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智)와 용(勇)을 겸비한 덕장(德將) 스키피오(Scipio) 1, 2, 3 합편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大王(Alexndros the Great, BC 356-323)은 페르시아와
시리아, 페니키아, 이집트를 정복(征服)한 다음 이란 고원을 거쳐 그 당시(當時)만
해도 다른 세상(世上)이라고 할 수 있는 인도(印度)의 인더스 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군사(軍士) 중에 열병(熱病)이 퍼지고 장마가 계속(繼續)되었으므로 BC 324
년에 군대(軍隊)를 돌려 페르세폴리스를 거쳐 바빌론에 돌아와 아라비아 원정(遠征)
을 준비(準備)하던 중 이듬 해(BC 323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었습니다.
알렉산더 大王은 학문(學文)에도 관심(觀心)이 많아서 당시의 대학자(大學者)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마케도니아의 수도(首都)인 펠라의 궁정(宮庭)에 초빙(招聘)하여
3년 동안 그에게서 윤리학(倫理學), 철학(哲學), 문학(文學), 정치학(政治學), 자연과
학(自然科學), 의학(醫學) 등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또 메네쿰스라는 사람을 스승
으로 모시고 기하학(幾何學)을 배우기도 하였는데, 정치(政治)에 온 힘을 기울이면
서 잠시 짬을 내어 기하학(幾何學)을 배우는지라 공부하기도 힘들고 이해(理解)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더 大王은 "내가 이래뵈도 大王인데 이 권위(權威)로
좀 더 쉽게 그리고 빨리 배우는 방법(方法)은 없을까?"라고 스승인 메네쿰스에게
물었습니다. 메네쿰스는 지체(遲滯)없이 이렇게 대답(對答)했습니다. "대왕님 ! 대왕
님의 나라에는 대왕님의 전용도로(專用道路)나 사유도로(私有道路)가 있어 누구보
다도 빨리 목적지(目的地)에 도착(到着)할 수 있으나 기하학(幾何學)을 배우는 길은
모든 사람에게 오직 하나 뿐입니다." 이 일화(逸話)에서 "학문(學文)에는 왕도(王道,
지름 길)가 없다."라는 격언(格言)이 생겼다 합니다. 학문을 사랑한 알렉산더 大王은
평소(平素)에 호메로스의 시(詩)를 애독(愛讀)하며 원정 때도 많은 책을지니고 다녔
으며, 학자(學者)와 기술자(技術者)들을 대동(帶同)하여 각지의 탐험(探險)과 측량
(測量) 등을 시켰습니다. 그는 자기가 정복(征服)한 땅에는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
지은 도시(都市)를 70여개나 건설(建設)하여 이 도시들이 헬레니즘 문화(文化)의
거점(據點)이 되는 동시(同時)에 동서문화(東西文化)의 교류(交流)와 융합(融合)에
지대(至大)한 공헌(貢獻)을 하게 된 것입니다. 위대(偉大)한 정복자(征服者)로 세계
사(世界史)에서 영웅(英雄)의 한 사람으로 불리워지는 알렉산더 大王은 백성(百姓)
들에게 경애(敬愛)와 신망(信望)의 대상(對象)이자 용(勇)을 겸비한
지장(智將)이었습니다.
