하던 청년학도들이 어진 벗들과 어 진 선비들과 함께 어울리며, 학문을 토론하고 연구하였으니, 그 중에는 정약전, 이승훈, 권 상문 같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이벽 성조께서 천학도리를 아주 깊이 깨닫고, 믿고, 일부를 실천하고 있었으므로, 연세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 천주를 알고, 믿고, 공경하 는 신앙인이었다. 특히. 이벽 성조께서 밤낮으로 골똘히 읽고 연구하던 천학에 관한 서적들 은, 바로 이벽 성조의 고조부 이경상공이 소현세자의 스승으로, 소현세자를 모시고 중국에 8 년간이나 있다가 귀국할 때, 아담샬이라는 서양인 신부에게서 천주교 도리를 듣고, 천주교신 자 5명을 환관으로 데리고 왔는데, 그 때 가지고 왔던 많은 책들 중에 외국에서 가져 온 가 보로 대대로 집안에 전하여 오던 것이었고, 또 일부 서적은 그 당시에 바로 중국에 드나들 던 홍대용 등이 나무상자로 사가지고 온 것이었고, 이벽 성조의 아버지를 거쳐서 쉽게 이벽 성조에까지 전달이 되었었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조정에서는 물론, 일반학자나 양반들도 천 학서적을 읽는 것에 대해서 금하지 않았을 때 였다. 이벽 성조께서는 천주교 서적을 찾아서 손에 들어오는 대로 깊이 공부하고 연구하며 묵상하 고 나서는 더 이상 의심나는 도리가 없을 정도로, 넓고 또 깊게 믿은 후에는, 세상일들이 손 에 걸리지 않아서, 큰 산들과 고요한 강가를 거닐면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천주를 그리워하 고 기도하였다. 그래서 산수 좋은 곳을 두루 다니며, 북상과 기도를 즐기다가, 명산사찰에 이르러 도 닦는데 뜻을 둔 선비들이나, 학문에 열중한 면학자들을 만나면, 아주 시원스럽고, 정확하게, 우주만물의 창조주와 주재자이신 상제에 관하여 논증해주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이제 이벽 성조 사후(1785) 약 1세기 후에(1872) 한국 땅을 밝아보지 못한 프랑스인 작가 샤를르 달레에게까지 전달되었던 이벽 성조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살펴보자. [하느님의 섭리가 조선에 복음을 들여 보내기 위하여 쓰신 주요한 연장은 이름을 벽이라고 하는 이덕조였다. 그는 경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이미 고려조 때에 높은 벼슬을 한 그의 조상들 중에는, 학문에 이름을 날리던 인물들과 가장 높은 관공직의 영광을 누린 인물 들이 많이 있었다. 2, 3 대 전부터 이 집안은 무관직으로 전향하였고, 그 가족들은 중요한 무관직을 얻었었다. 이벽 성조께서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훌륭한 자질을 타고났으므로, 아버지는 나중에 그의 출세를 쉽게 만들 수 있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어려서부터 훈련시키 고자 하였다. 그러나 소년은 그것을 완강하게 거절하며, 죽어도 그런 짓은 하지 않겠다고 말 하였다. 이벽 성조께서는 자라나면서 키가 크고 힘이 무척 센 사람이 되었다. \"그는 키가 8척이요, 한 손으로 백근을 들 수 있었다. 그의 당당한 풍채도 모든 이의 주목을 끌었으나, 그는 무엇 보다도 마음의 자질과 정신적 재능이 빛났으며, 그의 언변은 기세좋게 흐르는 강물에 비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문제를 연구하여 파고들었으며, 그 나라의 경서를 배울 때에도, 어려 서부터 문장 속에 숨은 신비스러운 뜻을 탐구하려는 습성이 있었다.\" 이벽 성조께서는 책들 을 배우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의 학문 습득을 지도하고 도와줄 만한 모든 학자들 과 교제하였다. 그는 농담을 좋아하였고, 조선 예법의 복잡하고 세밀한 규칙에 별로 구애되 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비록 이 나라에서 직업적 학자들을 구별하게 하는 어색한 점잔을 일부러 늘 빼지는 않았지만, 그 행동 거지는 무엇인가 고상하고 위대한 기풍을 자연스럽게 풍기고 있었다.


