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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黃眞伊)의 사랑과 風流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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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희 [edohyy] 쪽지 캡슐

2020-04-12 ㅣ No.220045

 <황진이(黃眞伊)의 사랑과 風流 詩>

 

황진이의 靑山 愛歌;

 

“靑山은 내 뜻이요 綠水는 님의 정이

綠水 흘러간들 靑産이야 변할손가

綠水도 靑山을 못 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황진이(1506~1567/61세삶)의 詩流;

본명은 진, 기명은 명월. 황진사의 서녀로 태어나, 절세의 미모와 뛰어난 재질로 시문에 능하여, 많은 한시와 구슬 같은 시조를 남기었다. 또 노래와 서화에도 능하여 많은 문인.석학들을 매혹시킨 개성명기. 지족선사를 파계시키고, 한 수의 시조로 벽계수를 사로잡은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렇듯이 자유분망하면서도 다정다감한 그녀였다. 서화담, 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삼절'로 불린다.    

청산은 내 뜻이오(황진이)의 작품 연구실,

기녀(妓女) 시조의 문학사적 의미,

기녀(妓女) 시조는 자신들의 애정과 이별 문제를 노래한다는 점에서 동시대의 시조 담당층인 사대부의 시조와 비교된다. 사대부들의 시조가 흔히 관념의 표출에 그치는 데 반해,

 

기녀(妓女)들의 시조는 인간의 정서를 숨김없이 표출하였다. 또한 그들의 시조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살려 시적 언어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도 그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기녀 시조는 세련된 표현 기교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순수 국어를 잘 구사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으며, 내용 면에서는 남녀 간의 애정 및 인간의 정서를 솔직 담대하게 표현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기녀들이 시조를 짓고 향유했던 문화는 시조 작가층의 확대와 더불어 시조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상류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시조를 조선 중기에 이르러 기녀들도 짓고 읊었다는 점은 후기의 가객 및 평민층으로까지 시조 작가층이 확대될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한 것이며,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기녀 시조는 시조 문학 변모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黃眞伊의 風流 時調의 특징;

황진이의 시조 중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모두 6수로 대부분이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을 다루고 있다. 그녀의 시조는 여성 특유의 섬세한 정서를 진솔하게 드러내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시적 언어로 잘 형상화하였다.

 

특히 현세적 삶에 대한 애착과 쾌락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작가의 시 의식은 당대 규범의 틀에 갇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한 사대부의 그것과는 달리 자유롭고 거침없는 감정의 발산으로 이어져 기녀 시조를 대표하게 된다.

  

양곡 소세양(陽谷 蘇世讓;1486~1562),그가 누군가.

아래 이 詩는 박연폭포, 서경덕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일컫는 황진이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 "蘇世讓"에게 그녀의 수행비서 동선이를 시켜 보냈던 漢詩다. 황진이와 한달만 살면 미련없이 이승을 떠나겠노라고 큰소릴 쳤던 소세양(蘇世讓)이 떠날때쯤 황진이가 쓴 이 詩를 전해받고, 황진이(黃眞伊)곁에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황진이(黃眞伊)가 사랑한  소세양(蘇世讓)을 그리워하며 쓴 漢詩. 

 

<송별 소양곡(送別蘇陽谷)>

蕭寥月夜思何事 소요월야사하사(달 밝은 밤이면 그대는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寢宵轉輾夢似樣 침소전전몽사양(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을 꾸시나요) 

問君有時錄忘言 문군유시녹망언(붓을 들면 때로는 내 이름도 쓰시나요)

此世緣分果信良 차세연분과신량(저를 만나 기쁘셨나요) 

悠悠憶君疑未盡 유유억군의미(그대 생각하다보면 모든게 궁금해요)

日日念我幾許量 일일염아기허량(하루에 제 생각 얼마나 하시나요)

忙中要顧煩或喜 망중요고번혹희(바쁠 때 얘기해도 제 말이 재미있나요)

喧喧如雀情如常 훤훤여작정여상(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정겨운가요?)

황진이의 애절한 이 노래를 들은 소세양(蘇世讓)의 마음은 어떻했을까요?

 

조선중기의 文臣이자 풍류시인이었다. 나이 일곱에 詩를 지었고 열여덟에 진사, 스물셋에 문과에 급제했다. 전라도 관찰사, 충청도 관찰사에 이어 형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까지 올랐을 정도로로 관운에 대통한이다.   

