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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코프스키의 생애와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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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희 [edohyy] 쪽지 캡슐

2020-03-13 ㅣ No.219830

<차이코프스키의 생애와 음악>

  

차이코프스키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하였고 음에 대하여서도 아주 민감하였다. 그러나 음악을 좋아할 뿐이지 처음부터 음악가가 되려고 공부한 것은 아니다. 1848년, 그의 집이 페테르스부르크로 이사를 하자, 거기서 체계 있는 음악 공부를 하였다.1852년에는 부친의 뜻대로 법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법무성에 취직했으나 관리 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여 1863년에 그곳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나서 페테르스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하였다. 1866년 26세 때에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취임하여 12년 동안 교직 생활을 하면서 작곡 활동을 계속하였다.

 

1877년, 그의 제자였던 안토니나와의 결혼에 실패하여 이혼하였다. 그 뒤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학교 생활과 작곡 활동에 많은 지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예술을 사랑하고 있던 폰 메크라는 여인이 매년 연구비와 생활비를 보내 주었다. 또 얼마 후에는 러시아 황제가 연금을 주었다. 그러자 그는 교직을 그만두고, 스위스 ·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미국까지 건너가 작곡과 지휘를 하였다.

 

영국에서의 음악 활동을 끝으로 마침내 귀국하여, 1893년 제 6번 교향곡 <비창>을 발표했다. 그런데 바로 이 해 11월에 점심 때 마신 냉수 때문에 콜레라에 걸려 53세로 세상을 떠났다.그는 음악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교향곡 제 4번, 제 5번, 제 6번<비창>과 극음악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등이 있다. 그 가운데 <백조의 호수>는 감미로운 음악과 환상적인 내용 때문에 세계적으로 가장 공연 횟수가 많은 발레에 속한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서구 낭만주의와 글린카 이래의 러시아 국민주의와의 절충주의적인 음악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거기에는 역시 슬라브적인 민족 색채가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어 본질적으로는 국민주의 작곡가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차이코프스키를 같은 시대의 5인조 국민주의 작곡가들과는 다르게 분류한다.그것은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민족적 색채를 담고 있는 음악의 형식이라든가 기법적인 틀이 서구의 전통적인 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유년시절(1840~1865);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5월 7일 우랄산맥에 위치한 비야트카 지구의 광산촌인 캄스코 보트킨스크(Kamsko Votkinsk)에서 광산촌 총감독이었던 아버지와 피아노를 칠 정도로 교양이 있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평범하게 태어났다. 이렇듯 음악적인 가정과는 다소 거리가 먼 듯한 환경에서 자란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적 재능을 키워준 사람은 가정교사 파니 뒤르바흐(Fanny Durbach)였다. 4세부터 8세까지그의유년시절의 성장을 도와준 그녀는 문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으며 매우 교양이 있는 프랑스 여인으로 그에게 프랑스어와 독일어는 물론피아노의 기초를가르쳐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와의 친밀함은 매우깊어 그녀와의 이별은 어린 차이코프스키에게 슬픈 기억으로 자리잡게 된다. 당시 그는 가족들과 함께 Orchestrion(오른간과 피아노를 배합한 악기로 1791년 처음제작) 이라 불리는 Barrel Organ 으로 모차르트의 '돈 조반지'나 벨리니, 로시니 등의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 쇼팽의 '마주르카'등을 연주하며 음악적 경험을 쌓아나가게 된다.

  

글쓴이~이도희(아오스딩) 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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