3. 천진암 강학회에서의 천학논증과 신앙수련


1779년 기해년 정조 삼년 음력 섣달, 양력으로 1780년 정월 중순 경이었다. 지금 이벽 성조 묘자리가 있는 천진암에서, 학자 권철신이 정약전, 김원성, 권상학, 이승훈, 정약종, 이총억, 정약용, 권일신 등과 함께 학문연구 강학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학자 권철신이 강학회를 개 최한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이벽 성조께서는 서울에서 일백여리 눈길을 걸으시어 엄동설한 에 마재와 항금리를 거쳐, 강학회 주최자 권철신이 늘 거하던 앵자봉 동편 아래 주어사에 밤늦게 도착하셨다. 그러나 강학회는 천진암에서 하고 있음을 아시고, 그 밤으로 길을 떠나 사 눈으로 덮인 앵자산 마루를 넘으시어 한밤중 늦게서야 천진암에 이르셨고, 학자들을 만 나시어 촛불을 밝히시고, 경서를 담론하셨다. 여러 날 계속된 강학회에서, 이벽 성조의 강론 과 논증을 통하여 학자들은 유불선과 여러 경서에 담긴 도리를 하나 하나 비교 연구검토하 여, 우주만물에는 조물주 천주 계심과, 사람에게는 불사불멸하는 영혼이 있고, 죽은 후에는 상선 벌악을 하는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비롯하여, 천주교 도리를 대강 깨닫고 믿으며, 아는 바를 즉시 실천하였다. 이때 이벽 성조께서는 성교요지를 하필하시고, 천주공경가를 지으셨 고, 정약종은 십계명가를 지었다. 또 권철신은 일과표와 규정을 만들어서, 모든 이가 새벽이 면 일어나 얼지 않는 빙천수로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나서 숙야잠을 외우고, 해가 뜨면 경 제잠을, 정오에는 사물잠을, 해가 지면 서명을 열심히 외우며 정성껏 기도하고 수련하였다. 이때 이벽 성조와 학자들의 마음과 몸가짐은 장엄하고 신중하며 열렬하여 규정과 법도를 어 기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특히 이승훈은 이 때를 당하여 숫돌에 갈 듯 자신을 철저히 연마 하였다고 훗날 다산 정약용은 회고하며 기술하였다. 더욱이 칠일마다 주일 하루는 천주공경 에 바쳐야 함도 알았으나, 그 당시 우리 나라에는 요일이 없었고 아직 몰랐으므로, 음력으로 따져서 매월 이레, 열 나흘, 스무 하루, 스무 여드레를 주일로 삼아, 온종일 대재와 소재, 파 공과 기구, 독경과 잠심으로 지냈다. 이 강학회를 통하여 이벽 성조께서는 천학을 천주교로, 천주학을 천주교로, 즉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키셨다. 이렇게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천주 성신의 비추심을 따라 누구의 권고나 가르침도 없이, 천주의 진리를 스스로 탐구하고 믿으며 실천하므로써, 여기서 한국 천주교 신앙의 움을 틔우고, 한국 천주교회의 싹이 돋아나게 하였다. 이제 강학회에 관한 프랑스 역사가인 샤를르 달레의 기록을 보자 [기해(1779)년에 유명한 학자 권철신은 정약전과 학식을 얻기를 원하는 그 밖의 학자들과 함께 방해를 받지 않고 깊은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외딴 절로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 성조께서는 크게 기뻐하며 자기도 그들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때는 겨울이라 길 마다 눈이 덮어 있었고, 절까지는 백여리나 되었다. 그러나 그런 곤란이 그렇게도 열렬한 그 의 마음을 꺽을 수는 없었다. 그는 즉시 출발하여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길을 용감하게 걸어 갔다. 그의 여행 목적지까지 얼마 안되는 거리에 갔을 때 밤이 되었다 그는 더 오래 기다릴 수가 없어서 내처 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자정께 어떤 절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과, 자기가 찾아가는 절은 그 산 뒤쪽 산허리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의 실망은 어떠하였겠는가. 그 산은 높고 눈이 쌓이고 호랑이 굴이 많은 곳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이벽 성조께서는 중들을 깨워 자기와 동행케 하였다. 그는 맹수의 습격을 막아내 기 위하여 쇠꼬챙이가 달린 몽둥이를 짚고서 캄캄한 밤중에 길을 계속하여 희망하던 목적지 에 도달하였다. 이벽 성조와 그 일행의 도착을 산 속에 파묻힌 고적한 그 절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무슨 까닭으로 이 아닌 밤중에 이처럼 손님들이 찾아 들었는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미구 에 모든 것이 밝혀져서 두려움 뒤에 기쁨이 뒤따랐으며, 그 기쁜 상봉으로 빚어진 심정을 털어놓느라고 미처 날이 새는 것도 몰랐었다. 연구회는 10여일 걸렸다. 그 동안 하늘, 세상, 인성, 등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탐구하였 다. 예전 학자들의 모든 의견을 끌어내어 한점 한점 토의하였다. 그 다음에는 성현들의 윤리 서들을 연구하였다. 끝으로 서양 선교사들이 학문으로 지은 철학, 수학, 종교에 관한 책들을 검토하고, 그 깊은 뜻을 해독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온 주의를 집중시켰다. 실은 당시 조선 의 많은 학자들이 그러한 책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니, 그 까닭은 연례적인 사신행차 때에 조선 선비들이 따라가서 서양의 과학과 종교에 대해서 중국인과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과학서적 중에는 종교의 초보적 개론도 몇 가지 있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 영혼의 신령성과 불멸성 및 7조종을 그와 반대되는 덕행으로 극복함으로써 행실을 닦 는 방법 따위를 다른 책들이었다. 중국 서적들의 어둡고 흔히는 모순된 학설에 익숙한 그들 은 정직하고 진리를 알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인지라, 천주교 도리에는 아름답고 이치에 맞는 위대한 무엇이 있음을 이내 어렴풋이 느꼈다. 완전한 지식을 얻기에는 설명이 부족하였으나, 그들이 읽은 것만으로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그들의 정신을 비추기에 넉넉하였다. 즉시로 그들은 새 종교에 대하여 아는 것은 전부 실천하기 시작하여, 매일 아침저녁으로 엎드려 기 도를 드렸다. 7일 중 하루는 하느님 공경에 온전히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읽은 후로는, 매월 7 일, 14일, 21일, 28일에는 다른 일은 모두 쉬고 묵상에 전념하였으며, 또 그날에는 육식을 피 하였다. 이 모든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극히 비밀리에 실천하였다. 이벽 성조의 마음속에 보배로운 씨앗이 이렇게 떨어지기는 하였으나, 그는 종교에 대한 이 초보적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고 있었으므로, 그의 온 정신은 자기 교양을 보완하 는데 필요한 더 많고 더 상세한 서적이 있을 북경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 책들을 장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여러 해 동안 갖가지 방법을 시도하여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기회 있을 때마다 천주교 교리를 깊이 연구하고 토론하 기를 그치지 않았다. 초대 천주교인들이 쓴 이야기를 보면, 그의 누이의 1주기를 기회로 마 재 정씨 집에서 얼마 동안 머무른 다음, 1783년 초여름 4월 15일에 이벽 성조께서는 정약전, 약용 형제와 함께 배를 타고 서울로 향하였다. 길을 가는 동안 그들의 이야기의 부제는 역 시 그들이 늘 하고 있는 철학연구였다. 하느님의 존재와 유일성, 천지창조, 영혼의 신령성과 불멸성, 후세의 상선벌악 들 문제를 차례차례로 검토하고 해석하였다. 승객들은 그렇게 아름 답고 위로되는 진리를 처음 듣고 놀라서 황홀해졌다. 이런 연구회가 자주 반복되었을 것은 매우 있음직한 일이다.