 

그는 부모를 봉양하기위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익산에 은거하여 풍류를 즐기다 77세에 세상을 떠났다. 黃眞伊와 30일 동거도 빼놓을수 없는 그의 인생 경력이다. 蘇世讓과 黃眞伊와의 애절한 사랑의 편지는 가수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소세양(蘇世讓·1486년~1562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풍류시인으로 전라도 익산에서 태어났다. 7살에 詩를 지었고 18세에 진사에 합격했고 23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전라도 관찰사와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형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쳤고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에 올랐다. 

 

소세양(蘇世讓)은 의정부 우찬성으로 재직 중에 척신 윤임 일파의 탄핵으로 파직됐고, 윤임 일파가 제거되자 다시 의정부 좌찬성에 복귀했다.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 익산에 은거하며 풍류를 즐기다가 77세에 별세했다. 문장에 능하여 ‘양곡집’을 남겼고 익산 용화산 기슭에 정2품 이상에게 세우는 ‘소세양 신도비’가 남아 있다.

 

황진이(黃眞伊·1506년~1567년)는 조선 최고의 기녀(妓女)이자 시인(詩人)으로 개성에서 몰락한 양반가문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 어려서 기생이 되었고 서화(書畵)에 능했고 가야금에도 뛰어났다. 황진이는 서경덕·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 3절’로도 불렸다. 또한 황진이는 이매창·김부용과 더불어 조선 3대 기녀라고 했다. 

 

황진이는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동문 밖 개울가에 시체를 두어 여인들로 하여금 경계로 하여 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황진이가 남긴 수많은 시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대부분 소실되어 일부만 전해진다.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소세양(蘇世讓)과 최고의 기녀 황진이의 사랑은 조선 최고의 로맨스로 전해지고 있다. 소세양은 황진이의 소문을 듣고 ‘여색에 혹함은 남자가 아니다.

 

듣건대 개성에 절색 진이가 있다 하나, 나 같으면 30일을 같이 살면 능히 헤어질 수 있으며, 추호도 미련을 갖지 않겠다’고 장담했다.蘇世讓은 黃眞伊를 찾아 개성으로 가서 30일 동안 뜨거운 계약동거를 시작했다. 황진이는 30일을 함께했던 소세양이 떠나려 하자 남루에 올라가 ‘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明朝相別後 情與碧波長)’라고 시조를 읊었다.

 

소세양(蘇世讓)은 탄식하며 ‘다시 머무르니 내가 그 사람이 아니다(吾其非人哉 爲之更留)’라고 말하고 황진이 곁을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蘇世讓과 黃眞伊의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의 편지는 가수 이선희의 노래 ‘알고 싶어요’로 재탄생하여 500년을 전해지고 있다.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오늘도 소세양과 황진이의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그 후 황진이는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던 소세양(蘇世讓)과 10년 면벽의 지족선사를 정욕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한 뒤 화담 서경덕을 마지막 목표로 삼고 그를 유혹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서경덕(徐敬德)을 치마폭에 가두지 못했다. 하지만 경덕에게서 인간의 참된 삶과 사랑을 배웠다. 黃眞伊는 서경덕(徐敬德)과 영원한 스승과 제자 사이로 거듭나며 서경덕에 뒤지지 않을 여류학자로 거듭나게 된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과 황진이,

 

수년을 찾아 해맨  끝에 재회한 선비(花潭 徐敬德)가 홀연히 떠나버린것을 알고 기생은 망연자실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선비의 고고한 심정을 깨달은 황진이 빕니다.

선비의 사랑은 소유해도 선비의 몸은 소유할수 없다는 것을 깨우친 것입니다. 황진이는 선비의 깊고 높은 큰 사랑을 받았다는 것으로 위로하며 평생을 선비를 그리워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선비 徐敬德의 그리움의 時調 한수;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님 오리오 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귄가 하노라.”

 

白湖 林悌의 황진이 추모가(追慕歌),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는 선조때 나주 인물로 시인이요 소설가로써 이조정랑,북평사,예조정랑을 지냈다. 명월 황진이(명종때 송도기생)를 극진히 사랑 하였다는 후세의 이야기가 전해 온다.

 

그가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받고 부임행차를 하던중 송도(개성)의 송학산 기슭에 뭍혀있는 황진이 무덤을 찾아가 2박3일 간의 추모를 하는데 명월의 무덤앞에 제수를 갖추어 술상을 차려 놓고 애도를 하였다.

    

白湖의 황진이 추모가(追慕歌);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었는다.

홍안(紅顔)은 어디두고 백골만 뭍혔는가.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 하노라.”

 

추모를 마치고 평양에 도착하니 백호의 돌출행동 소식에 화가난

선조께서 그를 봉고파직 하고 이미 다른 사람이 도착하여 부임 하였다.

    

  

글옮긴이~李도희(아오스딩) 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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