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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와 복사 이의창 레오 순교자, 그 외증손 남상철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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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와 복사 이의창 레오 순교자 2. 1. 김대건 소년이 1827년경에 조부모를 따라 솔뫼를 떠나온 이후,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1836년 마카오로 유학 갈 때까지 산 곳은 양지현의 골배마실이 아니라 용인현의 한덕골이었다.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도 기해박해로 잡혀서 순교할 때까지 한덕골에서 살며, 굴암 공소의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2. 김제준 성인의 순교 이후, 한덕골을 떠나 떠돌이 신세가 된 어머니 우르술라와 어린 동생(김난식)을 김 부제는 박해시대의 사랑실천으로 만나볼 수 없었다. 신부가 되어 귀국한 다음에야 비로소, (양지 출신 복사 이의창의 배려로?) 정착한 상뜸이(=골배마실)로 어머니를 찾아 만나 뵙게 되었다. 이후 용인지역과 태화산 자락(은다라니, 터골, 단내 등)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준 것으로 증언록은 전하고 있다. 3. 이기양의 둘째 아들 이방억이 1822년에 양지에서 진사가 되었으므로, 그 부친과 함께 양지(모래실)에서 살았을 이의창 레오는, 1845년 김대건 부제의 입국 초기부터 매형 이재의와 함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상해로 가서 신품을 받고 돌아올 때까지도 밀착 동행하였다. 서해입국로 개척 시 김대건 신부가 체포될 때에 그는 하선하여 이후 기록 속에서 찾아볼 수 없었으나, 남아있는 자료를 분석한 결과, 133위 ‘하느님의 종’ 가운데 이병교로 개명한 레오 순교자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4. 이의창의 세례명 레오를 알아보지 못했던 결정적 이유는, 김대건 옥중편지의 Li rian (<=李 良)이란 글자를 페레올 고주교가 ‘Véran’으로 잘 못 읽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치명일기 354.에서도 ‘니 량 의셩’을 알아보지 못하고 李秉敎로 바꾸어 표기하였는데, 이는 ‘니 량 의셩’이 곧 ‘李 良 宜敞’ 임을 이해하지 못하였던 까닭이다. 중국 문헌에서 良이 의미하는 레오란 세례명을, 성경직해광익이나 성년광익 등에서 찾아 확인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5. 지금의 [기억 지킴이]와는 달리, 박해시대에 [서로 사랑하기]는 자녀들에게도 비밀을 유지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박해시기(이의창의 순교)와 일제 강점기(증손자 斗淳 부부의 히로시마 원폭 희생), 그리고 한국전쟁(증손자 升淳 가족 3명을 미군이 총살)을 거치고 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후손들조차 아무것도 모르는 망각의 상태가 되었다. 6. 이런 가운데서도 발품을 팔며, 듬성듬성 남아있는 片鱗들로 퍼즐을 맞추어 본 결과, 이의창이 곧 이병교로 개명한 순교자였다는 사실을 밝히게 되었다. 그동안 기억은 많이 사라졌으나 신앙의 대물림은 면면히 남아, 이의창 가문은 남종삼 성인의 자녀들을 거두는 일에도 큰 사랑을 보여주었다. 7. 남상철 방지거(1893-1978)는 남종삼 성인의 次子 남규희(1862-1892)와 광주 이씨 顯敎女(막달레나, 1860?-1893) 사이에, 안성군 미양면 갈전리(실제로는 마산리 岩洞 = 바울 공소)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1개월 만에 어머니 막달레나마저 사망하여, 그는 (황사영이 평창 이씨 외조부에게서 배웠듯이) 외가에서 한문과 신학문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어려서 들었던 사실을 토대로 천진암주어사를 탐사하여, 경향잡지(1962. 11.-1963.1.)에 게재하게 되었다. 첨부; 병인치명사적 6권 (1925.11.20.), 45-50쪽. (치명사적에 관하여 상교우서 32호 참조). p. 45. 이 량(=良)이는 본대 경기 포천 괴약이 사람이라. 어려서부터 성교사정은 알았으나, 신유(1801)년 풍파 후로 성교(에) 어두워 몇 귀절 경문을 봉행하더니, 로신부(=모방) 오신 처음에(=1836년) 그 매부 리 도마스(=李在誼, 1808-1868,족보/ 配慶(=廣)州李氏父宜城(=龐億) 甲午(1834)十월9일卒) 형제와 세 사람이 서울(에)서 로 신부를 뵈옵고 령세를 청한즉, 신부- 문답을 물으시는지라. 전에 문답을 듣지도 못한 사정을 말씀한 즉, 문답 한 권을 주시는지라. 받아 사랑으로 나와 세 사람이 함께 배화(워) 당일에 사본으로 / 46. 다 같이 달통하야, 이튿날 한가지로 령세. 견진하고, 기해(1839)년 군난을 당하야, 광주 땅에서 민극가와 한가지로 잡혔다가 도망한 후에, 안 주교(=다블뤼) 처음 오실 제 복사하고, 여러 신부의 복사하다가, 병인(1866)군난을 당하야 피하였더니, 경포(가) 내려와, 그 모친(=정희순 가타리나?)