4. 북경 천주교회로의 이승훈 선생 파견


그리하여 1783년 가을, 이벽 성조께서는 몇 해 동안 수차에 걸친 시도와 노력 끝에 마침내 이승훈을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하시며 거룩히 훈계하시니, 이승훈은 이를 듣고 스승의 말씀 으로 마음에 새겨, 영세와 성서, 성물 구입 등 부여된 사명을 정성껏 완수하고 귀국함으로 써, 한국 천주교회의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에 대한 프랑스인 역사가 샤를르 달레의 기록을 보자. [하느님께서는 그렇게도 열성으로 진리를 찾고 있던 이 정직한 영혼들의 뜨거운 소원이 실 현되기를 마침내 허락하셨다. 그 해 1783년 겨울, 이동욱이 북경 조정에 가는 서장관으로 임 명되었다. 그의 아들 승훈은 이벽 성조의 절친한 친구 중 하나였는데, 그가 아버지를 따라 그 여행을 하게 되었다. 이벽 성조께서는 이승훈이 북경 사절단에 자기 아버지를 따라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몹시 기뻐하였다. 즉시 그를 찾아갔는데, 그 시대의 문헌에 의하면 그가 승훈에게 한, 주목할 만 한 말은 다음과 같다. \"자네가 북경에 가는 것은 참된 교리를 알라고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 는 훌륭한 기횔세. 참 성인들의 교리와 만물의 창조주이신 천주를 공경하는 참다운 방식은 서양인들에게서 가장 높은 지경에 이르렀네. 그 도리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것 없이는 자기 마음과 자기 성격을 바 로 잡지 못하네. 그것이 아니면 임금들과 백성들의 서로 다른 본분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것 이 없으면 생활의 기초가 되는 규칙이 없네. 그것이 아니면 천지창조며 남북극 원리며 천체 의 규칙적 운행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그리고 천사와 악신의 구별이며, 죄를 사하기 위한 천주성자의 강생이며, 성인은 천당에서 상을 받고 악인은 지옥에서 벌을 받는 것 등, 이 모 든 것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종교서적을 아직 모르고 있던 이승훈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며 감탄하여 그 책을 몇 권 보자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벽 성조께서 가지고 있던 책 들을 대강 읽어보고 나서 기쁨에 넘쳐, 자기로서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벽 성조께서 는 대답하셨다. \"자네가 북경에 가게 된 것은 천주께서 우리 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코 자 하시는 표적일세. 북경에 가거든 즉시 천주 당을 찾아가서 서양인 선비들과 상의하며 모 든 것을 물어 보고, 그들의 교리를 깊이 파고들어, 그 종교의 모든 예배행위를 자세히 알아 보고, 필요한 서적들을 가져오게. 삶과 죽음의 큰 문제와 영원의 큰 문제가 자네 손에 달려 있으니, 가서 무엇보다도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 이벽 성조의 이 말은 학문의 갈증보다도 종교의 갈증이 그에게 더욱 절실하였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마음을 준비한 것이니, 그에게는 구령대사가 점점 더 유일 한 중대사가 되어 갔던 것이다. 그의 말은 이승훈의 마음 속 깊이 파고 들어갔다. 이승훈은 그것을 도사의 말씀처럼 받아들였고, 자기들의 공통된 소원의 실현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이승훈은 드디어 1783년말 경에 북경을 향하여 떠났다. 그는 북경에 도착하여 북당을 찾아 가 루이 드 그라몽 신부를 방문하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승훈은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배 우기 시작하여 미구에 성세를 받을 준비가 다 되었다. 귀국 길에 오르기 전에 성세성사를 받았는데, 그가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희망으로 베드로란 세례명을 받았다.


5.
5. 신앙피정과 최초의 전교활동


갑진년(1784) 봄에 이승훈 베드로는, 북경에서 얻은 많은 책과 십자고상과 상본과 신기한 물 건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에게 제일 급한 것은 이벽 성조에게 자기 보물의 일부를 보내는 것이었다. 이벽 성조께서는 그동안 날을 세어가며 사신들의 귀국을 몹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벽 성조께서는 친구가 보내준 많은 서적을 받자마자, 외딴 집을 세내어, 그 독서와 묵상에 전념하기 위하여 들어앉았다. 이제 그는 종교의 진리의 더 많은 증거와, 중국과 조선의 여러 가지 미신에 대한 더 철저한 반박과, 7성사의 해설과, 교리문답과 복음 성서의 주해와, 그날 그날의 성인행적과 기도서 등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을 가지고 그는 천 주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체적으로, 또 세부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책을 읽어나 가는 데 따라서 새로운 생명이 자기 마음속에 뚫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은혜를 알려 주고자 하는 욕망도 커갔다. 얼마동안 연구한 뒤에 자기 은둔처에서 나와, 이승훈과 정약전, 약용 형제를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나라의 무수 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가 그들에게 구속의 은혜에 참여케 하기를 원하시오. 이 것은 천주의 명령이오. 우리는 천주의 부르심에 기를 막고 있을 수가 없소. 천주교를 전파하 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오.\" 그 무렵 북경에서 영세한 이승훈 베드로가 이 성사를 이벽 성조와 권일신에게 주었다. 본명 선택은 되는대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벽 성조께서는 조선의 개종사업을 시작하여, 구세주 가 오시는 것을 분비하였으므로, 본명을 요한 세가로 하였고, 권일신은 복음 전파에 헌신하 기로 결심하고 동양의 사도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성인을 주보로 하여, 그들 모범으로 삼고 그를 보호자로 모시기로 하였다. 이벽 성조 자신은 곧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우선 중인계급의 친구들 중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몇 사람에게 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활기있고 박력있는 말을 듣고서 거의 즉시 응하였다. 그들 중에는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가 있었다.


