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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엽제 덕에 30년 만에 군복을 입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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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요하 [jiyoha] 쪽지 캡슐

2006-07-05 ㅣ No.101696

 

          고엽제 덕에 30년 만에 군복을 입어보다
              군복을 입으니 이상한 슬픔이...

 


 



▲ 베트남 전장에서의 모습. 1970년 10월쯤이었을 것 같다. '도깨비 10호 작전'이었던가. 치누크를 타고 정글 지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사진을 찍으면서 어쩌면 내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 싶다.
ⓒ 지요하

 


<1>

지난달 30일 군복을 입어보았다. 얼룩무늬 예비군복이었다. 군복을 입고 거의 하루종일을 지냈다. 다시 군복을 입어본 게 정확히 얼마 만인지는 모른다. 대략 30년은 되었지 싶다. 1972년 5월 제대를 한 후 몇 년 동안 향토예비군 노릇을 했다. 그러다가 1976년 고향을 떠나 객지 유량 생활로 접어들었다. 그 이후로는 군복을 입어본 기억이 없다.

1980년 가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살기 시작한 후로 동생들의 군복 입은 모습을 본 기억은 가지고 있다. 1997년부터인가, 고장에서 베트남 전쟁 관련 단체에 참여하면서 종종 비슷한 연배들의 군복 입은 모습을 보게 되었지만 나는 군복 입을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2003년 고엽제 후유증 판정을 받고 '고엽제전우회'라는 단체에도 참여하게 되었지만, 그 단체의 충남지부 창립 기념 행사 등에 참가하면서도 군복을 입지 않았다. 거의 모든 이들이 군복을 입고 있는 자리에 민간 복장으로 끼어 앉아 있는 것이 좀 미안하긴 했지만 군복을 입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군복을 입으면 '속박'과 '획일'이라는 단어의 실체와 만날 것 같았다. 적어도 그 단어들을 질감적으로 떠올리게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군복을 입지는 않았더라도, 군복을 입은 '무리' 속에 끼어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부담스러운 느낌들을 안아야 했다.

저 베트남 정글 속의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 저 최전방 DMZ의 철책선이 안겨주던 막막한 단절감 같은 것들이 다시금 되살아나서 내 가슴에 미묘한 통증을 안겨주는 것만 같았다.

더욱이 얼룩무늬 군복은 '공수특전단'을 쉽게 연상시키는 옷이기도 했다. 저 80년 5월 광주의 '전두환 군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참으로 달갑지 않은 그 혐오감을 다시금 '피부로' 감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정말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태안군지회' 창립에 참여하면서도 군복을 다시 입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마음속으로 갈등을 겪었다. 이 초로의 계절에 저 청년 시절의 군복을 다시 한번 입어보고 싶은 마음과 군복이 안겨주는 미묘한 부담감 사이에서 쉽게 결심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고엽제전우회 태안군지회 창립 행사 하루 전에 군복을 입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것은 창립 행사의 '사회'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고장의 이런저런 행사에서 사회를 본 경험이 있는 데다가 고엽제 전우들 가운데서는 가장 젊은(?) 축에 속하기 때문에 그 봉사를 맡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행사 하루 전날 오후에서야 시장의 한 가게를 찾아 얼룩무늬 군복을 구입했다. 얼룩무늬 모자와 군화 외에 여러 가지 표식들도 구입했다. 그것들을 옷에 붙이고 명찰을 새기는 비용까지 합해 10만원 정도 지출을 했다.

군복을 구입할 때는 하의만 잠시 한번 입어보았을 뿐 상의는 입어보지 않았다. 군복을 입어보는 일에서 가지게 될 미묘한 느낌, 일종의 감회 같은 것들을 행사 당일인 다음날로 유보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날 저녁 아내는 군복의 양 소매를 접어서 다려주는 등 잔손질을 해주었다. 그리고 옷걸이에 걸어 거실의 책장 앞에 걸어놓았다. 거실 소파에 앉아 책장 앞에 걸린 내 이름 석자가 새겨진 군복을 바라보자니 만가지 느낌이 가슴에 가득 차는 것 같았다.

속박과 획일의 그림자도 얼비치는 것 같았고 저 80년 5월 이후 내 가슴에 깊이 드리워진 공포감과 혐오감도 되살아나는 듯했지만, 그 속에는 야릇한 그리움도 있었다. 정말 좀더 명료하게 느껴보고 싶은 '향수' 같은 것이 내 가슴 안에서 작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느낌들이 한데 어우러지더니 종래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묘한 '슬픔'이 되는 것 같았다. 나는 30년 만에 다시 입어보게 될 군복을 오래도록 바라보면서 그 미묘한 슬픔을 즐겼다. 가족들이 모두 잠자리에 든 한밤중에 홀로 거실 소파에 앉아 '몰래' 양주 한 잔을 마시며….