과 어린 아들(=13세 이원교 방지거?)을 타지로 잡아가는지라. 길에서 그 소문을 듣고 즉시 집으로 들어올 새, 찾던 칼과 如干(=어지간한) 물건을 함께 피하였던 자식(=큰아들 이현교?) 에게 주고서 벌(받고자/=自獻의 말?)하거늘, 아들이 슬퍼 말유(=挽留?)하니, 애련哀憐을 떨치지 못하야, (감옥에) 들어가지 못하고, 얼마 후에 처자를 모았으나, 가산이 남은 것 없어 간고艱苦의 괴로움이 추량(推量) 없으되, 甘受함과 수계범절守誡凡節은 평시에서나 (같이) 하며, 神師(=신부)를 만나 성사 받기를 원하더니, 前(=김대건?병오박해) 신부 뫼시고 갔던 사공 몇이 돌아와 닐으되, 신부- 조선사람 영접 오기와 소식 알기를 / 47. 날로 기다리고, 우리 올 때 분부하신 일이니 영접가자 하며, 량이 아니면 일독선(=1獨船?) 될 수 없으니 어데 어데로 가자하고, 벌써 서울 김 안또니오(金安堂)와 일을 시작한지라. 진실한 말로 믿고, 일을 힘대로 주선하고, 사공의 말대로 해변에 집(을) 예비하야, 汝我(=너와 나) 즉시 나서신다 하야, 집을 사고 이사하야 오마한 한 정을 날로 기다리며 기구하더니, 중간에 유다스 된 놈이 이 사정을 밝히 알고, 함께 일 의론한 사람을 찾아와 속여 말하되, 량이 신부 뫼시고 중도에서 부르니 바삐 가자 하거늘, 이 사람이 속임에 빠져 따라가, 그 놈들에게 형초荊楚도 당하고 재물도 (=비용)든지라. 이 사람이 말을 잘 못하야 량이도 그중에(=유다스?) 참례한 줄로 말이 전파하야, 명성이 무너지게 되었으니, 다만 말한 사람만 가보고 책망하고 심상한지라. 후에 그 사람들이 량이가 타당치 못한 / 48, 줄로 사면에 전파한 즉, 그 아들이(=이현교?) 듣고 그 사람들을 속이(=변명하)려 하니, 굳이 만류하야 닐으(=이르)되, 내가 입교한지 육십 여년에 많은 죄악이 있고 보속함이 없으니, 천주- 죄 보속으로 주신 바-니 감수하겠다 하며, 마음이 편안하고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더라. 정축(1877)년에 리주교(=리델 李福明)- 잡히실 때에, 룡인 공셕골(=공수동/현 용인축구장)의 최 신부 주인으로 있는지라. 신부는 전교 가서 아니 계시나, 물건을 맛하(=맡아) 있는고로 다만 처자(=아들 이현교/景彬의 처자?)만 피신하야 보내고 닐으되, 나는 먼저 군난도 억지로 피하야 살았으나, 지금 신부의 중대한 물건을 맡아 있다가, 경홀輕忽히 버릴 수 없다 하며 기다려 기구하더니, 서울 김 요안이 신부께 기별 오는 길에 들어가 강권함으로 피신하였더니, 정축(무인1878이라야)년에 다시 최 감(=舍監) 주인으로 공주 西林이으로 이사하야, 한 달이 못 되어 경포와 본읍 포교에게 신부와 / 49. 온 집안사람이 다 잡힌지라. 포교와 한 방에서 온 집(안)사람에게 닐으되, 너희 각각 자기 죄를 통회하라 하고, 신부께 사죄경 념하시기를 청하야, 사죄경을 받고 본읍(=공주)으로 들어가, 샹영문목과 영쟝문목에 종일 힐난하고, 이튿날 떠나 서울로 갈 새, 중도에서 강론하기를 그치지 아니한 즉, 어떤 사람은 듣고 욕설이 무수한지라. 그 아들(=현교)이 말씀 말고 가기를 청하니 갈오되, ‘내가 다른 날에는 생명을 아껴 못하였거니와 지금인즉 무서울 것 없고, 또 저희 듣고 아니 들음은 상관없고, 나는 다른 말하기보다 좋으니 생명 멎기 전은 하겠다(고) 하며, 아들(에게)으로 전하야 갈오되, 너는 도망하라 하고, 칠십 지년에 그저 죽더면 원통할 것을 主命으로 이렇게 가니 즐겁다. 그러나 너는 아직 靑春이요 북사(=服事?) 한 사정을 밝히 안즉, 네 일을 내가 / 50. 더러 담당하겠으나, 너와 내가 다르니 어렵고, 또(너)는 나가 처자를 돌아보라 하거늘, 대답하되, 잡혀 이 모양으로 가오니 어찌 도망하오리까? 오냐. 내가 너 나가기 위하야 염경기구念經祈求하니 너도 나가기를 위하야 기구하여라. 천주 허락하시면 못될 일이 없나니라.’ 하더니, 이튿날 새벽에 말과 같이 아들이 도망할 때에, 인도하여 내어 보내고 서울 좌변左邊으로 들어가 가치어, 두 달 동안에 별로 먹는 음식이 없어 뼈와 가죽만 남고, 몸에 옴 병으로 많은 苦楚를 겪고, (기묘1879) 륙월 이십일일(=21일)에 獄中致死하니라. (이 사적은 그 아들 지금 오산수더서 사는 리 요안(=이현교, 1844-1906)이 기록하니라.) 끝.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 번호 | 제목 | 등록일 | 작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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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0407 |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2| | 2020-06-23 | 박윤식 |
| 220406 |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 2020-06-23 | 주병순 |
| 220405 | 김대건 신부와 복사 이의창 레오 순교자, 그 외증손 남상철 회장|1| | 2020-06-23 | 김학렬 |
| 220404 | ★ 성모 승천 (故김용배 신부님)|1| | 2020-06-23 | 장병찬 |
| 220403 |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 2020-06-22 | 주병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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