6. 미신자 학자들의 교리토론회 승리


이벽 성조께서는 여러 양반이기도 전교하여 그들을 입교 시키셨다. 그는 자기 직책에 충실 하여 열성을 늦추지 않고 도처에 복음을 전하며 이리 저리 두루 다녔다. 그의 성공은 외교 인 학자들의 감정을 지극할 만큼 반향을 일으켰다. 이 학자들은 이 새로운 교리가 그들의 국민신앙을 밑뿌리부터 뒤집어엎는 것임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들 중 여러 학자들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그르치고 있음을 설득하여, 이들을 유교로 다시 이끌어 들이 려고 해 보았다. 맨 먼저 이 시도를 한 사람은 이가환이었다. 이가환은 품위있는 집안의 자 손으로, 그 조상들 중에는 고명한 학자가 여럿 있었고, 이가환 자신도 아직 젊기는 하나 평 판이 높았다. 천주교가 빨리 전파된다는 말을 듣고 그는 말하였다. \"이것은 매우 큰일이다. 저 외국 교리가 이치에 어긋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다. 그 러니 내가 가서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겠다.\" 드디어 토론할 날짜를 정하였다. 두 학자의 친 구들과 호사가의 한 떼가 이 굉장한 토론에 참관하려고 이벽 성조의 집에 모였다. 이가환은 먼저 이벽 성조에게, 그가 오류라고 부르는 것을 버리고 돌아오게 하려고 해 보았다. 이가환 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하나하나 그 논적에게 의해 지적되고 반박 되었다. 이벽 성조께서는 세밀한 점에까지 추궁하여 이가환의 논리의 건축을 모두 파괴하고 먼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가환은 그의 논거를 다시 일으켜 보려고 온 힘을 기울였으나 헛일 이었으니, 이벽 성조의 논리는 언제나 전후가 일치하여 그가 제시하고 증명 못하는 것은 아 무 것도 없었다. 조선전기에 의하면, 이벽 성조의 말은 분명하고 똑똑하여 사방에 빛을 던져 주었으며, 그의 논쟁은 태양같이 빛났고, 바람처럼 몰아치며 환도처럼 끊어냈다고 한다. 이 독특한 논전을 구경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 때 훌륭한 광경을 목도하였다. 그것은 옛날 학파의 지도자 중의 하나요, 캄캄한 중국 학설의 한 투사가 복음의 광명을 옹호하는 자와 드잡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복음의 옹호자는 진리에 의거하여 끄떡 아니하는데, 반대편 은 그의 유연성에도 불구하고 쓰러졌으니, 다시 일어나도 다시 쓰러지는 것이었다. 천주교의 신앙은 이 탁월한 무대에서 승리하였다. 그것은 마음이 순진하고 정직한 사람들을 많이 사 로잡았으며, 새 신자들의 마음속에 그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그렇지만 이벽 성조의 논적으로 하여금 무기를 버리게 하기 위하여 하루로는 넉넉지 못하였다. 토론은 사흘 동안 거듭되었 다. 그러나 그 결과로는 새 교리의 단단함과 아름다움을 점점 더 그러내는 결과 밖에 가져 오지 않았다. 마침내, 완전히 패배한 이가환은 내놓을 만한 구실이 없어졌으므로, 다음과 같 은 기억될 만한 말을 하였다.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다. 그러나 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잡다 줄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가환은 돌아갔다. 그리고 그때부터 천주교에 관하여는 다시는 입을 벌리지 않고, 그것을 조금도 상관하지 않았다. 이벽 성조께서는 그가 얻은 영광을 이용하여 새 입교자를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 아 새로운 적이 또 하나 나타나, 저 유명하여진 토론회의 결과와 신앙이 자꾸 전파된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편 옹호자들과 함께 논전에 참가코자 하던 이는, 가문의 높은 품위와 학식 이 모두 훌륭한 이기양이었다. 이벽 성조께서는 자기가 전하는 진리에 자신이 있는지라, 그 런 토론을 피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세상의 기원과, 우주 각 방면의 아름다운 질서와, 하 느님 섭리의 증거를 전개하였다. 그는 사람 영혼의 본성과 그 여러 자기 기능이며, 이 세상 에서의 각자의 행실과 후세의 상벌과 기묘한 조화 등을 설명하셨다. 그리고, 끝으로 천주교 교리의 진리는 공격할 수 없는 원리에 의거하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이기양은 토론을 견뎌 낼 수 없어 침묵을 지켰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믿는 듯 하였으나, 솔직하게 그렇다고 시인할 결심은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가 물러간 뒤, 그 두 학자에 대하여 이벽 성조께서는 이렇 게 말하였다. \"저 두 이씨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니 그들은 천주교를 믿을 뜻은 조금도 없으니, 아무런 희망도 없다.\"


7.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기초를 다지다.