<2>



▲ 30년 만에 군복을 입고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태안군지회' 창립 행사의 사회를 보고 있는 모습.
ⓒ 지요하


나는 군대 생활을 비교적 다채롭게 한 셈이다. 후방과 베트남과 최전방을 다 겪었다. 특별한 경험들이 꽤 많다.

후방에서는 논산훈련소 조교 생활을 했다. 훈련병 생활을 마치고 다른 기성 부대로 팔려가지 않고 훈련소 조교가 된 것은 내 운동선수 이력 덕이었다. 논산훈련소가 '제2군사령부 창설 15주년 기념 격구대회'에 대비하여 선수 확보에 나선 것과 시기가 맞아떨어진 덕분이었다.

1년쯤 논산훈련소 조교 생활을 하다가 월남엘 갔다. 세 번이나 지원을 거듭한 것이 마침내 성사를 본 덕이었다. 월남에서는 '보충병 받으나마나'라는 별칭을 가진 백마사단 도깨비연대의 1중대 공수기지 생활을 시작으로 1대대 '특별기동대'로 파견되어서 이름 그대로 특별한 활동을 했다.

반창고(부상병)들이 원대 복귀하지 않고 귀국할 때까지 머무는 대대 본부중대 경비소대 막사 안에 한동안 내 야전침대를 놓고 있다가 월남 말년에는 대대 정문 위병 근무를 하기도 했다.

귀국을 해서는 전방 생활을 했다. '겉보리사단'이라는 별칭을 가진 15사단 38연대로 떨어져서 겨울 내내 대성산을 오르내리며 제설 작업 아니면 화목(火木) 작업을 했다. 그러다가 최전방 철책선 경비 근무를 하게 되면서부터는 분대장 노릇을 했다.

중대에 하사가 남아도는데도 중대장이 굳이 병장에게 분대장 직책을 맡긴 탓에, 그리고 내가 맡은 110미터 구역 안에 비무장지대로 나가는 '통문'이 있는 탓에, 게다가 소대장이 관리해야 하는 통문 열쇠를 분대장인 내게 맡긴 탓에 그것을 눈치챈 수색중대 병사들과 묘한 신경전을 벌이며 적잖이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통문을 통해 비무장지대로 나가서 야간 매복을 하는 것이 주임무인 수색중대 병사들과 벌인 그 신경전은 지금도 내 가슴을 무겁게 한다. 후방과 월남과 전방 생활을 통틀어서 제대 말년의 철책선 근무 분대장 노릇이 가장 '위험'하고 힘들었지 않나 싶다.

군대 생활 속에서 겪은 이런저런 특수상황, 그 경험들을 소재 삼아 몇 편의 소설을 쓰기도 했지만, 아직 발표를 하지 못한 작품도 있고 쓰지 못한 얘기들도 있다. 군대 시절의 이런저런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가지고 '내 슬프고도 아름다운 기억들'이라는 이름의 연작 소설을 쓰고 있기도 하다.

후방과 월남 전장과 최전방 철책선으로 이어진 내 아기자기한 군대 경험은 그러나 전반적으로 우울한 상념들을 갖게 한다. 생각하면 모두 좋은 추억들이지만 그 추억들이 군복에 대한 애착을 갖게 하지는 못한다. 거기다가 저 80년 5월 광주의 '전두환 군대'를 목격한 다음부터는 군복에 대한 극심한 혐오감마저 갖게 되고 말았다.

군복을 보면 이상한 연민과 고뇌의 언저리를 다시금 접하게 되는 현상은, 어쩌면 정신 작업을 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멍에일지도 모를 일이다.


▲ 행사 도중 기백환 지회장과 함께. 군복을 입은 내 모습이 너무 늙어 보인다.
ⓒ 지요하


그런데 나는 오늘 30년 만에 다시 군복을 입었다. 30년 동안 거리를 두고 살았고 베트남 전쟁 관련 단체들에 참여하여 이런저런 행사 때마다 군복 입은 무리 속에 끼어 앉으면서도 군복 입을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지난달 30일 30년 만에 다시 군복을 입어보았다.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태안군지회' 창립 행사의 사회를 보았다. 거울을 보니 군복 입은 내 모습이 더 늙어 보이기는 했지만, 확실한 감회가 있었다. 내 군대 시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도 있었다. 막연한 듯하면서도 질감 좋은 향수의 지속적인 작동 속에서 나는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슬픔이었다. 내가 세상 끝까지 안고 살아야 할 슬픔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나는 그 날 하루종일 슬픔을 즐긴 셈이었다. 투명한 슬픔 속에서 정말 기분 좋은 하루였다.


2006-07-05 11:29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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