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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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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대축일 2006년 6월 11일 마태 28, 16-20.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 신앙 역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를 요약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 분인데 한 분이라는 모순된 말을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이 비밀리에 알려 주신 신비스런 단어도 아닙니다. 하느님이 계시고, 그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준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떠나신 다음 우리 안에 일하시는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이 계시다는 사실을 요약한 단어입니다. 이 세 분으로 발생한 말은 모두 하느님에 대한 말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성서에는 없습니다. 3세기부터 신학자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으로 세상을 떠나신 다음, 그분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제자들이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하신 말씀과 실천을 회상하면서, 그분은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서 병을 고쳐 주시던 그분의 마음, 사람들을 돌보아주시던 그분의 몸짓,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던 그분의 관대함이 모두 하느님의 것이라는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철저하게 살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신 분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배워서 하느님의 생명을 올바로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이 새로운 깨달음과 실천이 모두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그들 안에 하시는 일이라 믿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대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의 숨결인 영이 내려 오셨다”는 창세기(1,2)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도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탄생도 성령이 하신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천사의 입을 빌려 “그 수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1,20)이라고 말합니다. 루가복음서는 가브리엘 천사의 입을 빌려 마리아에게 “성령이 내려오셨다”(1,35)고 말합니다. 초기교회 신앙인들은 이렇게 예수님이 인류역사 안에 나타나신 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으로 세상이 창조되었고,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으로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예언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같은 성령으로 예수님이 태어나셨고, 같은 성령이 우리 안에 예수님을 따르는 새로운 삶을 발생시킵니다. 이것이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초기 교회의 관행은 이런 믿음을 배경으로 나타났습니다. 신앙인이 예수님을 배워서 같은 실천을 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것도 바로 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믿는 초기 신앙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자기 안에 살아계시게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돌보아주는 몸짓, 용서하는 관대함 등, 예수님의 마음과 실천을 배우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자기만을 소중히 생각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던 인간의 관행을 벗어나,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 주며 용서하는, 한 마디로 말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넓은 세계에 열린 마음으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삶을 인류 역사 안에 가장 모범적으로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라 부릅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신 그분의 삶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데에 귀감이라는 뜻입니다. 그 아들 됨의 실천은 인간 욕망의 산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숨결이 그분 안에 살아계셔서 된 일이었습니다. 인간인 우리는 모두 우리의 욕심을 충족시켜 행복하기 위해 삽니다. 우리는 흔히 이 세상에서도 잘살고, 죽어서도 잘살기 위한 대책이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이 좁은 자기중심적 공간 안에서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우물 안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좁디좁은 하늘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주며, 용서하는 넓디넓으신 하느님의 마음을 배워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길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의 마음을 세상에서 실천하셨습니다. 그 실천은 하느님의 숨결이 그분 안에 계셔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도 성령이 그 안에 오시면 같은 실천을 합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바로 이 사실을 요약합니다. 3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서 예수님의 삶은 하느님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훌륭한 분이지만, 인간이기에 그분이 하신 일은 하느님과 다르다는 주장입니다. 그 시대 신학자들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였습니다. 그들이 이 단어로써 말하고자 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삶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체’라는 말은 예수님을 보면서 하느님에 대해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 성령은 하느님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은 실제 하느님의 숨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도 교회는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우리 안에 일하시는 성령은 하느님의 숨결이라는 뜻입니다. 창조에도, 구약의 예언자들 안에도, 예수님 안에도, 하느님의 숨결은 일하셨고,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숨결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말하는 삼위일체라는 단어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느님의 신비를 다 알아듣고 발생한 단어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실제 하느님이 우리 안에 일하신다는 사실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하느님이 세 분인데 신비롭게 하나라는 모순된 말을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삶입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신데, 우리는 그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알아듣고, 배워서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삽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변화시켜 참으로 당신의 자녀 되게 하시는데, 그것은 그분의 숨결인 성령이 우리 안에 하시는 일입니다. 세 분의 이름이 있는 것은 예수님 안에 우리는 하느님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고 배우며, 성령이 우리를 변화시켜 우리 안에 실제 하느님의 삶이 나타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세 분의 이름이지만, 하나같이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말하는 이름들입니다. ‘삼위일체’는 한 시대가 필요로 하였던 단어입니다. 오늘 우리를 위해서는 예수님도 성령도 모두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여정을 밝히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단어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 번호 | 제목 | 등록일 | 작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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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652 | 영성체 후 묵상|2| | 2006-06-10 | 노병규 |
| 100651 |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 사제|1| | 2006-06-10 | 김건호 |
| 100650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2006-06-10 | 강점수 |
| 100649 | 동과 서의 만남|3| | 2006-06-10 | 최익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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