그러나 이벽 성조께서는 자기 나라에 복음을 빨리 전파하고 천주교회를 튼튼하게 세워 놓기 위하여, 학식과 평판으로 존경을 받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인물들을 몇 명 끌어 들여, 그 지주로 삼을 생각을 하였다. 이제는 위에 말한 두사람에게는 기대를 걸지 않고, 전 에 좋은 심정을 보인 일이 있는 양근 권씨 가문으로 눈을 돌렸다. 벌써 고려 시대부터 명성 놓던 이 가문은, 왕조가 바뀔 때 가장 먼저 새 임금에게 가담한 가문 중 하나였으므로, 그 명망은 커갈 뿐이었다. 호를 녹암이라고 하는 권철신은 본서 처음에 이야기가 나온 바 있는, 절에서 열렸던 연구회의 주창자로서, 그 때 가장 유명한 학자 중의 하나이고, 그 연구회의 회장이었다. 그는 형제 중 맏이였는데, 5형제는 전국 각처에서 모여든 제자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벽 성조께서는 이 학자들을 입교시켜, 천주교의 전파자와 지지자로 삼는 것이 매우 유익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같은 해 갑진년(1784) 9월에 그는 양근 고을 감산에 있는 권씨 집으로 갔다. 그가 도착하자 마자 종교에 대한 강의가 시작되었고, 오래지 않아 진리가 환하게 빛났다. 50세쯤 된 맏이 철신은 중국 경서의 철학과 논리를 연구하는데 일생을 보낸지라, 처음에는 망설였다. 그는 복음의 광명에 저항하지는 않으면서도, 자기 명망을 높여 준 거창한 일의 모든 결과를 한순 간에 잃은 결심을 하지 못하였다. 그는 얼마 후에야 천주교에 입교하여 암브로시오라는 본 명으로 성세를 받았다. 그의 항구한 신앙과 거룩한 생애는 이 다음 우리가 볼 것처럼 그에 게 훌륭한 화관을 장만하여 주었다. 그런데, 셋째 권일신은 즉시 입교하였고, 오래지 않아 그의 비상한 열심과 격식을 갖춘 열성은 이벽 성조의 희망이 엇된 것이 아니었음을 충분히 증명하였다. 그는 자기가 신봉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가족 전부를 가르치기 시작 하였고, 자기 친구와 친지들에게 신앙을 전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이 성공은 그의 명성, 학 식, 덕행의 권위로 확보되는 것이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노력을 크게 축복하시어, 양근 고 을이 당연히 조선 천주교회의 요람으로 간주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 세사람, 즉 요한세자 이벽 성조와 이승훈 베드로와 권일신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는 자기 들이 개척한 고상한 길로 보조일치하게 나아가면서,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동포들의 눈에 신앙의 광경을 비추어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 때까지는 복음의 전파가 공공연하게 별 지장 이 없이 행하여졌다.