* * * *
카르타고의 명장(名將) 한니발(Hannibal, BC 247-183)은 BC221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에스파냐(오늘날의 스페인) 주둔군(駐屯軍)의 총지휘관(總指揮官)이 되었습
니다. 알렉산더 大王의 사후(死後) 헬레니즘 세계(世界)가 분열(分裂)되어 있던
그 시기(時期), 카르타고와 로마는 지중해(地中海)의 패권(覇權)을 놓고 치열(熾烈)
하게 싸웠습니다. 카르타고는 BC 8세기 페니키아 人이 北 아프리카 튀니스 만(灣)에
건설(建設)한 도시국가(都市國家)인데, 로마 人들은 카르타고를 ''페니키아''라는
의미의 라틴語로 ''포에니''라고 불렀습니다. 카르타고와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마침내 시칠리아 섬에서 격돌(激突)했습니다. 제 1차 포에니 전쟁( BC 264-
241)이 일어난 것입니다. 카르타고에 비해 해군력(海軍力)이 약했으나 로마는 함대
(艦隊)에 신형장비(新型裝備)를 장착(裝着)하여 새로운 전술(戰術)을 선보임으로써
카르타고를 제압(制壓)하고 승리(勝利)를 거듭했습니다. 이 전쟁(戰爭)은 시칠리아
인근(隣近) 바다에서 23년간 계속(繼續)되었지만 결국(結局) 카르타고는 로마에 패
(敗)해 거액(巨額)의 배상금(賠償金)을 지불(支拂)하고 시칠리아에서 완전(完全)히
떠나는 조건(條件)으로 강화(講和)를 맺었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6살의 어린아이
였던 한니발은 9살 되던 해에 아버지 하밀카르 장군(將軍)을 따라 에스파냐로
들어가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로마에 대한 적개심(敵愾心)을 불태웠습니
다. 아버지가 죽고 에스파냐의 총사령관(總司令官)이 되자 20대의 젊은이였지만
한니발에게는 로마를 멸망(滅亡)시키겠다는 크나큰 야망(野望)이 있었습니다.
그는 에스파냐의 지배(支配)를 우선(優先) 공고(鞏固)히 해 놓고 여러 부족(部族)을
평정(平靜)한 뒤, BC 219년 드디어 로마를 향해 출병(出兵)합니다. 제 2차 포에니
전쟁(한니발 전쟁)의 시작(始作)이었습니다. 한니발은 해로(海路)를 택하지 않고
육로(陸路)를 택했습니다. 그는 피레네 산맥(山脈)을 넘어 갈리아(오늘날의 프랑스)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한니발 군대(軍隊)의 병력(兵力)은 보병(步兵)5만 명, 기병
(騎兵) 9천 명에 코끼리 37마리 였다고 전해집니다. 이 중 기병(騎兵) 9천 명은 세계
전사상(世界戰史上) 몽골 족(族)과 더불어 기마술(騎馬術)이 능(能)하고 가장 용맹
무쌍(勇猛無雙)하다는 아프리카 북부(北部) 누미디아의 잘 훈련(訓練)된 기병(騎兵)
이었습니다. 그들과 갈리아 지방(地方)의 겔트 족(族)들은 한니발의 용맹성(勇猛性)
과 카리스마에 압도(壓倒)되어 기꺼이 용병(傭兵)이 되고 귀중(貴重)한 정보(情報)
를 제공(提供)했습니다. 로마가 한니발의 진의(眞意)를 파악(把握)하지 못하고
시칠리아, 아프리카, 에스파냐로 군대(軍隊)를 보내 우왕좌왕(右往左往)하는 사이
한니발의 군대는 론 江을 건너 알프스로 향했니다. 코끼리 부대를 포함(包含)한
대군(大軍)을 이끌고 눈 덮인 알프스 산맥(山脈)을 넘기로 작정(作定)한 것입니다.
추위와 눈사태와 싸우고, 곳곳의 고지(高地)에서 돌을 굴리며 공격(攻擊)하는
소규모(小規模) 갈리아 부족(部族)들과 싸우며 한니발은 보름만에 알프스를 넘었습
니다. 일찍이 어느 장군(將軍)도 생각지 못하고, 해내지 못한 눈 덮인 알프스를 넘는
일을 해낸 한니발은 어느 누구보다도 용맹(勇猛)스러운 용장(勇將)이었습니다.
