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적 설교는 빠른 시일 내에 많은 청중을 모우는 비법은 되어도 성도의 내면에 질적 향상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영혼의 성장을 멈추게 하는 오류가 극심하므로 많은 세월만 낭비케 하는 결과만 낳게 될 것입니다.
이로서 장성해야할 충분한 시기를 다 놓치므로 하여 뭇 신앙인들이 소금과 빛 된 희생의 삶은 없고 도리어 세상에서 밟히는 소금이 되고 마는 것인데 오늘날 이러한 일이 현실로 빚어지고 있음이 이를 잘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매우 심각하게 지적을 하며 성도들이 장성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또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감성적인 가르침에 의한 감정적 은혜에 머물지 않고 이성적 의식으로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뚜렷이 할 때에 그리스도의 희생된 삶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적 신앙은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꺾이지 않습니다.
주위 환경은 늘 상 변해도 뚜렷이 새긴 이성적 신앙은 이러한 환경에 지배를 당하지 않습니다.
감정적 신앙은 변화무쌍한 환경과 같이 초지일관됨의 유지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성적 신앙은 이러함을 초월하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개신교는 이러한 이성적 신앙으로 돌아서지 않으면 더 이상 빛과 소금된 모습을 바라기는 요원(re.mote)하기만 할 것입니다.
마치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와 같은 예를 들 수가 있습니다.
거북이는 한 걸음 한 걸음 그야말로 거북이 걸음으로 꾸준히 앞만 향합니다.
그러나 거북이의 이 한 걸음 한 걸음은 결승점이 가까울 때는 그야말로 놀라운 능력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시종일관 단 한 번도 뒤 돌아보지 않았던 또한 게으름을 피우거나 쉬지 않았던 마라톤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한 걸음 한 걸음이 쌓이고 쌓이는 그 나중은 마치 핵 분열과 같은 놀라운 힘이 되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토끼의 한 걸음 한 걸음은 금방이라도 결승점에 닿을 것 같은 빠른 힘으로 나아가지만 결국 뒤돌아보며 게으른 잠에 빠지므로 말미암아 시작은 창대 한 것 같으나 나중은 심히 미약한 모습만 보이고 마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이가 망대를 세우고자 하였던 비유에 비추면 망대의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여 이 사람이 역사는 시작하였으나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는 비웃음만 쌓게 될 것입니다.(루가복음14:27-30)
한국의 개신교가 바로 지금 이러한 상황에 빠졌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북이와 같이 한 걸음 한 걸음을 충실히 걷는 이성적 의식 있는 신앙의 교육에 집착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토끼의 빠른 발만 생각하는 감성적 신앙으로 그저 사람만 많이 모우려는 맘몬사상을 깨끗이 버리지 못하는 것은 교회 안의 우상과 같은 것입니다.
감성적 신앙의 결과는 이러한 우상을 낳게 되므로 세상에 밟히는 소금과 같이 온갖 지탄의 대상만 되고 마는 것인데 오늘에 한국 개신교가 이러한 형태를 그대로 반영이나 하듯 추한 모습을 그대로 다 내보이고 있는 실정인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