8. 한국 천주교회가 최초로 겪는 을사박해와 이벽성조의 장렬한 최후



1785년, 을사년 이른 봄, 드디어 최초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1년간에 걸쳐 약 500명의 입교 영세자를 낸, 이벽 성조의 수제자들이었던 학자들은, 명례방 김범우 선생집에서 집회를 갖고 있었다. 이벽 성조께서는 교회예절 거행을 위하여, 청색도포로 정장하시고, 안 사랑 상좌에 무릎을 꿇고, 손에 책을 들고 엄숙한 자세로, 강론과 교리해설을 듣고, 함께 기도하고 있었 다. 그 중에는 1년 전에 북경 천주교회에 파견되었던 이승훈, 대학자이던 사우 거사 권일신, 그 아들 권상문, 천재적인 두뇌와 박학한 학자이던 정약용과 그 형들인 약종과 약전, 그 외 에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지황, 김범우, 이총억 등 한국천주교회창립의 기둥과 같은 인물 들이 모여 있었다. 이 때 추조금리들이 갑자기 들어와, 수색을 하고, 성물과 성서를 몰수해 가는 동시에, 집주 인이며 중인 계급인 김범우 선생을 체포하여 가고, 다른 이들은 양반집안의 신분을 가진 학 자들이므로, 그대로 집에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양반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을 함부 로 벌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아가서, 자신들도 모두 김범우와 같은 종교를 신 봉하는 사람들이니, 김범우에게 내라는 벌을 똑같이 내려달라고 청하였다. 사실 당시 사회 관습으로 볼 때, 이 여러 양반집 학자들을 함께 벌한다는 것은 매우 난처한 일이고, 또 현명 하지 못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양반집안 출신의 문중에서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또 양반은 함부로 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추조판서는, 이 양반학자들을 잘 달래다시피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김범우만 은 계속하여 모진 매를 때리면서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양반들을 벌하고 골탕먹이는 방 법이 있었으니, 그것은 당시 사회에서 같은 양반들의 문중세력을 이용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이미 양반집 문중마다 종친회, 즉 문중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문중회의가 열리지 않 은 양반집들에서는, 천학을 규탄하는 통문이 서울에 돌려지기 시작하였고, 이 통문을 서울의 4대문 안과, 문밖, 그리고, 강상 지역과 강하 지역의 여러 대감집들과 양반집들에게 돌리는 책임자들이 따로 정해졌을 정도이니, 그 때의 상황은 대단한 것이었다. 통문이란, 오늘의 신 문과 유사한 것으로서, 소식을 전달하고, 여론을 조성하는 수단의 순회서한의 일종이었다. 그 당시 돌렸던, 통문의 내용과 그 통문을 돌리던 각 지역 담당자들의 명부가, 천주교 박해 자들이 기록한 책에 지금까지 남아서 전하고 있으니, 그 얼마나 심했던 것인지를 알 수 있 다. 이승훈 선생의 문중인, 평창 이씨 종친회가 열려서,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이 끌려가, 집안 의 어른들 앞에서 무안과 봉변을 당하였고, 정약종과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이 라주 정씨 문중회의에 소환되어 가서, 역시 문책을 당하였다. 안동 권씨네와 경주 이씨네도 마찬가지였 다. 그런데, 이승훈과 정약용은 아버지에게 야단을 맞고 나서, 집안의 큰집 작은집을 돌아다 니며, 집안에 소란을 끼친데 대하여 사과하였다. 이것은 배교가 아니고, 단순한 사과이다. 그 당시로서는 본인들이나 또는 문중 원로들간에나 아직 서로가 배교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 다만, 집안에 사문난적이 태어나서 집안망신을 시키고 있다고 야단하는 원로들 앞에 가서, 죄송하다는 인사와 더불어, 집안 어른들을 걱정시켜드렸으니, 용서하라는, 의례적인 인사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경주 이씨 문중회의가 가장 혹심한 반발과 무서운 질투로 충만하였다. 그 이유는, 이벽 성조의 형님과 동생이 무과에 급제하여, 모두 장군 벼슬에 있었고, 또 이벽 성조의 인 품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학식이 출중하여, 모든 선비들이 천학도사로 존경하였으며, 서울 장안에서 나이가 이벽 성조보다 18세 이상씩 더 먹은 당대의 저명한 원로 대학자들과의 천 학토론에서, 명쾌한 승리를 계속 거둠으로, 명망이 드높았는데, 친척들 중에는 이에 대해서 시기와 질투심을 갖는 자들이 없지 않았다. 그리하여, 경주 이씨 문중회의에서는, 강경한 반대자들이, 자기네 경주 이씨들이 서울 장안 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으니, 그 이유는 경주 이씨인 이벽 성조께서 천학을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부모에서 제사드리지 말라, 남녀가 7세가 되면 한자리에 앉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양반집 부녀자들이 남정네들과 동석하니, 이는 오랑캐의 법도이므 로, 양반을 상놈으로 만들고, 상놈을 양반으로 만드는 이러한 불법을 가르치는 사문난적은 당장, 경주 이씨 문중에서 제명처분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이벽 성조의 아버지 이부만 장군은, 문중회의에 번번히 불려가서, 수치스러운 모욕 과 문책을 당하였다. 아들 이벽 성조의 천학운동을 막든가, 막을 수 없으면, 아예 족보를 빼 어버릴 터이니, 어디에 가서나, 경주 이씨로 칭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족보에서 삭제되면, 양 반에서 상놈이 되는 것이고, 하루아침에 탈관삭직에 패가망신하는 것이었다. 이벽 성조의 아 버지 이부만공은, 가뜩이나 성격이 괄괄하고 쉽게 격분하는 무관이었으며, 체면과 위신을 크 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사실 당시 한국의 양반들은 모두가 그러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 다. 이부만공은 아들 이벽 성조를 불러 놓고, 달래기도 하고, 야단치기도 하고, 위협도 하고, 갖 가지 수단을 다 써 가면서, 천학운동을 하지 말 것과, 집안 어른들을 찾아다니면서, 잘못을 빌도록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문중에서는, 평창 이씨 집안에서 이승훈 선생의 사과 와, 라주 정씨 집안에서의 정약용 등의 사과 소식을 들은지라, 사과조차 하지 않는 이벽 성 조의 태도에 대하여 한층 더 격분하였다. 그래서, 서울 시내 양반들의 통문이 사방으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규탄의 모임과 소리가 요란한데다가, 이 압력에 다 한층 불붙어서, 경주 이씨 문중회의는 더 더욱 격렬하게 끓어 오르고 있었다. 따라서, 성질이 급한 이부만공은 펄펄 뛰며, 아들 이벽 성조를 집안에 앉혀 놓고, 발을 굴렸다. 