* * * *
로마의 장군(將軍) 스키피오(Scipio, BC 235-183)는 카르타고의 명장(名將) 한니발
보다 12살 연하(年下)로 한니발이 BC 219년에 로마를 향해 출병(出兵, 제 2차 포에
니 전쟁)하여 알프스를 넘어와 BC 217년 트라시메누스 호반(湖畔)의 전투를 비롯하
여 각지(各地)에서 로마軍을 격파(擊破)하고, 특히 BC 216년에 칸나에 전투(戰鬪)
에서 기병(騎兵)을 이용(利用)한 용병술(用兵術)을 발휘(發揮)하여 로마 軍에 대승
(大勝)을 거두었을 때, 19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출전(出戰)했던 스키피오 자신
(自信)도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逃亡)을 하였습니다. 이렇듯 소년시절(少年時節)
부터 한니발과의 전투경험(戰鬪經驗)을 통하여 스키피오는 전투(戰鬪)에서 기병
(騎兵)의 중요성(重要性)을 깨닫고 앞으로의 수 많은 실전(實戰)에서 응용(應用)
하게 됩니다. BC 211년 24세의 스키피오는 자격요건(資格要件)이 16세나 모자랐지
만 착한 천성(天性)과 냉철(冷徹)한 지혜(智慧), 전투(戰鬪)에서의 용맹성(勇猛性)을
사람들로부터 인정(認定) 받아 공화정(共和政)의 집정관(執政官)에 선출(選出)되었
고, 그 이듬해 아버지가 전사(戰死)한 에스파냐 전선(戰線)에 파견(派遣)되어 이 때
부터 그의 빛나는 전력(戰歷)이 시작(始作)되었습니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의 이름
높은 네 명의 장수(將帥) 하스드루발, 마고, 하스드루발 기스코, 한노를 연달아 격파
(擊破)하여 에스파냐에서 카르타고 세력(勢力)을 축출(逐出)하고 로마 세력권에
편입(編入) 시켰습니다. 스키피오는 4년만에 에스파냐를 평정(平靜)하고 한니발이
이태리 반도(半島)에서 결정적(決定的)인 승리(勝利)를 거두지 못하고 시간을 끌고
있는 사이, 로마 원로원(元老院)의 승인(承認)을 얻어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로마
의 뒷통수를 쳤듯이 카르타고 본국(本國)에 침입(侵入)합니다. 다급해진 카르타고
본국의 요청(要請)을 받은 한니발은 헤라 신전(神殿)에 자신의 업적(業績)을 새기고
피눈물을 흘리며 회군(回軍)합니다. 이렇게 만나게된 두 명장(名將)이 벌인 전투
(戰鬪)가 세계전사상(世界前史上) 그 유명(有名)한 "자마 회전(會戰)''입니다.
한니발은 16년 로마 원정(遠征)탓으로 기병(騎兵)이 많이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반면(反面)에 스키피오는 좋은 인간성(人間性) 때문에 누미디아의 왕자인 마니시사
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에스파냐에서 포로(捕虜)로 잡았던 마니시사를 살려서 풀어
준 적이 있기 때문에 마니시사가 누미디아 기병(騎兵)을 보내 준 것입니다.
한니발도 물론 누미디아의 또 다른 왕자 사팍스에게 기병(騎兵) 2천 騎를 요청하고
약속(約束)을 받았지만 끝내 사팍스의 기병은 오지 않았습니다. 스키피오의 인간미
(人間美)와 덕(德)에 매료(魅了)된 누미디아 기병(騎兵)과 로마 시민군(市民軍)의
감투(敢鬪)에 한니발이 카리스마로 이끄는 용병(傭兵)들은 점차(漸次) 밀리기 시작
했습니다. 희대(稀代)의 명장(名將) 한니발은 결국(結局), 패(敗)하여 도망(逃亡)
치고 말았습니다. 제 2차 포에니 전쟁(한니발 전쟁)이 끝난 것입니다. 로마에서는
스키피오에게 ''아프리카를 제압한 자''라는 뜻의 아프리카누스(Africanus)라는
영예(榮譽)로운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한니발이 용(勇)을 겸비(兼備)한 지장
(智將) 알렉산더에게 용맹성(勇猛性)을 배우고 물려받은 용장(勇將)이라면,
스키피오는 알렉산더의 지혜(智慧)와 용맹성(勇猛性)에 덕(德)을 보탠,
지(智)와 용(勇)을 겸비한 덕장(德將)이었습니다.
( 다큐멘타리 필름과 네이버 백과사전, 오픈사전을 참조, 발췌하여 작성했습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