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10월 왜군이 진주성으로 처 들러왔습니다. 인근에서 싸우던 병사(兵使) 유숭인이 전투에 패해 혼자 말을 타고 성으로 들어 오려했습니다. 진주 목사 김시민은 상급자인 유숭인을 돌려 세웠습니다. [전투를 앞 두고 주장(主將)을 바꾸면 지휘 체제가 무너진다]는 이유였습니다. 말을 돌린 유숭인은 결국 전사 했답니다. 그러나 의병장 곽재우는 [이로써 진주성을 보전 할수 있었으니 진주 사람들의 복이다]라고 했답니다. 왜군은 곡청 호남으로 가는 길목 진주성을 무너뜨리려 3만 대군을 보냈습니다. 김시민은 병력이 3800명 뿐이었지만 왜군 조총을 본떠 총통 170자루를 만들고 화약 150근을 구웠습니다. 넉넉히 대비한 덕에 화약을 짚에 싸 성밖으로 내 던져 댔습니다. 1주일 공방 끝에 적은 물러났습니다. 학봉 김성일은 [늙고 약한 남녀들도 돌을 굴리고 불을 던져 성안에 기와나 돌, 지붕 이엉이 다 없어졌다]며 진주 백성의 기개에 찬탄했습니다. 노량 행주와 함께 임란 3대첩에 드는 진주성 대첩 입니다. |
김시민은 전투 마지막 날 적병 총탄에 숨졌습니다.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 패전을 두고두고 수치로 여겼다고 합니다. [다시 진주를 공격해 전날의 분함을 씻으라] 이듬해 왜군이 10만 군사를 몰아 진주성을 포위하자 늙은 기생이 김시민 없음을 탄식 했다고 합니다. [전에는 장졸이 서로 사랑하고 호령이 한결같아 이겼으나 지금은 병졸이 장군과 익숙지 못하다.] 며칠만에 성이 함락됐습니다. 왜군은 민관 7만명을 살육 했습니다. 선조는 1604년 김시민을 선무(宣武) 2등 공신에 올리고 노비와 밭을 하사하는 교서를 내렸습니다. 이 교서가 일제때 일본인 학자에게 넘어갔다가 작년 말 도쿄 경매시장에서 고서적상에게 1200만엔에 낙찰되면서 모처럼 소재를 드러냈습니다. 진주성의 상징 김시민 공신교서를 그대로 둘 진주사람들이 아닙니다. 시민 단체들이 모금 운동을 벌이고 민속예술단체 들도 모금 공연에 나서 교서를 되 사오기로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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