온갖 수단 방법으로도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은 아들의 굳은 마음과 의 지를 보고, 아버지는 이제 아들의 마음을 돌린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느끼고, 모든 것을 포기 하고, 아들도, 세상도, 명성도, 가정도, 다 버리는 마음으로, 자살의 길을 택하기에 이르렀고, 대들보에 노끈을 걸어, 목을 매달기에 이르렀다. 이부만공은, 둘째 아들이 천학을 함으로 인 하여, 족보가 삭제되고, 상놈이 되는 동시에, 가족들이 벼슬에서 모두 떨어져서 패가망신을 하고 살아가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천학을 하는 이벽 성조 보는 앞에서 목을 매달아 죽기 를 결심하고, 주저없이 실천에 옮기었다. 이부만공이 목을 매달게 되자, 온 집안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인과, 자녀들과 친척들과 벗들이 모두 이벽 성조에게 달려들어, 아버지의 목매달은 모습을 보이며, 야단을 쳤다. 특히 그 어머니는, 아들 이벽 성조에게, \"천학이 아무 리 좋은 종교라지만, 아버지를 목매달아 죽게 하는 그런 종교를 누가 믿으란 말이냐? 아버 지가 목매달아 죽는데도, 그래도 천학운동을 하러 다니겠다는 말이냐?\" 하며 애원과 탄식과 절규로 부르짖었다. 이벽 성조께서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사회윤리의 제일로 삼는 때이었다. 사실 아버지를 목매달아 죽게 하는 종교 로 알려지면, 아무도 이러한 종교를 믿을 사람이 없었다. 형제들과 친지들과 어머니는 애걸 하며 절규하였다. \"지금 아버지가 저렇게 목매달아 죽는데도, 그래도 그 천학인지 무엇인가 를 또 하러 다니겠느냐?\" 이벽 성조께서는, 우선 아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하여, \"그럼 안나 가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이것이 이른 바 두 가지 뜻을 가진 말이었다고 달레는 기록하였 다. 이벽 성조께서는, 그때까지, 명례방 김범우 선생네 집으로, 마재 정약종네 집으로, 양근 권철신네 집으로, 이리저리, 천학강론을 하러 항상 나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우선 서울시내 가 소란하고 양반문중마다 종친회가 열러 시끄럽고, 가정이 불목으로 극에 달하여, 아버지가 목을 매달고 있으니, 이 상태에서 천학을 강의하러 나가 다닐 수도 없고, 또 나가 다녀도, 김범우 선생은 감옥에서 혹심한 매를 맞고 있고, 양반집 문중마다 천학배척의 기운이 감돌 며, 반발과 규탄이 요란하므로, 실제로 당분간, 나가다니며, 전처럼 활동하는 것을 줄이고, 조용히, 즉 집안과 문중이 가라앉을 때까지, 좀 고요히 있겠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즉시 목을 매달고 있는 이부만공, 즉 남편에게, 아들 이벽 성조가 이제 천 학운동을 하러 나가지 않겠다고 하였으니, 죽지 말라고 하여, 끈을 풀고 집안이 잠시 조용하 게 되었다. 그래서, 형제들과 친척들이 모두 천학을 하러 안나가기로 한 것은 정말 잘한 일 로서, 아버지도 구하고 가정도 구하고, 문중의 체면도 살려주는, 지극히 마땅한 처신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그러므로, 이부만공은 사람을 문중회의로 보내어, 아들이 천학을 하 러 나가지 않기로 하였으니, 모두들 안심하고, 족보는 삭제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문중회의에서는, 특히 강경파 편에서는, 이를 신용하지 않았다. 평소부터 천학도사 이벽 성조가 어떠한 인물이며, 그 기백이 어떠한 지를 잘 알고 있던 터이므로, 강경파 문중 에서는, 자신들을 우롱하지 말라고 일축하면서, 절대로 신용할 수 없는 일이니, 본인 자신이 직접 문중회의에 나와서 자명소를 하라고 하였다. 자명소란, 자신의 입장을 자신이 직접 밝 히는 것이다. 이부만공은 아들 이벽 성조를 불러서, 천학운동을 하러나가지 않기로 하였으 니, 문중회의에 출두하여 사과하는 동시에, 자명소를 하고 오라고 말하였다. 즉, 천주학을 그 만둔다는 것을 직접 본인의 입으로 말하므로써 족보에서 명단이 삭제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 이었다. 그런데 이벽 성조께서는 아버지에게 말씀드리기를, \"문중회의에는 출두하겠으나, 거 기 가서 천주학을 배척하거나 그만두겠다는 말을 안할 것이고, 오히려 우리 경주이씨 문중 이 모두가 천주학을 해야 한다는 일장의 강설을 하고 오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실, 이 가환, 이기양, 권철신, 같은 대 학자들이 설복되지 않을 수 없는 깊고 넓은 학식과, 밝고 확 실한 논법으로 달변가인 이벽 성조에게 대적할 만한 선비는 경주 이씨 문중에 없었고, 경주 이씨 문중에 뿐 아니라, 당시 한국 학계에는 없었다. 그렇지만, 경주이씨 문중이 들고 일어 난 그 참된 원인은, 당시 사회 풍습상 경주이씨들의 체면 손상이 말이 아니라는 점과, 또, 문중에서 이벽 성조의 가정이 과거에 급제하고, 이벽 성조의 인품이 출중하여, 많은 선비들 의 흠모의 대상이 되어 있어서, 사기와 질투심이 자극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상, 문중에서는, 천학도리에 대하여 깊이 알려하지도 않았고, 다만 옛부터 전해오는 전 통적 관습에 어긋난다는 점 하나만을 내세우며, 집단적으로 소란을 피우며, 박해를 가하였 다. 이러한 상태에서, 아버지 이부만공은 아들이 천학운동을 그만두기로 했다고 문중에 이미 성급하게 통고한 후였기 때문에, 이제 아들 이벽 성조께서 문중회의에 자명소하러 나타나서, 천주학은 만인이 다 해야 하며, 경주이씨 문중부터 모두가 신봉해야 한다고 강설을 하게 된 다면, 아버지 이부만공은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고, 문중회의를 우롱한 것이 되며, 또 이벽 성조의 변론을 비록 머리로는 알아듣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지 모르지만, 마음으로는 더욱 무섭게 반발할 것이 분명하였고, 따라서 문중에서 족보를 빼어버리며 제명 처분할 것 이 확실하였다. 이렇게 상황이 되자, 이부만공은 문중회의에 사람을 보내어, 아들이 병으로 갑자기 누어서, 몸이 몹시 불편하여, 문중회의에 나가서 자명소를 할 수 없으니, 이해하여 달라고, 거짓 핑 계를 대는 동시에, 아들이 앞으로 천주학을 안하기로 하였으니, 믿어달라고 전하게 하였다. 그러나 문중회의에서는 강경파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면서, 이벽의 지능과 인품을 알거니와, 천학을 그만둘 인물이 아니니,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한편, 만일 갑자기 병이 나서 회의에 도 나올 수 없을 정도라면, 광암 이벽 성조의 달필을 누구나가 다 잘 아는 바이니, 직접 글 로 써서, 천주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도록 하라고 요구하였다. 아버지가 아들 이벽 성 조에게, 붓으로 천주학을 하러 나가다니지도 않을 것이고, 또 천주학을 다하지 않겠다고 써 서, 종친회에 보내라고 하자, 이벽 성조께서는 령득경신이라는 글을 지어내니, 이것은, 천주 를 공경하는 방법과 순서를 알게하는 내용이었다. 아버지 이부만공은 이 글을 보고는 크게 분노하며, 이는 내 자식이 아니라고까지 극언을 하였다. 그러나, 가정의 운명 때문에 문중회 의에 이를 알릴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문중회의에 사람을 보내어, 아들이 갑자기 병이 더 욱 심하여져서, 붓을 잡고서 떨려서 글도 쓸 수 없을 정도이니, 그리 알고, 천학운동은 안하 기로 하였으니, 아비가 책임을 지는 이상, 믿고, 의심하지 말라고 전하게 하였다. 그러자, 종친회에서는, 더욱 의심을 하며 더욱 격분하였다. 그렇게 건강하고, 그렇게 활달한 광암 이벽 성조께서 무슨 병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앓는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문중회의에서 대표를 보내니, 그 대표가 만나서 물을 때, 고개를 끄 덕이며 의사 표시를 하도록 하라고 통고 해오는 동시에, 대표자들을 보내게 되었다. 이부만공은 다시 당황하기 시작하였고,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기는커녕 점점 더 얽히고 설켜 나가는 가운데,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최후의 방법으로, 아들 이벽 성조를 그 안 사랑 방에 가두고, 출입문에 못을 치고, 집밖에는 새끼줄로 금줄을 매고, 종들을 시켜 지키게 하 고, 아들 이벽이 천주학을 하다가 천벌을 받아, 열병(속칭 염병)에 걸려서 다 죽어가니, 가족 들도 전염될까 두려워 시급히 어디로라도 옮기도록 주선을 해야 한다고 서둘렀다. 200년 전 한국 사회에서 염병이라고 하면, 그것은 하늘이 내리는 병이고, 여기에 걸려서 살아남는 사 람은 거의 없었다. 전혀 약이 없었고, 심한 경우, 이웃과 마을이 전부 몰사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한국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저주는 염병에 걸리는 말이었다. 이벽 성조께서 천학운동을 하면서, 부모제사를 안바쳐도 되며, 남녀와 양반상놈이 함께 해도 된다고 가르치더니, 천벌을 받아, 염병에 걸렸다고 하자, 문중회의 대표자들과, 문중에서는, 더 이상 증거가 필요 없다. 염병에 걸렸다는 것이 최대의 증명이고, 하늘이 바로 벌한 것이 니, 구태여 우리가 더 이상 따질 필요가 없다고 하게 되었고, 문중회의는 자동적으로 해산하 게 되었다. 그때에, 천주교신자들이 이벽 성조를 뵈오러 집을 찾아와도, 면회는 불가능하였으니, 아버지 이부만공의 엄명으로 인하여, 종들과 졸병들을 시켜서, 이벽 성주께서 천주학을 하다가 천벌 을 받아 염병에 걸려 누웠으니, 만나볼 수 없으며, 일체 아무도 만나서는 안되다고 이르면 서, 출입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김범우의 동생 현우, 적우, 관우, 성우, 최인길, 최창현, 김종 교, 이존창, 권상문, 등 당시 열렬한 제자들이, 염병에 함께 걸려도 괜찮으니, 만나게 해달라 고 애걸하였으나, 이부만공은 더욱 격렬하게 종들을 시켜서, 아들 이벽 성조께서는 천주학을 안 하기로 다짐하였으니, 도무지 천주학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네 집 문전에 발도 들여놓을 수 없다고 강경하게 거절하며 야단을 쳤다. 사실상 약 3개월간에 걸친 문중회의와, 시내 양 반들의 모임과 관청에서의 전갈, 등으로 인하여 격할대로 격하여져서, 목을 매달기까지 했던 그러한 처지에서, 무슨 말인들 못할 수 있으랴.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일부 낭설 중에는 이 벽 성조께서는 급살병에 걸려서 세상을 떠났다는 둥, 그 아버지 이부만공이 대들보에 목을 매달아 죽었다는 둥, 사실이 아닌 이야기들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이 때에 이벽 성조께서는, 아프고 답답한 마음을 이루 표현할 수가 없었고, 신도들을 만나보 기 위해서, 또 문중들을 만나서 천학도리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집을 나가고 싶었으나, 부 모님들의 강경하고 격렬한 금지와 반대에 부딪쳐 번번히 나갈 수가 없었다. 만일 천학을 하 러 또 나가려거든, 아버지와 어머니가 목매달아죽는 꼴을 먼저 보고서 나가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무든 것이 다되어, 때가 이르렀음을 아시고, 목욕하고 깨끗한 의복을 갈아입은 다 음, 의관을 바르게 한 후, 당신 방에 들어가서, 좌정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의관을 바꾸지 아 니하며, 잠을 자지 않고, 기도와 묵상만으로 전념하셨다. 당시 한국예의상, 부모가 격노한 경 우, 자녀들은 며칠씩 식사를 안하거나 못하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었다. 천주밀험기 3권이 이때 저술되었다는 설이 있고, 혹은 3개월간이나 문중회의와 겨루면서, 집안에 감금당하여 있는 동안에 집필 되었다는 설도 있다. 하여간, 마지막에 가서 스스로 식음을 전폐하고, 고 요히 기도에 열중하면서, 천주를 생각하고 명상하다가, 15일이 지나자, 그만 완전탈진하여, 그 자리에서 운명하시니, 1785년 음력 6월 14일 밤 12시었다. 이렇게 한국 땅에서 천주교가 최초로 겪는 첫 박해 중에, 최초의 제물은 거룩히 천주께 바 쳐졌으니, 나이는 만 31세 였다. 학문적 지식인 천학을 종교적 신앙인 천주교로 승화시키고, 한국천주교회를 세우신 이벽 성조에 관하여는, 1801년 황사영이 그의 백서에서, 1818년 다산 정약용이 그의 묘지명과 각종 경서주해서, 그리고 1840년 김대건 신학생이 그의 한국천주교 회사 개요에서, 그리고, 1847년 정학술이 이벽전에서, 끝으로 1872년 샤를르 달레가 그의 한 국천주교회 역사서에서, 항상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자로 밝히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이벽 성조의 무덤은, 그 후 학계와 교계에 전해지지 않았고, 문중에서도 밝히지 않 아서,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으나, 1979년에 실로 기적적으로 사후 195년만에, 경기도 포천 군 내촌면 화현리 공동묘지 한복판에서, 파묘직전에, 변기영 신부에 의하여 찾아져서 지석과 함께 확인되어 한국 천주교발상지 천진암 옛 강학회터에 이장하였고, 이벽 성조의 묘가 찾 아져서 이장된 수, 200년 전 강학회를 함께 하던 주역들인,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정약종, 등이 이장되어 함께 나란히 자리잡았다.

끝으로 정약용 요한의 이벽 성조 만사를 듣자.

신선나라 학이 인간들 사이에 내려오시니,
헌연히도 신선의 풍채를 보이셨네.

깃과 날개는 희기가 눈 같으니,
닭들과 집오리들이 시새워 골내며 샘내네.

울음소리는 우렁차서 아홉하늘 진동시키고,
내는 소리 밝고 맑아 풍진에 뛰어났네.

가을이 되어 돌아갈 때를 맞아 홀연히 날아가버리니,
하염없이 슬퍼하며 애달파한들 무슨 소용있으랴.

 

 

 

신성자(socho) (2005/10/08) :

사랑의 신비여/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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